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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9)] 50만 장병 육성한 제주

입력 2023-05-08 20:30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투지… 한줌 희망으로 다시 일어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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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빼앗긴 정부는 '1·4후퇴'를 통해 부산으로 피난했다.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정부는 전선에 안정적으로 병력을 투입할 수 있도록 장병들을 훈련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단, 1951년 3월 21일 대구의 제25연대를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로 옮겨 육군 제1훈련소를 설치했다.

이후 육군 제1훈련소는 1956년 문을 닫을 때까지 5년간 50만 장병을 육성, 서울 재탈환을 비롯한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중공군 개입으로 '1·4 후퇴'… 부산 피난후 '일진일퇴'
25연대 서귀포시 모슬포로 옮겨 육군 제1훈련소 설치
1956년 해체될 때까지 후방 핵심 전략기지 역할 '톡톡'
비바람에 병력 수송 차질… 물 부족한 악조건서 단련
병사·피난민들 '전쟁의 두려움'… 강병대교회 찾기도


■ 후방 핵심 전략기지가 된 육군 제1훈련소

최초 모슬포에 설치된 육군 제1훈련소는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짓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천막으로 막사를 대신하면서 거대한 천막도시와 같은 모습이었다.

훈련소의 면적은 198만㎡(약 60만평) 규모로 모슬포 남쪽에 본부가 있었고 보성리와 인성리 방면에는 연대들이 자리잡았다. 그 사이에 공병대와 헌병대, 정훈부, 통신대, 하사관학교, 병참대가 들어섰다.



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가 들어선 것은 이 지역이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중국 본토 침공을 위한 중간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1931년부터 군사기지가 설치됐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미군에 의해 일제들의 무기는 해체됐지만 각종 시설들은 그대로 사용되면서 1946년에는 조선경비대의 주둔지가 됐고, 이후 육군 제1훈련소로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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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해병대 제9여단 91대대 안에 위치해 있는 옛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 /김웅철 향토사학자 제공

치열해지는 전쟁으로 인해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부족해진 병력을 빠르게 보충하기 위해 당시 제1훈련소의 훈련기간은 12주에서 3주로 단축됐다. 훈련기간이 크게 짧아진 대신 훈련은 더욱 엄하고 혹독하게 진행됐다.

다만 모슬포는 땅은 넓었지만 훈련소로 운영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화산섬인 제주의 특성상 빗물이 고이지 않고 모두 지하로 흡수되면서 물이 부족했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훈련이 쉽지 않았다.

당시 해군이 화순 항만대 해안을 통해 상륙함과 수송선을 운영하며 장병과 물자를 실어 날랐는데 연중 비바람이 심하다 보니 배가 다닐 수 있는 날이 90여 일밖에 되지 않아 신병과 훈련 장병 수송에도 지장이 많았다. 이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육군 제1훈련소는 1956년 1월 훈련소가 해체될 때까지 50만명의 장병을 배출, 후방 핵심 전략기지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현재 훈련소 정문 기둥과 지휘소, 의무대 등이 남아 있어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 곳에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해병 3기생들이 훈련을 받았던 훈련소 병사 건물과 세면장, 사열대 등도 남아있다. 이 시설들은 등록문화제 410호로 지정됐다.

모슬포에 대규모 군사 훈련장이 조성되면서 피난민들도 훈련소 주위에 몰려들었고, 모슬포는 군사도시로 자리를 잡았다. 훈련병들이 몰래 가지고 나오는 군복이나 양말 등의 군용물품들이 거래됐고, 모슬포 주민들은 삶은 고구마를 배고픈 훈련병들에게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모슬포 중심에 위치한 용천수인 신영물에는 피난민들이 물지게로 물을 길어다 사용했고, 인근 도로변에는 고구마와 보리떡같은 간식을 파는 즉석 판매장이 들어섰다.

신영수 취수장 인근 빨래터에서는 대정부녀회원들이 훈련병들이 쏟아낸 엄청난 양의 군복 빨래를 돕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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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 내부 모습. /김웅철 향토사학자 제공

육군 제1훈련소가 후방 핵심 전략기지로 자리잡으면서 정부 고위 인사들과 장성들도 잇따라 방문, 훈련을 참관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을 비롯한 참전국 대표단이 수시로 모슬포를 찾았다. 모슬포에 위치한 대정고등학교 앞 너른 터가 '워커 운동장'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는 워커 장군이 훈련소를 방문한 기념으로 붙여졌다.

공군사관학교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서귀포시 대정읍으로 이전, 대정초등학교에 임시로 자리를 잡았다. 1951년 2월 1일부터 4월 23일까지 80여 일의 짧은 기간동안 운영됐음에도 공군 장교 후보생 1천여명을 배출했다. 이를 기념해 대정초 교정에는 훈적비가 세워졌으며 주민들은 이를 '보라매탑'으로 부르고 있다.

육군 제1훈련소가 창설된 이듬해인 1952년에는 의무대와 후송병원을 맡았던 제98육군병원이 서귀포시 대정읍에 설치됐다.

당시 제주도민과 피난민을 치료하는 제주 유일의 3차 의료기관의 기능도 수행했던 이 병원은 총 50여개 병동이 지어졌는데 1964년 3월 대정여자고등학교가 개교하면서 병동 건물들은 차례차례 철거되고 현재 본 건물 한 채만 남아있다.

■ 훈련병들을 다독인 '강병대교회'


육군 제1훈련소가 설치된 이후 치열한 전선에 투입될 장병들의 정신력을 강화하기 위한 교회가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건립됐다.

당시 훈련소장을 맡았던 장도영 장군은 강한 병사를 기르기 위한 취지로 교회에 '강병대(强兵臺)'라는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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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여자고등학교에 남아 있는 제98육군병원 건물.

전쟁이 한창인 시기였기 때문에 전문 기술자가 아닌 국군 공병대가 건설한 이 교회는 제주 현무암으로 지어졌으며 현재까지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제주지역 군사유적지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전돼 2002년에는 등록문화재 38호로 지정됐다. 예배당 595㎡, 교육관 51㎡로 전체 건물면적은 646㎡ 규모다. 건립 당시에는 목재 골조 위에 함석지붕을 씌웠지만 2006년 보수공사를 벌이면서 지붕과 교회 첨탑이 새롭게 단장됐다.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빠른 병력 수급을 위해 육군 제1훈련소는 훈련기간을 12주에서 3주로 단축한 대신 엄혹한 훈련을 이어갔다. 혹독한 훈련에 심신이 지치고 연일 들려오는 전선의 소식에 극도의 두려움을 겪게 된 훈련병들은 강병대교회에 들려 마음의 안정과 용기를 가졌다.

제주로 피난을 온 피난민들도 강병대교회에 마음을 의탁하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도했다. 특히 강병대교회는 주민을 위한 교육공간이자 대민봉사기관으로도 활용됐다. 모슬포지역의 첫 유치원인 샛별유치원이 1952년 이 교회에서 태동했고, 인근의 모슬포 중앙교회와 모슬포 제일교회의 모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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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제1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장병들에게 대정부녀회원들이 주먹밥을 배급하는 모습. /김웅철 향토사학자 제공

고등교육을 받은 군인들은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연말이면 전쟁고아들을 위해 산타할아버지로 변신, 옷과 신발 등을 선물했다.

강병대교회는 전쟁이 끝나고 12년 후인 1965년 공군 8546부대로 편입돼 기지교회로 새롭게 발족됐다. 1966년에는 교회 부설 야간 중학교인 신우고등공민학교가 설립됐고, 1981년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제주일보=김두영기자,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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