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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1)] 조화·균형·협력의 틀, 나라 일꾼 키워낸 힘 고향에 있었다

김명래
김명래 기자 problema@kyeongin.com
입력 2023-05-10 15:31 수정 2023-11-02 17:10

윤대희 전 국무조정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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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희 전 장관.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성공한 공직자 윤대희'를 만든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윤대희 전 국무조정실장(장관급)을 몇 차례 만나고 그를 알아갈수록 장관에 오르기 전까지의 공직 이력보다 그 후 민간 경력이 그를 온전히 더 드러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2009년부터 우창록 법무법인 율촌 명예회장과 함께 대한민국 교육봉사단 '씨드스쿨'의 오랜 후원자로 서 있다. 씨드스쿨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중학교 2학년 아이들의 자존감 향상, 재능 계발, 진로 탐색을 돕는 대학생 일대일 멘토링 프로그램이다. 그는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전직 경제 관료 모임 '재경회'가 2011년 공동 기획한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코리안 미러클' 1~7기 편찬위원으로 지금까지 활동한다. 경제 관료와 언론인, 전문가 증언을 남긴 기록물로 이들의 성공과 실패, 갈등과 고뇌의 경험이 흥미진진하다.

그는 한국의 경제 성장 경험을 주변 국가에 전하는 경제발전경험공유사업(KSP·Knowledge Sharing Program)에도 수석 고문으로 참여했다. 남미,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지역 개발도상국을 돌며 한국의 경제 성장 경험과 사례를 공유했다. 이처럼 가난의 대물림을 끊고, 기록을 남기고, 유용한 경험을 전파하고 나누는 역할에서 그는 장관의 경력보다 더욱 큰 보람과 명예를 느낀다. 탁월한 조정자로서 기질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그의 유년 기억은 인천 숭의동 115번지 허름한 초가집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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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희 전 장관(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경제개발경험 지식공유사업(KSP) 단장으로 아프리카 가나에서 활동하던 모습. /윤대희 전 장관 제공
나 어릴적 숭의동은 용광로 같은 동네였어요.
계층 가리지 않고 모두 섞여 돕고 도왔죠.
윤 전 장관은 1949년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 동네는 1980년 구획정리사업으로 숭의동 83의 17로 지번이 바뀌었는데, 현 극동아파트 북측이다. 부모님은 충북 괴산 출신으로 '오로지 자녀 교육'을 위해 1938년께 네 살배기 장남과 두 살 된 딸을 등에 업고 아무 연고도 없는 인천으로 이주했다. 물려받거나 모은 재산도, 배운 기술도 없어 닥치는 대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윤 전 장관이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떡 장사로 자녀들을 키웠다. 숭의동은 주민이 출신, 직업, 계층을 가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섞이는 용광로와 같은 동네였다.

6·25 한국동란 때 피난민 있던 동네
아이들은 중국인 묘지서 '보물찾기'

떡 팔아 홀로 자녀 키우신 어머니
매일 하시던 말 "공꼬 좋아하지 말라"
'공짜 경계론' 자리잡게 된 가르침

"부모님은 충청도에서 올라오셨고, 6·25 한국동란 때 이북에서 피난 오신 분이 많았어요. 물론 인천 토박이도 있었고. 이웃끼리 담장 없이 다 터놓고 김장 같이하고, 동네 어른들이 모여 바둑과 장기 두면 아이들은 어깨너머로 배우고, 어려운 일 있으면 서로 도와주는 일종의 '멜팅 폿'(melting pot)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풍경이죠."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숭의동은 논과 밭으로 둘러싸인 인천의 벽촌(僻村)이었다. 모두 가난했지만 누구나 힘껏 일하고 자녀 교육에 힘을 쏟으면 삶이 조금 더 윤택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던 시절이었다. 윤 전 장관보다 14살 위인 큰형은 하와이 이민자들이 용현동에 세운 인하공대 2기생으로 입학했다. '동네 1호 대학생'이었다. 당시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놀았을까. "동네 좀 벗어나서 놀자, 그러면 낙섬에 갔어요. 갯벌에서 망둥어(망둑어) 낚시를 하고 게를 잡고. 염전에 저수지가 있었는데 거기서 수영을 배웠죠. 어떻게 보면 우리 어릴 때 헬스클럽 같은 곳이었어요." 

미추홀구 용현동은 지금과 달리 1950~60년대에는 육지 끄트머리 소금밭이었다. 뭍에서 육안으로도 보인 작은 섬 '낙섬'은 1929년 조선염업주식회사가 그 일대 바다를 염전으로 개발하면서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염전에 물을 대는 저수지는 인근 용현초, 숭의초 아이들의 물놀이터였다. 낙섬 염전은 1966년 소금 생산을 멈췄고, 공기업 토지금고(현 LH)가 1976년 폐염전을 사들이고 용현지구 주택단지 조성사업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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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섬 염전.




제물포역 주변 도화동 현 인천대 제물포캠퍼스 자리(부채산)는 화교 집단 거주지였다. 화교가 재배하는 토마토, 가지 등 작물은 숭의동 아이들의 먹잇감이었다. "몰래 서리하고 막 도망가는 장면이 커서도 가끔 꿈에 나올 정도"로 오래 기억에 남은 공간이다. 이국적 풍경의 거리와 중국인 묘지를 아이들은 놀이터로 삼아 매일같이 오갔다. '무덤에서 보물찾기'에 나선 숭의동 10대 청소년이 묘를 허물고 관 뚜껑을 열어보다 놀라 도망가서 경찰 수사까지 이어진 사건이 발생할 정도였다. 중국인 묘지의 운명은 기구했다. 성광학원을 인수한 선인학원의 교세 확장에 밀려 만수동으로 옮겨졌고, 그 과정에서 육군 장성 출신 백인엽(1923~2013)씨가 묘지를 불도저로 밀어 버려 외교 문제로 비화된 적이 있다. 만수동 묘지 역시 도시 재정비 사업에 밀려 1990년대 부평가족공원으로 이전됐다.



어머니는 당시 여느 부모처럼 자녀의 '외적 성공'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내적 성장'도 강조했는데 그게 '공짜 경계론'으로 이어졌다.

"어머니가 방앗간 비슷하게 떡 도매를 하셨어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공꼬(공짜의 사투리) 좋아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자랐어요. 대학 시절 이를 'windfall profit'(횡재)이라는 표현으로 바꿔 지금껏 경계 대상 1호로 삼고 있어요. 그간 여러 인사 검증을 별 탈 없이 통과하고 제겐 과분한 자리에서 일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어머니의 '조기 교육' 덕분이라고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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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기획원(EPB) 야구부 시절.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선수가 윤대희 전 장관이고,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8번 선수는 정지택 전 KBO 총재다. /윤대희 전 장관 제공

'야구'를 빼놓고 윤대희라는 인물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구도(球都) 인천'에서 시작된 야구와의 인연은 단지 취미 활동에 그치지 않고 그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숭의초등학교 야구부에서 처음 글러브를 잡은 이후 어느 자리에 가서도 야구와 연결된 끈을 놓지 않았다.

"1945년 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고 제일 먼저 미군이 들어온 데가 인천입니다. 이 사람들이 인천에 야구 장비를 엄청나게 뿌려댔어요. 거의 모든 초·중·고 각 학교에 배트와 글러브가 보급됐어요. 그래서 초중고교 야구대회가 끊임없이 열렸습니다."

식민지 끝나고 미군 가장 먼저 들어온 인천
'구도 인천' 야구 인연은 서울대 가서도 계속

"부럽더라"… 어머니 한탄에 공직 입문
1998년 주 제네바 대표부 참사관 부임 등
통상 협상 테이블서 국가 간 이해관계 조정 역할
훗날 청와대 수석 한미FTA 협상 주도 자산으로

인천의 야구 실력은 전국 무대에서 입증됐다. 1950년대 동산고와 인천고 야구부는 최강 실력으로 맞선 라이벌이었다. 1953~1954년 청룡기 2연패의 인천고는 1955년 대회 결승에서 동산고와 맞붙었다. 용호상박 결전에서 12회말 접전 끝에 동산고가 우승했다. 당시 인천 야구팬 중 동산고를 비난하는 이가 많았다. 3연속 우승팀은 청룡기를 '영구 보존'할 수 있었는데, 같은 인천팀인 동산고가 인정머리 없이 그 꿈을 가로막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동산고는 1955~57년 청룡기를 내리 석권하면서 청룡기 영구 보존의 꿈을 이뤄냈다.

윤 전 장관은 서울대 상대 야구부 활동을 거쳐 경제기획원 재직 시절 야구부 '돌핀스'에서 창단 멤버, 주장으로 뛰었고 감독까지 맡았다. 그는 야구에서 "개인 기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팀워크가 안 되면 결코 상대방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체화했다. 조화, 균형, 협력의 틀에서 적재적소의 자원 배치를 통해 성과를 내는 리더의 자질을 갖추는 데 그의 오랜 야구 사랑이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윤 전 장관은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이후 '한국사회연구회'라는 서클에 가입, 재학 시절 내내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고 글을 쓰는 일에 열중했다. 고(故) 변형윤 교수 추천으로 서울은행(현 하나은행)에 입사했다. 서울은행 신용조사부 재직 중 "괴산 살 적에 고등고시에 합격해 보은군수로 내려온 아들을 둔 부모가 그렇게 부러웠다"는 어머니 한탄을 듣고 뒤늦게 고시 공부를 시작해 1975년 행정고시(17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공정거래위 하도급과장, 독점관리과장, 경제기획원 국제경제과장, 재정경제원 재정계획과장 등을 거친 뒤 1998년 주(駐) 제네바 대표부 참사관으로 부임해 3년간 일했고, 다자간 통상 협상 현장에서 국가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귀중한 경험을 쌓았다. 훗날 청와대 수석으로 한미FTA 협상을 주도할 수 있었던 자산이 됐다.
아침 10시 시작해 저녁 8시 끝나던 WTO 회의
이어폰 끼고 있다가 한국 컴플레인 오면 즉각 반박했죠.
"WTO 협상이 워낙 벌어질 때니까, 정말 바빴어요. WTO는 모든 통상 협상의 가장 수준 높은 곳입니다. 회의가 아침 10시에 시작하면 길게는 저녁 8~9시까지 이어져요. 이어폰 끼고 각 나라 발표를 종일 들으면서 한국에 대한 무슨 컴플레인이라도 나오면 즉각 끼어들어 반박해야 했습니다. 일본은 여러 명 나와 있는데 우리는 제 밑에 과장, 사무관 이렇게 3명이 회의 열 몇 개를 들어가야 하니까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어요. 나중에 돌아보면 '내가 한미 FTA를 위해 제네바까지 갔는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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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조정실장은 장관급으로 정책 조정 책임 장관이다. 장관에 임명된 이후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윤대희 전 장관 제공

한미 FTA 협상 당시 국내 여론은 찬반 양측이 첨예하게 맞섰다. 참여정부 지지층은 'FTA 반대'였는데 오히려 정부를 불신하는 쪽에서는 'FTA 찬성' 입장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모든 개방이 성공할 수 없지만, 성공하려면 개방으로 가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정치인으로서 힘든 선택을 하고 정면돌파했다. 시중에 음모론이 퍼졌다. '참여정부는 한미 FTA 타결 의지가 처음부터 없었고, 차기 대선에 유리하게 활용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윤 전 장관이 이 내용을 보고하자 노 대통령은 "일국의 대통령이 중요한 통상 협상을 정파에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윤 전 장관은 그때를 면구스러운 순간으로 기억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참여정부 시절
FTA 반대의견 전했던 면구스러운 기억

2001년 합계출산율 1.3 수치에 놀라
저출산 보고서 만들어 정책토론회 개최
'저출산 고령화' 대책의 토대… 여전히 책임감
소관 아닌 현안 끄집어낸 일화 '유연성' 돋보여

윤 전 장관은 '저출산 고령화' 의제를 처음 이끌어내기도 했다. 소관 업무가 아닌 현안을 끄집어내 정책 입안까지 이끄는 과정을 보면 공직자로서 책임감과 유연성이 돋보인다.

"2002년 재정경제부 국민생활국장이 돼 업무보고를 받는데 합계출산율이 1.3(2001년 기준)으로 돼 있길래 담당 사무관에서 '미스 프린트인 것 같으니 다시 한번 확인해 보라'고 지시한 적이 있어요. 엄청난 충격이었죠.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누구도 문제를 드러내지 않는 게 공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당혹스러웠어요. 저출산 보고서를 만들어 KDI(한국개발연구원)에 정책 토론회 개최를 요청했어요. 당시 담당이 UCLA 출신으로 나중에 국회의원이 된 이혜훈 박사였어요. 이게 대통령 주재 국민경제자문회의에 올라갔고 저출산 고령화 대책이 된 거예요. 그런데 이게 여전히 해결이 안 되고 출산율은 0.78까지 더욱 악화됐으니 이 정책과 관련된 한 사람으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인천은 혼자 풀 수 없는 문제가 많아요.
수도권쓰레기매립지, 광역교통망… 지자체 협조 있어야죠.
윤 전 장관은 인천 현안을 비교적 잘 꿰고 있다. 공직자 시절 고향 인천의 변화에 늘 관심을 갖고 지냈고, 인천경제자유구역 지정 취지와 과정을 소상히 알고 있다. 그는 "인천 현안이 참 어려운 게 인천 혼자 풀 수 없는 문제가 많다"고 말했다. 수도권쓰레기매립지 종료, 광역교통망 개선 등 인천시가 오랜 시간 노력해 온 과제는 인접 지방자치단체의 협조 없이는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산업구조 개편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인천은 국내 전체 인구의 5.7%, 지역내총생산(GRDP)은 4.7%를 차지합니다. 1%p의 격차가 있는데, 한마디로 제 몫을 못 찾는 거에요. 인천만이 가질 수 있는 비교 우위의 산업을 찾아가는 연구를 해 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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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제물포고 졸업사진. 사진 왼쪽부터 김진태 전 인천동산병원장, 윤대희 전 장관, 오희철 연세대 의과대학 명예교수로 모두 천주교 메리놀외방전교회 도화동성당 남학생 센터 회원이었다. /윤대희 전 장관 제공
정직은 하면서도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친구. -친구 김식만(치과 의사)씨
윤 전 장관과 고교 재학 시절 단짝으로 함께 부산까지 무전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 김식만(치과 의사)씨는 친구를 이렇게 기억했다. "제가 1+1=2로 꽉 막힌 사람이었다면 윤대희는 정직은 하면서도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친구였어요. 제가 식물세포라면 그 친구는 동물세포로 볼 수 있죠. 숭의동 시절 깡시장 옆 철로를 걸어가면서도 책을 읽을 정도로 엄청난 노력가였지요. 3학년 때 국제실업 박정기 전무님 선화동 집 2층에서 그 집 아들 태현이와 대희, 저 이렇게 셋이 1년간 숙식하며 공부했는데 가장 늦게 잠들고 제일 먼저 일어나는 친구가 대희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을 떠나 50년 넘는 시간을 타지에서 지냈다. 그는 "오늘의 저를 있게 한 게 인천의 포용성"이라고 말했다. 또 제물포고 시절 배운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교훈을 오랜 공직 생활 귀감으로 삼았다고 했다. 실제 제물포고 출신 공직자 중 '유감스러운 일'로 물러난 이들은 거의 없다는 게 윤 전 장관 자부심이었다. 

/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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