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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단의 기억·(10)] 새 운명 기다리는 파주 미군반환공여지

신지영
신지영 기자 sjy@kyeongin.com
입력 2023-06-12 20:19

반세기 넘어 열린 '금단의 땅'… 동맹의 상징은 어떻게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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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경지 경기도, 휴전후 곳곳에 기지
50여년 지나 캠프 통폐합, 철수 시작
핵심 주둔지 평택행, 용산은 공원화
2006년 '공여구역 특별법' 제정에도
적은 국비 보조… 도내 활용안 부진

일제시대 농장 자리에 '캠프 하우즈'
20여개 건물 역사적 가치 판단 필요
다른 캠프서 볼수 없는 건축 양식도

민통선 반환 공여지 '캠프 그리브스'
퀸셋막사 일부, 아카이브 공간 활용
'전쟁문화유산 보전' 우수사례 평가
타 캠프도 보존·개발 '투트랙' 필요


■ 미군반환공여지들 엇갈린 운명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경기도는 미군의 주요 거점이 됐다. 북한과 맞닿은 북방 경계였기에 휴전에 돌입하며 당연한 수순처럼 미군 캠프가 설치됐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 미군 2사단이 동두천에 주둔하며 미군 캠프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경기도 미군 캠프는 1954년 집중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한다.



미군 캠프가 철수된 건 반세기가 지나서다. 주한 미군 캠프를 통폐합하고 재편성하는 연합토지관리계획(2002년·LPP)과 이어진 용산기지이전협정(2004년·YRP)이 계기가 됐다. 미군이 떠나며 돌려받은 주한미군 공여구역의 전국 면적은 242.07㎢ 인데 그 중 경기도에 210.61㎢가 있다. 한때 도시 전체 면적의 40% 이상을 미군 캠프로 내줬던 동두천이 대표적인 예다.

협정에 따라 미군 핵심 주둔지가 평택으로 이전했고, 한국 미군의 대표적 상징이었던 용산기지도 공원으로 탈바꿈을 앞두고 있다. 미군 캠프가 떠나고 남은 경기도 미군반환공여지의 운명은 지역별로 엇갈렸다.

미군 캠프 철수 사업은 핵심 주둔지인 용산, 이전 대상지인 평택, 이전 대상인 경기도 미군캠프의 3개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우선 이전 대상지인 평택은 2004년 제정된 '평택지원 특별법'에 따라 발전계획의 80%·기반시설의 100%를 국비로 보조해 새로운 미군 캠프 조성을 뒷받침했다. 용산을 대상으론 2007년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이 제정됐다. 공원조성비의 100%를 국비로 지원해 국가 책임 아래 공원을 조성하고 주변을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전 대상인 경기도 미군 캠프는 2006년 제정된 '공여구역 특별법'이 지원 근거다. 공여구역 도로·공원·하천과 같은 국유지 토지 매입에 60~80% 국비가 쓰이고 주변지역 지원사업비로 절반 가량이 국비 보조된다.

평택과 용산 대비 낮은 국비 보조는 공여구역 특별법 제정 17년이 넘도록 공여구역 개발이 지지부진하거나 지역별로 큰 편차를 보이는 원인이 됐다. 이 때문에 경기도 선거판엔 선거철마다 '미군공여지 국가주도개발'이란 구호가 습관처럼 오른다.

미군 캠프는 한국전쟁이 남긴 유산이다. 미군이 떠난 뒤 남은 캠프 중엔 철거되고 학교나 공원으로 바뀐 곳도 있고 공터로 남아 있는 지역도 있다. 그 중 캠프 하우즈 내 중대본부(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79-173), 캠프 그리브스(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357-1)의 현재를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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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암농장 자리에 세워진 '캠프 하우즈'


1953년 봄 미 해병대가 북의 서부 침공 경로를 방어할 목적으로 파주 봉일천에 지휘소와 본부를 구축했다. 캠프 하우즈의 시작이다. 1955년 미 제1해병사단을 대체해 미 제24보병사단이 주둔했고 1920년대 미 제1기병사단 초대 사령관을 지낸 로버트 L. 하우즈의 이름을 빌려 캠프 하우즈라고 명명했다.

봉일천에 군 주둔지가 조성된 건 언덕과 계곡이 있는 지형 때문이었다. 은폐가 가능한 좋은 조건 때문에 군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미군이 주둔하기에 앞서 이곳에는 송암(松岩) 조병학(曺秉學·1884~1942)의 여름 별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별장뿐 아니라 우물과 정자, 가족묘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에 어떤 과정으로 미군이 주둔하게 됐는지 정확한 정보는 전해지지 않는다. 조병학은 한국 최초로 농지 경지정리를 통한 영농방법으로 송암농장을 운영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후 아들을 통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 땅 60만평을 기부했다. 다른 한편으론 대지주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던 그는 일제에 돈을 헌납한 사실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캠프 하우즈 내부
캠프 하우즈내 원통형 후문 초소. /경인일보DB

일제 강점기 선진 영농이 이뤄진 송암농장이 미군 주둔지로 변경된 역사는 파주 농업의 과거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장면이다. 캠프 하우즈는 현재 부지를 2개로 나눠 임야는 공원을 조성하고 농경지는 도시개발사업이 진행 중이다. 임야 부지에는 현재도 20개 가량 건물이 존치돼 있다. 송암농장과 송암의 여름 별장부터 미군기지 사용과 현재 공원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정리해 가치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어 보인다.

1955년 이후엔 퀸셋 막사가 많이 들어섰다고 하지만 현재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막사는 없다. 대신 중대본부, 도서관, 레크리에이션센터 등 상위 부대에서만 볼 수 있는 용도의 시설물이 형태가 온전히 남아 있다. 다만 이는 미군 주둔 초기 모습과는 많이 변형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중심 도로 주변에 시설물이 배치돼 있고 정문에서 바라봤을 때 오르막 길에 대부분 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높은 지역에는 숙소 건물이 들어서 있는 구조다.

남아 있는 미군 시설물 중 중대본부 건물과 도서관 등은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평가하기 힘들다. 다만 원통형 모양에 사방에 창을 뚫은 후문 초소는 다른 미군 캠프에서 볼 수 없는 건축양식으로 당시 지역 건축업자들이 참여한 흔적으로도 해석된다. 이런 부분도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캠프 그리브스 전경
캠프 그리브스 전경. /파주시 제공

■ DMZ 눈앞에 둔 '캠프 그리브스'

민통선내 유일한 미군 반환 공여지인 캠프 그리브스는 가장 유명한 미군 반환 캠프일 것이다. 경기도는 지난해 4월 국방부와 '캠프그리브스 기부 대 양여사업'의 최종합의각서를 체결하고 같은 해 8월 소유권 이전을 완료했다. 현재는 2024년 개장을 목표로 '캠프 그리브스 역사공원 조성사업'이 진행된다.

캠프 그리브스에는 반원형 천장이 특징인 미군 퀸셋막사가 다수 남아 있다. 비교적 늦게 지어진 탄약고 등을 포함하면 주요 건축물 34동(화장실 등 포함 시 40동)이 남아 있고 퀸셋 막사 일부는 아카이브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캠프 그리브스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이후 50년 동안 해병1사단, 수륙양용 트랙터 대대, 24사단 19연대, 9기병대, 미2사단 506연대 등 다양한 부대가 주둔했다. 임진강 북부에 자리 잡고 있고 남쪽 임진강 사이 북동·남동 방향 긴 부지 형태로 임진강 쪽은 가파른 경사지여서 남쪽 임진강을 조망하기 유리하다.

1964년 로버트 케네디가 방문했고, 린든 B. 존슨 미대통령 시절인 1966년엔 부통령인 휴버트 호레이쇼 험프레 부통령이 방문하기도 했다.

반환 이후 철거되지 않고 장교 숙소, 체육관, 생활관 등 당시 사용했던 다양한 군 시설이 그대로 보존됐다. 미군 장교 숙소를 리모델링해 유스호스텔로 관광객을 맞이한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이는 민통선 내 최초의 유스호스텔이다.

비무장지대인 DMZ 남방한계선에서 불과 2㎞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전후 초기에는 DMZ와 임진강 순찰 임무를 주둔 부대가 맡았다고 한다. 캠프 그리브스는 다수의 군 시설이 보존돼 있고 시대 변화에 따라 활용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전쟁 문화 유산을 우수하게 보전한 사례로 평가된다. 현재 방문하기 위해선 군에 사전 신청을 해야 한다.

갤러리 캠프 그리브스 내부. 파주시 제공
캠프 그리브스에서 열린 전시회 모습. /파주시 제공

향후 이곳이 역사공원으로 조성되면 경기 북부를 찾는 관광객과 시민들이 보다 자유롭게 캠프 그리브스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전쟁의 상흔, 냉전의 흔적을 간직한 미군 주둔지가 시민 품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휴전 당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민통선 내 역사공원은 그 자체로 역사를 체험하는 장이 될 것이다.

캠프 그리브스 외 다수의 다른 반환공여지들은 적절한 개발 계획을 세우지 못했거나 세웠더라고 답보 상태에 빠져 있다. 지역에 따라 경제성이 달라 개발이 가능한 곳도, 그렇지 않은 곳도 있기 때문이다. 불과 수 년 뒤면 미군공여지 반환이 20년을 맞는다.

강산이 두 번 변할 시점이 오면 곰보자국처럼 남아 있는 미군 캠프의 흔적이 치유돼 있을까. 미군 캠프는 기억해야 할 유산인 동시에 탈바꿈 시켜야 할 상처고 흉터다. 보존과 개발이라는 투트랙 설루션이 필요하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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