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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연 문화체육부 기자 |
종이를 찢어발길까. 분노에 가득 차 욕설을 지껄일까. 아니면 가만히 비웃으면서 책장을 넘길까. 가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곤 한다. '난쏘공'을 읽는 재벌 총수,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는 호모포비아,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는 우리 아버지 같은 베이비붐 세대 아저씨. 그러다 대충 결론을 넘겨짚었다. 애초에 이들은 각각 조세희, 박상영, 최은영의 소설을 읽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 주말,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를 1년 만에 만났다. 오랜만에 봤어도 어색함 하나 없이 신이 나게 떠들었다. 그저 사는 게 바쁘니깐 잠시 멀어졌던 거로 생각하려 했지만, 사소한 잘못 그리고 얼마 전 읽기 시작한 책 내용이 중간중간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다. 물론 잘못의 주체는 '나'였다.
"그 사람이 누군데?" 5년여 전, 서울 어딘가로 맛집 탐방을 가기 위해 수원역에서 올라탄 기차 안이었다. 친구가 최근 다녀왔다는 누군가의 북콘서트 이야기를 꺼냈다. 울었다고 했다. 작가가 하는 말이 자기 상황과 맞물려 갑자기 눈물이 났다면서. 그 작가의 이름은 '은유'. '그 사람이 누군데?'라는 질문은 기실 '그 사람이 뭔데?'였던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왜 눈물을 보이는지 의아했다. '힘든 일이 있었어?'라고 미처 되묻지는 못했다.
공교롭게도 최근 선배 3명에게 선물받고, 대출받고, 추천받은 책 3권의 저자는 모두 은유였다. 이중 '완독 압박'이 분명한 대출받은 책을 먼저 펼쳤다. 조심스러운 비유지만 은유의 글은 실효성 있는 심리상담 같았다. 온기로 가득하되, 그렇다고 무턱대고 다정하지는 않다. 작법론을 전하는 사람 특유의 책임감 있는 태도라고 느껴져 어느새 팔짱을 풀고 마음을 열었다. 비판을 가장한 비꼬기부터 하는 냉소주의자는 어쩌다 보니 이토록 따뜻한 은유 작가의 글을 읽게 됐다. 마구 밑줄을 긋고, 책 모퉁이를 접고, 필사하고 싶어졌다.
책 속에, 더 나아가 기사에 담긴 내용을 배반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충실한 독자'가 될 수 없을 거라고 단정했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했다. 자기소개서에 비장하게 담았던 포부와 달리, 기사 한 줄로 세상은 순순히 바뀌지 않았다. 때로는 기획 시리즈로 길게 알렸지만 유통기한은 짧았다. 당연히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막상 현장에서 자주 겪으니 우울했다. 그래도 나와 같은 부류, 충실한 독자가 1명이라도 있을 테니 그걸로 충분하다면서 자기방어를 해왔다.
이미 확보한 충실한 독자만이 이해하는 기사는 냉정하게 말해 저널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언론 중립성 같은 일차원적인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작가는 주제의식을 온전하게 이야기할 고유한 언어를 찾기 위해 평생을 애쓴다. 기자도 자신의 관점을 공감할만하게 전할 새로운 언어를 발굴해야 하지 않을까. 취재에서 더 나아가 이를 알릴 세심한 언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세상은 변했다.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가 얼마나 부당하게 사는지, 그 사실 자체를 몰라서 연대를 외면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앞선 터무니 없는 상상의 결론은 99%는 맞지만 1% 정도는 틀렸다. 이 1%의 오류에 해당하는 독자가 내뿜을 힘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게다가 기사는 공짜다. 고될 테지만, 저널리즘 글쓰기로 일궈야 할 흥미로운 공간임은 분명하다.
/유혜연 문화체육부 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