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가기

[전쟁과 분단의 기억·(17)] 김포 애기봉평화생태공원

신지영
신지영 기자 sjy@kyeongin.com
입력 2023-09-18 20:32 수정 2023-09-19 19:44

분단이 현실이라면, 이번 생은 꿈이었기를… 애기봉의 서글픈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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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봉 조강전망대에서 시민들이 망원경을 통해 북한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사십년 반평생을 나는 나비로 살았다…'. 시인 신경림이 쓴 '나비의 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비의 꿈에는 '철원에서'란 부제가 달렸다. 각주엔 '철원에는 통일이 되면 남 먼저 돌아가겠다고 주저물러앉아 사는 실향민들이 많다'고 썼다.

호접지몽(胡蝶之夢)에서 따왔을 꿈 이야기는 이렇다. '훨훨 철조망을 날아 넘어가 / 어머니 밤늦도록 바느질하는 / 뒷방 문앞에서 서성거리기도 하고 / 누이한테 매달려 사방치기하던 / 마당가 빨랫줄에 앉아 쉬기도 했다'.

'철조망'이 나오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것이 헛된 꿈임을 안다. 38선이라 부르든 휴전선이라 하든 저 철조망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꿈도 과거형이다. 꿈이자 회상이다. '두엄 썩는 냄새 코 찌르는 / 학교 뒷문으로 날아들어가면 / 2학년 아이들 제각기 소리내어 / 국어책 읽는 소리 / 벌소리처럼 잉잉댔다'.

어머니와 누이, 마당가와 학교를 앗아간 전쟁은 영영 고향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 없는 철조망을 남겼다.



'문득 생각하는 날이 많다 /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 나비인 내가 / 사십 반평생을 좌판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 군고구마나 팔고 있는 /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한낮 철원 거리 좌판 행상이 꾸벅 졸며 꾸는 꿈의 모습은 강력한 최루탄이다. 최루가스는 내 뜻과 무관하게 고향과 가족을 앗아간 전쟁, 상처를 봉합하지 못한 정치, 오랜 기간 공전하는 외교를 동력으로 삼는다. 그리고 사십 반평생이라고 표현한 세월이 이젠 칠십 년을 넘겼다는데서 서글픔은 현재 진행형이다(신경림은 시 '나비의 꿈'을 1991년 펴낸 시집 '길'에 담았다).

한강·임진강 만나는 '한국전쟁 154고지'
1954년 치열한 전투현장에 소나무 트리
박정희, 조선 기생 이름 따와 비석 건립
끝내 만나지 못한 설화, 이산가족 닮아

1971년 등탑 설치… 남북관계따라 점멸
2014년 안전문제 철거… 평화공원으로
고향 못 가는 실향민 위한 망배단 설치

이산가족 상봉, 2018년 8월 이후 중단
그 뒤로 신청자 1만5천여명 세상 떠나
남은 4만명 10년이내 모두 사라질수도
신경림 '나비의 꿈'처럼 아픔은 진행형

애기봉 평화생태공원 메인 건물-김포시
김포 애기봉평화생태공원 메인 건물. /김포시 제공

나비의 꿈으로 시작한 오늘 기획기사는 김포 애기봉평화생태공원으로 향한다.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 1-3 '애기봉'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한국전쟁 당시 154고지로 불리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현장이었다. 1954년 애기봉의 소나무에 트리가 설치된 것이 현재 애기봉평화생태공원까지 이른 출발점이다.

애기봉은 처음부터 애기봉은 아니었다. 1966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애기봉 명칭을 부여하고 비석 건립을 지시한 것이 유래다. 애기는 조선 인조 때 기생의 이름이라고 한다. 병자호란 시절, 사모하던 평양감사와 청나라 군대를 피해 북한 개풍군 지역에 도착했지만 감사는 북으로 끌려가고 애기는 홀로 조강을 건너왔다. 한강 물이 바다와 만나는 김포의 물길은 할아버지 강이란 뜻에서 조강이라 불렸다 한다.

조강을 건넌 애기는 평양감사를 그리워하며 봉우리에서 눈물을 흘렸고 결국 이곳에서 숨져 묻혔다. 봉우리와 개풍군 사이 조강을 두고 그리운 눈물을 흘린 애기의 이야기가 김포와 북한 사이 한강을 두고 오가지 못하는 1천만 이산가족의 한(恨)이 같다는 의미에서 애기봉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반공과 냉전을 뗄감 삼아 영향력을 유지한 정치인이 붙인 명칭이 이제와 경기도를 대표하는 평화의 상징으로 쓰인다는 사실이 역설적이다.

1971년 165m 애기봉 전망대 등탑이 건설됐고 1978년엔 전망대가 설치됐다. 2014년 10월 애기봉 등탑이 철거되기 전 크리스마스 트리가 이곳에서 점등됐다. 강 하나를 두고 망원경으로 피아를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한국의 가장 따뜻한 겨울날 점등된 자유의 상징 트리가 북의 차가운 체제를 무너뜨리리란 희망에서였다.

1954년 초소가 군사용도로 쓰이며 처음 크리스마스 트리가 설치됐고 이후 시기에 따라 트리 높이는 점점 높아졌다. 1964년 해병대가 높이 18m, 폭 23m의 대형트리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1971년 등탑을 세운 뒤로 점등행사가 이뤄졌다.

애기봉 등탑 점등 행사-경인일보DB
지난 2010년 12월 21일 저녁 김포 애기봉에서 여린 성탄 트리 점등식 행사. /경인일보DB

애기봉 등탑 점화는 남북관계가 온랭을 오갈 때마다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2004년 6월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군사분계선(MDL) 지역에서의 선전전을 중단키로 한 합의에 따라 중단됐다가 2010년 재개되는가 하면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거치면서는 점화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부딪쳤다.

43년 동안 유지된 등탑은 안전문제로 철거가 결정됐고, 2021년 그 자리에 애기봉생태평화공원이 들어섰다. 1978년에 전망대가 설치됐고 전망대에서 강 건너 북한 개풍군을 볼 수 있어 실향민이 많이 찾는 공간이 됐다. 지금은 과거 등탑과 전망대, 휴게소 등이 사라져 공원으로 정비됐고 평화생태전시관, 생태탐방로, 조강전망대 등이 큰 규모로 지어졌다. 이곳엔 1989년 건립된 해병대전적비도 있다.

애기봉평화생태공원 안에는 평화교육관, 전망대인 루프탑 154, 카페, 전망대 옆 애기봉비, 망배단이 자리 잡았다. 망배단은 고향에 가지 못하는 실향민이 명절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만든 시설이다.

이산가족 상봉은 지난 2018년 8월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2019년부터 올해까지 1만5천313명의 상봉 신청자가 세상을 떴다. 매년 3천명 가량 상봉 신청자가 사망하고 있는 추이와 생존 상봉 신청자가 4만명 정도라는 점을 고려하면 10년 내 북 실향민·이산가족은 모두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늙어 힘없는 이산가족은 명절이 돼도 망배단을 잘 찾지 않는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뒤로 모두 일흔세 번의 추석이 지났다. 그동안 훨훨 철조망을 넘어가 어머니 계시는 뒷방을 찾거나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어릴 적 학교를 찾아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뒷방, 마당가, 학교는 모두 사라졌을 것이다. 어머니와 누이 역시 지나간 시간에 명멸했다.

구 애기봉 전망대-김포시
애기봉 전망대의 옛 모습. /김포시 제공

망배단 앞에서 이산가족은 무슨 꿈을 꾸었을까. 부디 가족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다면. 지나온 이야기는 나누지 못할지언정 살았는지 죽었는지만 확인할 수 있었다면.

분단이 60년이 다됐던 2009년에도 남북 이산가족의 생사확인은 302건, 2천399명에 달했다. 2010년(302건·2천176명), 2013년(316건·2천342명), 2015년(317건·2천155명)도 마찬가지로 수백 건 생사확인 요청으로 수천 명의 안위가 상호 확인됐다.

마지막이었던 2018년에도 292건, 1천996명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후 2019년, 2020년, 2021년, 2022년, 그리고 2023년 남북 이산가족의 생사확인은 물론 서신교환, 방남상봉, 방북상봉, 화상상봉 모두 '0건'이다.

한가위가 온다. 평양감사와 애기가 끝끝내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는 이미 1966년 154고지가 애기봉이라 명명될 때부터 남북 이산가족의 재회하지 못할 운명을 보여준 것일지도 모른다. 정치와 외교, 나아가 역사가 해결하지 못한 한(恨)을 뒤로 하고 명절이 온다.

곧 휘영청 밝은 달이 뜰 것이다. 환한 달빛이 남북 이산가족의 머리맡을 공평하게 밝히길. 그리하여 베갯머리 나비가 되어서 서로 만날 수 있길. 애기야 어찌 지냈누. 어머니 무탈하셨습니까. 오래도록 천천히 안부를 나누길. 부디 그러하길.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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