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가기

[with+] 배론 성지의 가을 햇빛

입력 2023-11-02 19:44

2023110201000000900056842

김윤배_-_에세이필진.jpg
김윤배 시인
처음부터 배론 성지를 찾아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가을 햇빛이 너무 찬란하니, 어디든 떠나자 한 곳이 배론 성지였다. 제천의 의림지를 한 바퀴 돌면서 배론 성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지라면 더욱 그 땅을 밟아보고 싶었다. 천천히 차를 몰아 배론 성지를 찾아 나섰다. 아직 산하는 푸르러 가을 정취가 깊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차창으로 보이는 산줄기에서 가을의 분위기가 번져왔다.

송골매의 CD를 걸었다. '모두 다 사랑 하리'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를 시작으로 삼십여 곡을 다 들었다. 담백한 목소리가 좋았다. 기교 없이 흐느끼지 않고 흐르는 선율이 매력 있다. 차는 미끄러지듯 성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경내를 둘러봤다. 고즈넉하다.

1801년 순교한 황사영 토굴 초가집
성직자 양성 천주교 첫 신학교 교사
그는 교황 있는 서양 연결 꾀하기도

우선 황사영의 토굴을 찾아갔다. 토굴은 깊지 않았다. 한 사람이 겨우 은거할 수 있는 크기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8개월 동안 토굴에 머물며 중국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간곡한 편지를 썼다. 편지는 명주 천으로 세필로 쓴 글자 수가 122행에 무려 11만3천여 자나 되었다. 그것이 황사영 백서다. 이 백서는 인사말, 신유박해의 진행과정, 순교자 열전,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 맺음말로 되어 있다. 백서는 주교에게 전달되기 전에 압수되었고 백서의 전달을 맡았던 토마스가 그 해 9월 배론에서 체포되어 1801년 11월5일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의 죄로 능지처참 되었고 6일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마리아)는 제주도로, 두 살 된 아들 황경환은 추자도로 귀양갔다. 황사영은 체포되어 그해 11월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백서는 현재 교황청선교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황사영 토굴이 있는 곳의 초가집은 우리나라 천주교 성직자 양성을 위한 첫 신학교인 성요셉 신학교의 교사였다. 1855년 초 성인 장주기(요셉)의 집에 설립된 요셉신학교에는 프랑스인 프레티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학교에는 김 사로요한, 유 안드레아 등 10여 명의 신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사제양성의 열매를 맺을 무렵인 1866년 박해가 일어나 두 신부와 장주기가 새남터와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초기 천주교 순교자들의 삶과 꿈을 정리한 책이 '하늘의 신발'이다. 이 책을 펴낸 설지인은 초기 천주교 순교자들을 '문명충돌 전야의 선각자'라는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설지인이 이 책에서 다룬 인물은 황사영, 이벽, 이승훈, 강완숙과 이순이, 유중철 부부와 김대건 신부 등이다. 설지인은 이 인물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기존 세계관을 뛰어넘는 안목을 가졌다는 점에 놀랐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조선이 작은 중국이 아닌 서양 국가들과 동격의 나라로서 새로운 문명권으로 진입하기를 꿈꿨다고 파악한다.

수많은 천주교인들 처형 집행됐던
서울의 절두산 '순교 성지'로 남아


설지인은 황사영에 대해 외세 침략을 유도하려 한 반역자라는 잘못된 편견을 가진 사람들 편에 서지 않았다. 황사영은 청나라 중심의 세계관을 넘어 새로운 황제 즉 교황이 있는 서양과의 연결을 꾀한 인물이었다. 백서에서 천주 강생 후 1801년이라고 서기를 쓴 것도 기존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관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꿈이 좌절한 것은 단순히 종교 탄압이 아니라 조선이 서양의 지식과 문화, 과학기술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안으로부터 진보할 수 있던 가능성이 짓밟힌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조선 후기 청나라에서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관련 책들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천주교가 서양의 학문으로 받아들여져 서학이라고 불리다가, 차츰 천주교라는 종교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신분 질서를 어지럽힌다 하여 100여 년간 박해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선교사와 신자들이 처형당하거나 유배를 떠났고, 1866년 병인박해 때는 프랑스 선교사를 포함해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당했다. 천주교인들의 처형을 집행한 서울의 절두산은 천주교 순교 성지로 자리하고 있다.



/김윤배 시인




# 키워드

경인 WIDE

디지털스페셜

디지털 스페셜

동영상·데이터 시각화 중심의 색다른 뉴스

더 많은 경기·인천 소식이 궁금하다면?

SNS에서도 경인일보를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