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배 시인 |
황사영 토굴이 있는 곳의 초가집은 우리나라 천주교 성직자 양성을 위한 첫 신학교인 성요셉 신학교의 교사였다. 1855년 초 성인 장주기(요셉)의 집에 설립된 요셉신학교에는 프랑스인 프레티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학교에는 김 사로요한, 유 안드레아 등 10여 명의 신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사제양성의 열매를 맺을 무렵인 1866년 박해가 일어나 두 신부와 장주기가 새남터와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초기 천주교 순교자들의 삶과 꿈을 정리한 책이 '하늘의 신발'이다. 이 책을 펴낸 설지인은 초기 천주교 순교자들을 '문명충돌 전야의 선각자'라는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설지인이 이 책에서 다룬 인물은 황사영, 이벽, 이승훈, 강완숙과 이순이, 유중철 부부와 김대건 신부 등이다. 설지인은 이 인물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기존 세계관을 뛰어넘는 안목을 가졌다는 점에 놀랐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조선이 작은 중국이 아닌 서양 국가들과 동격의 나라로서 새로운 문명권으로 진입하기를 꿈꿨다고 파악한다.
수많은 천주교인들 처형 집행됐던
서울의 절두산 '순교 성지'로 남아
설지인은 황사영에 대해 외세 침략을 유도하려 한 반역자라는 잘못된 편견을 가진 사람들 편에 서지 않았다. 황사영은 청나라 중심의 세계관을 넘어 새로운 황제 즉 교황이 있는 서양과의 연결을 꾀한 인물이었다. 백서에서 천주 강생 후 1801년이라고 서기를 쓴 것도 기존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관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꿈이 좌절한 것은 단순히 종교 탄압이 아니라 조선이 서양의 지식과 문화, 과학기술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안으로부터 진보할 수 있던 가능성이 짓밟힌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다.
조선 후기 청나라에서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 관련 책들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천주교가 서양의 학문으로 받아들여져 서학이라고 불리다가, 차츰 천주교라는 종교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신분 질서를 어지럽힌다 하여 100여 년간 박해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선교사와 신자들이 처형당하거나 유배를 떠났고, 1866년 병인박해 때는 프랑스 선교사를 포함해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당했다. 천주교인들의 처형을 집행한 서울의 절두산은 천주교 순교 성지로 자리하고 있다.
/김윤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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