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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경북 포항에서 보낸 수백 켤레의 신발

임승재
임승재 isj@kyeongin.com
입력 2024-01-21 20:12 수정 2024-01-21 20:18

전세사기 희생자 속출 '골든아워' 놓친 비극
'先구제 後구상' 빠진채 특별법 한계 드러내
'피해자 돕는 사람들' 연재기획에 위로 사연
신발도매업자 '희망의 끈 놓지 마세요'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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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재 인천본사 사회부장
한낱 종잇장에 손끝이 베일 때가 있다. 청소기를 돌리다가도 허리를 삐끗하고, 늘 오가는 동네 골목에서 어이없게 고꾸라지기도 한다. 하필이면 꽉 막힌 출근길에서 멀쩡하던 차가 멈춰 서고, 직장에선 십수년 몸에 익은 일을 하다가 병원 신세를 진다.

인천 한 40대 여성은 가벼운 타박상이나 입을 법한 사고에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한가로이 자전거를 타던 그녀는 넘어지면서 손잡이에 가슴 쪽이 부딪혔다. 그 충격에 간 등이 심각하게 파열됐다. 다발성 골절이나 급성 출혈 등으로 생명이 위독한 환자를 '중증외상환자'라고 한다. 화재, 붕괴, 범죄 등 사건·사고 현장에서만 이런 환자가 생기는 게 아니다. 이 여성처럼 평범한 일상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녀는 복부 내 과다 출혈로 병원 도착 10분 만에 심정지가 발생했다. 당시만 해도 살 가망이 적은 환자였다. 의료진의 응급처치로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뛴 그녀는 수일에 걸친 수술 끝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다.

죽음의 문턱까지 간 그녀를 살리기 위해 많은 이들이 도왔다. 한 행인의 신고가 그 시작이다. 환자상태를 확인한 119구급대는 '인천권역외상센터'로 급히 방향을 잡았다. 연락받은 의료진은 협진을 통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권역외상센터는 중증외상환자를 위해 정부가 전국 주요 병원에 거점 형태로 지정한 의료기관이다. 그녀가 일반 응급실로 옮겨졌다면, 이른바 '골든아워'(Golden Hour)를 놓칠 수 있었다. 센터는 외상·흉부·신경·정형외과 등 고난도 응급수술에 능한 의료진을 갖췄다.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서도 숨가쁘게 돌아가는 센터의 모습이 그려졌다.

의학적 용어인 '골든아워'는 사회 전반에 통용된다. 때를 놓치면 참담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사건·사고 현장에선 말할 것도 없다. 시민의 신속한 신고와 구급대의 정확한 상황 판단, 국내 중증외상 의료체계의 힘이 그녀를 살렸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의의 사고에 개인의 일상은 송두리째 흔들리게 마련이다. 인천 미추홀구 등지에서 하루아침에 전셋집에서 내쫓기거나 그럴 처지에 놓인 세입자들이 그러하다.

전세사기 혐의로 재판 중인 속칭 '건축왕' 남모(62)씨 일당이 이들에게서 빼돌린 전세보증금은 인천지검과 인천경찰청이 확인한 것만 약 430억원(533가구)에 달한다. 검찰은 지난해 5월 중간 수사 발표에서 피해 규모가 늘어날 수 있다고 했다.

경인일보가 건축왕 사건에 주목하기 시작한 건 2022년 11월이다. 자신이 사기를 당한 줄 모르는 세입자들이 다수였다. 사회부 후배 기자들이 비참한 실상을 세상에 처음 알렸다. 인천시는 피해 규모, 가구별 실태 등을 전혀 파악하지 못할 때였다.

이들은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직장을 관둔 채 민·형사 소송, 개인회생 준비 등에 매달려야 했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은행에서 빌린 전세 대출금은 만기가 도래했다. 전셋집이 경매로 넘어갔다는 법원 통지에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인천 등 전국에서 발생한 전세사기로 임차인 보호 목적의 '최우선변제' 등이 허점을 드러냈다. 정부와 지자체들의 대응은 더디기만 했다.

급기야 지난해 초 미추홀구에선 처지를 비관한 청년들이 세상을 등졌다. '주거빈곤' 세대인 청년들에겐 더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렇게 전국에서 희생자가 속출했다. '골든아워'를 놓친 비극이었다.

정부는 뒤늦게 경매 유예, 저금리 대출 등 대책을 내놓았으나, 지원 밖에 놓인 피해자들이 수두룩하다. 여야 진통 끝에 '선(先)구제 후(後)구상' 방안이 빠진 채 지난해 6월 제정된 '전세사기 특별법'도 한계를 드러냈다.

경인일보는 지난해 말 '전세사기 피해자를 돕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기획 기사를 연재했다. 저 멀리 경북 포항에서 신발 도매업을 하는 허태성(68)씨가 운동화 등 수백 켤레를 보내온 사연도 전했다. 시련을 딛고 반드시 일어서길 당부하며 그가 신발과 함께 보낸 손편지의 한 구절로 이 글을 맺는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마세요…'.

/임승재 인천본사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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