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가기

[with+] 다시 맨발걷기

입력 2024-04-25 20:16 수정 2024-04-29 17:25

지난해 아파트 뒷산에 생긴 황톳길
부드러운 감촉에 가벼운 '첫걸음'
사람들 입김에 편리한 쪽으로 변해
리플릿 나눔·꽃길 만드는 사람들도
맨발로 걷다 감기로 고생 '과유불급'


2024042601000312400030422

김예옥_출판인.jpg
김예옥 출판인
숲이 연한 초록빛으로 흔들리고 있다. 휑하니 드러나던 황톳길도 이제는 나뭇잎이 무성해지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7월 하순, 내가 사는 아파트 뒷산에 황톳길이 생겼다. 이미 수년 전부터 맨발로 걷는 열풍이 불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나는 우연히 산을 올랐다가 이제 막 공사를 끝낸 황톳길을 보고는 호기심에 맨발로 걸어보았다. 말캉말캉한 흙을 밟으니 발에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다리와 발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무엇보다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계단만 오르면 될 정도로 가까웠기에 그동안 해왔던 등산이나 걷기운동을 작파하고 그때부터 황톳길에 매진했다. 나한테는 이 길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복덩이였다. 실제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 나도 이사 오고 싶어"하면서 부러워하기도 했다.



새벽 5~6시면 일어나 그 길에 올라가면 벌써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다. 더러 젊은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중년의 아저씨와 아줌마들, 그리고 퇴직한 지 20년은 되었음직한 노인과 지팡이를 짚고 올라오는 할머니들이 주를 이루었다. 동일한 사람이 매일 그 시간대에 오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벌써 익숙해져 인사를 나누고 오래된 사이처럼 지내기 시작했다. 특히 아줌마들의 붙임성은 대단했다. 목소리가 크고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자석처럼 붙이고 다녔다.

그러나 숫기가 없는 나는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제일 힘들었다. 말을 붙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가급적 눈을 피하는 것으로 모면하려 했지만 마냥 무심한 성격이 아니어서 내내 신경이 쓰였다.

막 생긴 황톳길은 사람들의 입김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편리한 쪽으로 바뀌어갔다(주변 환경이 망가지기도 했다). 걷기를 끝내고 흙발을 닦으라고 수도를 설치해놓았는데, 처음에는 샤워기가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샤워기를 달아달라고 하자, 시청에서 바로 달아줬다. 또 비 오는 날 내리막길을 걷다가 어떤 사람이 미끄러져 골절됐는데 시청에선 즉각적으로 붙잡고 오르내릴 수 있는 난간을 설치했다. 한 번은 새벽에 진돗개 5마리가 떼를 지어 황톳길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만약 그때 나 혼자였다면 좀 놀랐을 것이다. 다행히 그 광경을 본 사람이 여럿이었다. 그런데 그중 누군가 민원을 넣었는지 그다음 날, "개떼가 출몰하고 있으니 조심하라"라는 시청 담당 부서의 안내문과 함께 철망으로 된 개집이 설치돼 있었다. 그걸 보면서 나는 사람들의 극성에 시청 사람들도 참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도 황톳길에 자기식으로 기여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자신이 만든 책과 리플릿을 사람들에게 공짜로 나눠주면서 건강 지식을 전파하려고 애썼다. 그는 자신은 국가 공무원으로 평생 많은 것을 누렸기 때문에 퇴직 후 그걸 사회에 돌려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란다. 그는 소위 일류대 나온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걱정 아닌 걱정이 되었다.

또 어떤 노인은 아침마다 황톳길 양쪽에 맥문동을 심는다고 몇날 며칠을 삽을 들고 기우뚱거리면서 움직였다. 그냥 원래 나 있던 풀을 살려두면 더 멋질 텐데 그걸 없애고 굳이 인위적으로 손을 대는 이유가 뭘까? 좋게 말하자면 화단을 가꾸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중년 남성은 황톳길 구간이 짧다고 산길을 쓸고 다듬어 맨발 걷기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황톳길이 폐쇄된 겨울에 사람들은 그가 만들어놓은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긴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8월부터 11월 말까지 넉 달 동안 황톳길을 열심히 걸었던 나는 이후 몸이 많이 아팠다. 일단 한번 뭔가에 빠지면 멈출 줄 모르는 내 성격 탓에 무리를 한 거였다. 발바닥으로 한기가 들어왔는지 감기에 걸려 한 달 넘게 고생하면서 전신이 근육통으로 욱신대는 경험을 했다.

과유불급이었다!

/김예옥 출판인


# 키워드

경인 WIDE

디지털스페셜

디지털 스페셜

동영상·데이터 시각화 중심의 색다른 뉴스

더 많은 경기·인천 소식이 궁금하다면?

SNS에서도 경인일보를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