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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게 숨 쉬는 역사' 수원 경기도청 옛 청사·파주 임진각 방공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3)]

이영지
이영지 기자 bbangzi@kyeongin.com
입력 2024-05-06 19:38 수정 2024-05-06 19:41

벚꽃길·관광지 아래 위치한 호국보훈의 상징들


산책길 바로 밑 지하 1969년 조성 2022년까지 사용
작년 경기기회마켓 개최·올해 보물찾기 미션 장소

지역명소 중심부 군사용품·DMZ 등 내부 전시공간
반지하주택 양식 기원… 대피시설 아닌 활용 '고민'

경기도청 옛 청사 방공호(충무시설)
경기도청 옛 청사 방공호(충무시설). 2024.5.3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 내가 걷는 산책로 바로 밑 비밀공간? 경기도 옛 청사 충무시설


경기도청 옛 청사는 수원에서 손꼽히는 벚꽃명소 중 하나다. 팔달산 자락에서 매년 흐드러지는 벚꽃놀이를 즐길 수 있는 이곳 지하엔 사실 은밀한 공간이 있다. 산책길 바로 밑 지하공간엔 방공호가 숨어 있다.

지난 3일 찾은 구청사 방공호(충무시설) 출입구는 주차장 구석 한쪽 가벽 뒤에 숨겨져 있었다. 방공호를 목적으로 찾아갔음에도 못보고 지나칠 뻔했다. 입구 주변부터 가벽까지 치렁치렁하게 덮고 있던 위장용 그물 덕분인지 더욱 눈에 띄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듯 색이 바랬어도 얼추 나뭇잎같은 모양새를 갖춰 팔달산을 타고 내려오는 이파리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경기도청 옛 청사 방공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가벽
경기도청 옛 청사 방공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가벽.

이 방공호는 1969년 조성된 것으로, 을지훈련 때마다 경기도청 공무원들의 비상대피시설로 쓰이다가 지난해 도청이 광교로 이전하면서부터는 사용하고 있지 않다.

구청사 방공호는 총 2천231㎡ 규모로, 내부엔 9개의 방이 있다. 돔형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좌우로 연결된 통로를 따라가는 구조다. 내부에는 습기 제거를 위해 샤워커튼과 제습기를 가동한다.

방공호, 지하시설이라고 해서 어두컴컴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한 공간을 생각했다면 구청사 방공호를 보고 놀랄 수도 있다. 일반 건물의 내부라고 해도 믿을만한 깔끔한 회색 복도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도청사가 자리를 옮긴 2022년 이전까지만 해도 사용하던 공간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구청사 방공호의 굳게 닫힌 출입문과 '제한구역. 공무 외 출입금지'라는 딱딱한 문구만 보고선 내부에 이런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물론 이처럼 일반 도민에게 생소한 미지의 공간에 입장하는 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평상시 구청사 방공호를 걸어 잠그고 있는 자물쇠가 풀리고 도민들을 맞기도 한다. 지난해엔 이곳에서 경기기회마켓이 열렸고, 올해엔 보물찾기축제 '리얼 트레저 페스티벌'의 미션장소로 활용됐다.

이런 특별한 기회를 통해 만나보지 않는다면, 지금 걷고 있는 산책길 밑 방공호의 존재를 모른채 지나치기 십상이다.

파주 임진각 방공호(지하벙커 BEAT 131) 전시관 입구를 지나자마자 대전차지뢰와 계단이 나온다.
파주 임진각 방공호(지하벙커 BEAT 131) 전시관 입구. 2024.5.3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 관광지로 탈바꿈한 파주 임진각 지하벙커


대피시설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새로운 역할을 수행 중인 방공호도 있다.

파주 임진각 방공호(지하벙커 BEAT 131)은 방공호라는 특수성을 살린 문화공간이 됐다. 임진각 방공호는 평화곤돌라·평화누리공원·기념비·독개다리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관광단지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파주 임진각 방공호(지하벙커 BEAT 131) 입구
파주 임진각 방공호(지하벙커 BEAT 131) 입구.

3일 오후 햇빛이 쨍쨍해 잠깐의 이동에도 땀이 날 정도의 날씨였지만, 임진각 방공호 주변에 다가가자마자 냉기가 돌았다.

관람 티켓의 QR코드를 찍는 곳 바로 밑 유리바닥 속 대전차지뢰를 밟은 뒤, 계단을 한 칸씩 조심스럽게 내려갈수록 마치 다른 세상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성인 기준 한 사람 정도 내려갈 수 있는 폭에, 키가 170㎝만 돼도 허리를 굽혀야 하는 높이의 계단을 내려가자니 순간 공포감도 스쳐갔다.

굽이진 계단을 내려가니 임진각 방공호 내부 전시공간에서는 전쟁 관련 유물 등을 만나볼 수 있었다.

모자·가방 등 군사용품이 전시돼 있는 '상황실' 방을 유리벽 밖에서 구경할 수 있고, 대형 스크린을 통해 DMZ 등을 소개하는 영상도 관람 가능하다.

파주 임진각 방공호 내부 2024.5.6/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파주 임진각 방공호 내부 대형 스크린.

최소한의 조명만 설치해 전체적으로 어두운 탓에 쪼그려 앉아 들여다본 한 쪽 벽면 바닥에는 탄피, 지뢰 등을 모아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출구로 나가기 전 공간엔 패드에서 원하는 색을 골라 문구를 적으면 실시간으로 스크린에 띄워 주는 이색 체험 요소도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입구와 반대편 곡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오자 사방에 뚫린 구멍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다. 정확히는 지나가는 이들의 발을 구경할 수 있다. 지하에 있다는 것이 체감되는 구조다.

출구로 나오면 곧바로 현실 복귀 가능하다. 증기기관차, 자유의 다리, 독개다리와 연결돼 관광을 이어갈 수 있다.

파주 임진각 방공호 출구
파주 임진각 방공호 출구.

■ 우리 삶과 방공호, 의미를 찾아


방공호는 공중 폭격을 차단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제작한 은폐된 장소를 말한다.

방공호는 유사시 우리 몸을 숨겨줄 대피용 군사시설이면서, 동시에 우리 일상생활과도 맞닿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반지하주택이라는 비정상적인 주거양식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방공호가 있다.

당초 주택 지하에 공간이 생긴 것은 북한의 청와대 습격으로 남북 간 긴장이 높아지던 1970년부터다. 당시 정부는 건축법 개정으로 주택 지하에 비상대피용 공간을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1970년대 중반부터는 수도권에 인구가 몰리며 본격적으로 반지하주택이 양산된다. 당시 관련 설치 규정이 완화돼 반지하주택이 주택 공급 정책으로서 활용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2022년 폭우로 발생한 반지하주택 침수 피해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며 대중에게 알려지기도 했다.

파주 임진각 방공호 내부
파주 임진각 방공호 내부.

지난해 국토교통부는 반지하주택 신축 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기후변화에 따른 도시·주택 재해대응력 강화방안'을 발표했다.

이는 반지하주택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반지하주택이라는 주거양식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반지하주택이 사라져도, 그 공간은 남아있다. 방공호가 대피시설로 쓰이지 않아도, 그 공간의 의미는 남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방공호는 우리가 일상을 보내는 우리의 바로 밑을 든든하게 받쳐줄 것이다.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역사적 공간, 방공호의 활용법을 고민해볼 시점이다.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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