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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치의 미래, 철거냐 보존이냐… 도심 속 '분단 그림자' 평화 꿈꾼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5)]

이영선
이영선 기자 zero@kyeongin.com
입력 2024-06-03 20:56 수정 2024-06-03 21:16

전차 침입 막는 용치, 고양 덕은동·파주 법원읍에도 설치

지역발전 저해·수해 유발 단점 불구 근대문화유산 가치
사진전 개최·공원 조성… 지역사회 일부로서 '공존' 모색
태양열 발전기 등 제3의 새로운 활용방안 논의 필요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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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덕양구 덕은동에 위치한 고양쌍굴(4월 30일자 5면 보도=시간 관통한 '고양 쌍굴'… '역사가 들려주는' 조용한 증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2)]) 중 하굴 입구에는 2m는 족히 넘어 보이는 콘크리트 돌덩이들이 놓여 있다.

하굴은 폐쇄된 상황에 발목 높이만큼 물이 차 있었고, 사람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이 우거진 풀숲에 뒤덮인 채 벌레들이 날고 있었다.

3일 고양시 덕은동에서 발견한 콘크리트 돌덩이는 마치 하굴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굳건했다. 돌덩이는 전쟁의 상흔 중 하나인 용치다.



용의 이빨(dragon teeth)을 닮았다고 이름이 붙여진 용치(龍齒)는 적군의 전차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접경지 하천이나 개활지, 얕은 능선에 설치된 대전차 장애물(2023년 2월 7일자 11면 보도)이다.

1968년 김신조 침투사건을 계기로 1970년대부터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50여년간 방호벽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용치는 그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덕은동에서 나고 자라 식당을 운영하는 정모(56)씨는 "어릴 적에 하굴의 기찻길과 용치에서 친구들과 놀고 데이트도 했기 때문에 추억의 장소"라면서도 "요즘은 용치 자체를 모르는 주민들도 많다"고 말했다.

접경지 하천이나 얕은 능선에 설치돼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용치도 있었다. 지난달 31일 파주시 법원읍 직천리 용치를 찾았지만 쉽사리 발견하지 못했다.

도로를 따라 대전차 장애물인 도로 낙석이 설치돼 있는데 용치는 도로 옆 비탈길 풀숲에 숨어 있었다.

직천리 용치에 가까이 가기도 쉽지 않았다. 비탈길을 내려가도 목까지 올라오는 작은 나뭇가지들과 덩굴들로 접근할 수 없었다. 대부분 용치들은 접근성이 떨어지는 우거진 수풀에 설치돼 잊히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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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덕은동 하굴과 용치. 2024.6.3 /이영선기자 zero@kyeongin.com

■ 갈등의 원인은 철거해야 vs 근대문화유산으로 재해석해야


용치는 대전차 방호벽으로서 군 작전계획 수행의 핵심 요소 중 하나로 중요성을 인정받았지만 지역 발전 요인, 미관 훼손, 수해 발생 등으로 민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난 3월 경기연구원은 '경기 북부지역 용치에 관한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경기북부 지역에 설치된 용치가 접경지역 특성상 군 작전상 필요성이 높으나 작전양상 및 작전환경에 따라 작전성 저하, 수해 유발 등 지역 발전 저해 요인이 되는 곳도 있다고 판단했다.

앞서 도심에 있는 것은 흉물스럽다는 민원으로, 하천에 있는 것은 수해의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대전차 방호벽과 함께 지속해서 철거되기도 했다.

지난 2010년부터 2019년까지 상습 하천 범람 등 재난 발생 위험으로 도내 22개 용치가 철거되거나 대체됐다. 경기연구원이 용치가 설치된 지역의 군 간부·관련 공무원·문화예술인 등 9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설문자의 47%는 지역개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용치는 필요 없고, 폐기해야 한다고 응답한 설문자도 54%에 달했다.

다만 경기연구원은 용치는 희소성과 규모 면에서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높아 군사적 목적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고 했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에서도 앞서 지난해 3월 경기도청을 시작으로 도내 4곳을 순회하며 '전쟁과 분단이 남긴 유산:용치사진전'(2023년 8월1일자 2면 보도="전쟁과 분단의 유산 기억하자" 용치 사진전 열려)을 열었다. 용치가 희소성이 있으며 분단의 상징물로 재해석돼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높다는 점을 전시를 통해 드러냈다.

용치가 도민의 삶에 녹아든 경우도 있다. 고양시는 지난해 3월 덕양구 대덕생태공원에 용치공원을 조성했다. 용치를 활용해 벤치 등 휴게 공간을 설치하고 사색쉼터, 물놀이터, 징검다리 등을 조성했다. 도로를 따라 도민들은 자전거를 타며 용치를 지나고, 용치 전망대에서 산책하는 등 용치와 삶이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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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대덕공원 내에 위치한 용치 공원. 2024.6.3 /이영선기자 zero@kyeongin.com

■ 용치의 문화재 지정은 물론, 새로운 활용 방안도 모색해야

'전쟁과 분단이 남긴 유산:용치사진전'의 촬영을 담당한 오세윤 사진작가는 용치 보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오세윤 작가는 "용치의 주된 목적은 교통로를 막아 탱크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라며 "지금은 많이 철거되고 효용 가치가 없어진 상황이라 마치 분단의 비극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도시가 개발되면서 도로가 생기고 용치가 장애물이 됐는데, 전부 다를 보존할 수는 없어도 일부라도 보존할 필요가 있다"며 "장기적으로 전쟁의 참상을 알리거나 문화유산으로 남기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을 정해서 공원화 또는 문화유산 지정 등의 조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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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법원읍 직천리 용치 인근에 설치된 도로 낙석. 2024.6.3 /이영선기자 zero@kyeongin.com

지난 2022년 '용치여지도' 사진전을 열었던 엄상빈 사진작가도 용치의 활용성을 강조했다. 그는 강원도 동해안에 위치한 용치부터 서해 교동도까지 다니며 용치의 현재를 포착했다.

엄상빈 작가는 "오래전부터 분단 작업을 하면서 3년 동안 강원도와 경기북부에 있는 용치들을 촬영했는데 용치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촬영하는 내내 방치된 것들이 안타까웠다"며 "설치된 당시에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호시설이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상황이 바뀌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용치의 문화재 보존을 넘어서 새로운 활용 방안을 제시했다. 엄 작가는 "차라리 개활지에 놓인 용치들 위에 지주대를 설치해 태양열 발전기를 설치하는 것도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며 "방치나 철거의 관점을 떠나 장기적 발전을 위해 발상을 전환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분단국가로서의 아픔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용치. 최근 북한의 도발도 이어지는 등 군사적 차원에서 존치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상황에 용치의 귀추가 주목된다. 문화재 지정이냐, 제3의 활용 방안이냐.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잊혀 가는 용치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 활용성을 논해볼 때다.

/이영선기자 zero@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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