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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건축기행·(10)] 제주목 관아·관덕정… 제주도민 혼(魂) 담긴 불멸의 유산

입력 2024-05-13 21:21 수정 2024-05-13 21:30

조선시대 통치 중심지 '제주목 관아' 세종 16년 전소

일제강점기 집중 훼철되며 관덕정 빼고 모두 사라져
탐라국 시대부터 건물 형성… 1999년 복원사업 돌입
도민들 기와 5만여장 헌와… 귤림당·망경루 등 복구
도내 最古 목조건축물 '관덕정' 보물 제322호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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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목 관아 우련당과 연못. /제주일보=고봉수기자

제주읍성은 조선시대 제주의 중심지였다. 성곽 길이는 3㎞에 이르렀고, 바다 방향을 제외하고 동문, 남문, 서문 등 3개의 문이 있었다.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은 제주읍성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관덕정은 개방적이면서 목사와 판관의 집무 영역 중간지점인 읍성의 중심부에 건립됐다. 내륙지방 정자(亭子)와 누(樓)에서 사례를 볼 수 없는 목사가 행정을 집행하는 관아의 성격을 지닌 건물이었다.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이 자리한 곳은 '선덕대(宣德臺)'라는 사대(射臺, 활을 쏠 때 서는 자리)가 있던 장소로 이전부터 광장의 기능을 갖는 곳이었다. 이러한 성격은 조선시대 군사적, 정치적, 사회적 광장으로 기능이 확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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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제주 정치·행정·문화의 중심, 제주목 관아


제주목(濟州牧) 관아는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다. 탐라국 시대부터 '성주청(星主廳)' 등 주요 관아시설이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주목 관아는 세종 16년인 1434년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진 후 바로 역사를 시작해 다음 해인 1435년 골격이 이뤄졌다. 사실상 조선시대 내내 중·개축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집중적으로 훼철(毁撤)되면서 관덕정을 빼고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이 사라졌다.

■ 일제강점기 제주읍성 해체, 그러나 광장은 남아

제주읍성이 해체되고 내부 공간 구조가 바뀌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일제강점기 신작로의 개설과 1926년 제주읍성 인근 산지항 축항공사로 해석되고 있다. 산지항 축항을 목적으로 북수구에서부터 서문과 남문 중간지점까지의 성곽을 해체하고 성돌을 공사에 사용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객사와 객사 남쪽 목사의 영역인 상아(上衙) 영역에는 학교와 경찰서 등의 관공서가 설치됐고, 남쪽 판관의 집무처인 이아(二衙)는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됐다. 읍성의 나머지 구간은 광복 이후 도시 형성과정에 훼손됐다.

도로의 개설, 성곽의 해체로 인해 광장의 물리적 장소성은 약화됐지만, 광장으로의 접근성은 강화됐다.

관덕정 광장은 제주 근현대의 도시 시민광장으로 시민항쟁과 정치, 경제, 문화 활동의 중심지가 됐다.

■ 발굴로 다시 찾은 역사의 현장


1991년 제주시는 시내 중심가의 주차난을 해소하기 위해 제주시 삼도2동 43-3번지 일대 200여 평을 지상·지하 주차장 부지로 예정하고 사업을 추진했다.

제주시는 이 지역에 대한 매장문화재를 확인하기 위해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를 실시할 수 있도록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발굴허가를 받아 1991년 9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제주목 관련 문헌조사와 현장 지표조사를 실시했다.

조사결과 조선시대의 제주도 읍치 장소인 제주목 관아 지역으로 밝혀지면서 제주시는 제주대학교 사학과에 의뢰해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전체 발굴을 통해 외대문, 중대문지를 비롯해 이를 축으로 홍화각(弘化閣), 연희각(延曦閣), 우련당(友蓮堂), 귤림당(橘林堂), 망경루(望京樓) 등의 건물터와 유구(遺構)가 확인되고 유물(遺物)도 출토됐다. 결국, 18세기 제주목 관아 건물의 전체 배치가 확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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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 내부에서 볼 수 있는 호남제일정과 탐라형승 현판. /제주일보=고봉수기자

■ 기와 5만장 헌와(獻瓦), 제주도민의 손으로 복원


발굴 당시 시굴갱 조사를 통해 조선전기층 아래로 고려시대와 탐라시대 문화층이 자리 잡고 있음이 확인됐다. 제주목 관아지 전역에 고대 탐라국 시대부터 건물이 형성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제주목 관아지는 1993년 3월 30일 국가지정 사적 제380호로 지정됐으며,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초석과 기단석 등을 토대로 '탐라순력도'와 '탐라방영총람' 등 당대의 문헌과 자료, 전문가의 고증과 자문을 거친 후 1999년 9월부터 복원사업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은 복원사업에 들어가는 기와 5만여 장 전량(全量)을 헌와(獻瓦)했다.

민관(民官)의 합심으로 제주목 관아는 2002년 12월에 1단계 복원 사업으로 제주목사의 집무실이었던 '홍화각'을 비롯해 집정실인 '연희각', 연회장으로 쓰였던 '우연당'과 '귤림당' 등의 관청 건물과 부대 시설이 복원됐으며, 2단계 복원 사업을 통해 2006년 2월 조선시대 20개의 목 가운데 제주목에만 유일하게 있었던 2층 누각인 '망경루'의 복원이 완료됐다.

■ 병사들의 훈련장 '관덕정'


"이 정(亭)을 만든 것은 놀이나 관광이 아니라 본래 설치함이 무열(武閱)을 위한 것이다."

관덕정은 세종 30년인 1448년 안무사(安撫使) 신숙청(辛淑晴)이 창건한 후 1480년(성종 11)에 목사 양찬에 의해서 중수됐다.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운 정자다.

관덕정은 이후 1599년(명종 14), 1690년(숙종 16), 1753년(영종 29), 1779년(정조 2), 1833년(순조 33), 1851(철종 2), 1882년(고종 19) 보수되는 등 총 7차례에 걸쳐 중수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일본인 마에다 요시지(島司 前田善次)가 도로를 내기 위해 보수하면서 15척(454.5㎝)이나 되는 곡선의 처마를 2척이나 줄이면서 가치를 훼손시켰으며, 1969년 10번째 중수에서는 대대적으로 해체해 새로 보수하고 주위에 문을 달아 흰 페인트칠을 하면서 관덕정의 위용은 사라져 버렸다.

관덕정은 해방 후 1948년 9월 제주도의 임시도청으로, 1952년에는 제주도의회 의사당으로, 북제주군청의 임시청사로, 그리고 1956년에는 미공보원 상설 문화원으로 사용되는 등 역사 속에서 자리매김했다. 관덕정은 제주도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22호로 지정됐다.

관덕정 내부에는 '관덕정'과 '탐라형승', '호남제일정'의 현판이 걸려 있다. 관덕정의 편액(扁額)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필치였으나 화재로 손실됐고, 현존하는 편액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가 쓴 것이다. '호남제일정'은 1882년(고종 19) 방어사 박선양(朴善楊)이 중수하면서 쓴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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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목 관아 귤림당. /제주일보=고봉수기자

■ 도심 속 조선, 열린 문화공간으로 도약하다


최근 제주목 관아 일원에서는 한복을 입은 관광객의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보다 친숙한 문화공간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5월부터는 야간개장에 돌입했다.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는 제주목 관아의 역사 문화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리고, 야간관광 분위기 조성으로 원도심 활성화를 유도하기 위해 지난 1일부터 오는 10월까지 6개월간 제주목 관아 야간개장 '귤림야행'을 실시하고 있다.

야간개장 시간은 월·화요일을 제외하고 오후 6시부터 오후 9시30분까지다. 오후 6시부터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귤림야행'은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 일원에서 열리며, 야경산책, 야간공연, 버스킹, 수문장 교대의식, 자치경찰 기마대 거리행진, 체험 등을 총망라한 전통문화 복합행사로 마련된다.

/제주일보=김형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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