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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에 그늘진 창작윤리

유혜연
유혜연 기자 pi@kyeongin.com
입력 2024-06-27 19:05 수정 2024-06-27 19:19

비교적 자유롭던 소설 시대따라 의문부호
정지돈, 연인 사생활 미동의 차용 논란
과거 김봉곤은 절판 조치·문학상 반납
새 논거 토대 논증에 충실한 평론 필요


브레이브 뉴 휴면
(책 왼쪽) 정지돈 2019년 作 '야간 경비원의 일기'. 2024년 作 '브레이브 뉴 휴먼'. /현대문학·은행나무 제공

정지돈 작가
이야기와 글을 다루는 일 중 비교적 윤리문제에서 자유로웠던 직업은 소설가다. 오랜 기간 대중과 평단은 소설을 쓰는 창작자의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를 존중해줬다.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진실을 추구하는 문학의 예술성을 응당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기존의 가치만으로는 새로운 현상을 받아들이거나, 설명하기 힘든 문제가 생겨나면서 의문부호가 뒤따르기 시작했다.

최근 정지돈(사진) 작가가 연인 관계였던 여성의 사생활을 동의 없이 자신의 소설에 차용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창작 윤리' 문제가 문단 내 화두로 떠올랐다.

독서 유튜버 등으로 활동하는 김현지씨는 지난 23일 자신의 블로그에 '김현지, 김현지 되기'라는 입장문을 올렸다.



그는 "저는 이 글(정지돈作 '브레이브 뉴 휴먼')을 읽자마자 권정현지의 이야기가 그와 사귀는 동안 제가 말한 저의 이야기임을 알았습니다. 이름이 현지일뿐더러, 제 가족사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운을 떼며 정지돈 작가의 소설 '야간 경비원의 일기'와 '브레이브 뉴 휴먼'의 윤리적 문제를 꼬집었다.

이후 지난 25일 정지돈 작가도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김현지씨에게 사과하는 한편, 출판사에 '야간 경비원의 일기'의 판매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의혹에 대해서는 "몇몇 모티프만으로 개인의 삶이 도용됐으며, 소설 속 인물이 실제 인물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김현지씨는 정지돈 작가와 자신의 입장문을 "꼼꼼히 비교해서 읽어보라"는 동시에, 논의 확장의 필요성을 공론의 장에 던졌다.

사생활을 당사자 허락 없이 소설에 담았다는 주장은 이전에도 문단에 등장한 바 있다. 지난 2020년 김봉곤 작가는 지인과 사적으로 나눈 대화를 단편 소설집에 무단으로 인용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이후 책은 절판 조치에 들어갔고, 김봉곤 작가는 해당 작품으로 받은 문학상을 반납하기도 했다.

당시 문제 제기 이후 절판이라는 물리적인 제재가 이뤄졌지만, 소설가의 창작 윤리와 사생활 침해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 등 깊은 논의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표현의 자유'와 '캔슬컬처(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한 인물의 SNS를 팔로우 취소하는 등 보이콧을 자행하는 문화 현상)'의 충돌이라는 기존 해석으로만 다뤘을 뿐이었다. 이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창작물에 대해 대중이 거부감을 표출하면서, 작가와 출판사가 압박을 느끼고 과도하게 자기 검열을 하고 마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복잡한 현상을 대립하는 두 가지 가치로 치환해, 창작자의 권한을 옹호하는 주장을 쉽게 일관된 논지로 풀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사생활 도용과 문학적 재현의 미묘한 차이 등 여러 층위가 존재하는 창작 윤리에 적용하기에는 논거가 부족하다. 다층적인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단순화하는 탓이다.

결국 복잡다단한 문제를 설명할 새로운 근거와 이를 기반으로 한 충실한 논증이 필요한 시점이다. 소설가의 창작 윤리에 대한 서로 다른 의문을 축소해 '문학을 절멸시키는 행위'라거나 '출판사에서 책을 절판시켜야 한다'는 주장만으로는 담론을 확장하기 어렵다.

김현지씨도 최근의 입장문을 통해 "평론가분들 문학관계자분들은 다 어디 가셨을까요"라며 "정지돈씨도 저도 공론장에 서있고 각자의 입장을 밝히며 창작 윤리와 사생활 도용의 충돌, 차용 인물에 관한 재현 윤리, 아카이브 작업의 링크 실패 등에 관한 이야기의 땔감이 될 각오를 마쳤다"고 재차 강조했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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