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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개발에 '허물어진 역사(歷史)'… '만세운동 주춧돌' 기억을 세우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9)]

이영선·이영지
이영선·이영지 기자 zero@kyeongin.com
입력 2024-07-29 20:36 수정 2024-10-17 14:26

광복 - 집터로 보는 독립유공자


파주 3·1운동 주도 심상각 선생
집터 소실… 안내판·표창장 남아
수원 김세환·이선경 선생도 비슷
道, 유적지 실태조사·보존 노력
다른 방식이라도 기억할 곳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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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 파주 군민은 봉일천 장으로!"

1919년 3월 28일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대규모 시위는 파주시의 대표적인 3·1운동으로 꼽힌다. 3월 10일 와석면 교하리 공립보통학교의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27일 청석면 만세 운동이 이어져 28일 봉일천 장날 만세운동이 촉발됐다.

봉일천 장날 만세 시위대는 봉일천 시장으로 향하면서 3천여명으로 규모가 불어났다. 봉일천 만세운동은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 등 일제 통치 기관을 공격하면서 가장 격렬한 시위로 기억에 남았다. 만세 시위대는 광탄면사무소 앞에 집결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봉일천 시장으로 행진해 군중과 합세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봉일천 장날 만세 운동의 중심엔 우산 심상각 선생이 있었다. 시위는 심상각 선생이 기획했으며 김웅권, 권중환, 심의봉 등 19명이 주축이 됐다. 그들의 회의 장소는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 58-1번지. 심상각 선생이 살던 집이었다. 심상각 선생의 집에서 시위 주축 19명은 동지회를 조직하고 시위 시기, 작전 등을 수립하고 일본의 감시를 피하면서 파주 주민들에게 전달했다.

지난 26일 파주에서 만난 심상각 선생의 손자 심재만(82)씨는 "경찰 때문에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만세 시위를 기획했다고 들었다"며 "조부님이 시위를 이끌면서 사람들이 집으로 모여 회의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심재만씨는 봉일천 만세시위가 파주 탄현면, 적성면, 법원읍 등 지역 곳곳의 대표들이 모여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주민들의 대다수인 농민들도 참여해 주축을 이룬 점을 강조했다.

심상각 선생은 만세 시위를 벌이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고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후 귀국해 파주시 광탄면에 광탄보통학교를 설립, 후학 양성에 힘썼다. 박정희 정부는 심상각 선생에 지난 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고 노태우 정부도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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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광탄면에 위치한 심상각 선생 집터에 설치된 안내판. 2024.7.26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 파주 만세 운동의 주춧돌, 심상각 선생 집터


파주 광탄면을 찾았다. 파주 만세운동의 싹이 트였던 심상각 선생의 집은 6·25 전쟁의 폭격을 맞고 소실된 상태였다. 집의 형태는 없어졌지만 가치는 남아있다.

잡초가 우거진 집터 앞에는 심상각 선생의 집터임을 알려주는 안내판과 표창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봉일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심상각 선생의 집터인 만큼 당시 만세운동 현장의 사진도 벽면에 크게 붙어있다.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1919년 3·1 운동에 맞춰 민족 대표 33인이 발표한 독립선언서의 첫 문장이 만세 운동 사진 모서리에 작성돼 있다. 독립을 열망했던 뜨거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듯 태극기도 옆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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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광탄면에 위치한 심상각 선생 집터. 2024.7.26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를 공격했던 봉일천 만세시위로 빚어진 10여명의 숭고한 희생도 기억하게 된다.

3월과 8월쯤이면 파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학생들은 광탄면을 찾는다. 심상각 선생의 집터를 보기 위해서다. 이들은 고양, 양주 등 주변 지역에서 가장 활발했던 3·1 운동을 주도한 심상각 선생의 뜻을 기린다. 주민들을 모아 나라를 지키려 나섰던 선조의 애국심을 100년이 더 지난 순간에도 후손이 본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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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 팔달구에 위치한 김세환 선생의 집터 안내판. 2024.7.26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 도시개발에 사라진 집터, 보존의 의미는

심상각 선생의 집터처럼 독립을 외쳤던 순간을 기억하고 기리는 공간이 있는 반면, 도시개발로 인해 건물이 들어서면서 터조차 없는 곳도 다수다. 일부 독립 유공자의 집은 빈집으로 방치된 곳도 있다.

민족대표 48명 중 한명인 수원 출생의 김세환 선생은 수원과 충청 일대의 3·1 운동을 기획하고 준비하는데 주도했다. 신간회 수원지회 지회장, 수원체육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수원 지역 민족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활동했다.

그의 집터인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792는 팔달문 인근으로 왕복 4차선 도로가 들어섰고 상가들이 즐비하다. 상가 건물 앞에 김세환 선생의 집터라는 표지판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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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 팔달구에 위치한 김세환 선생의 집터 안내판이 설치된 곳에 건물이 들어서 있다. 2024.7.26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수원의 유관순이라 불리는 이선경 선생의 집터도 빌딩이 들어섰다. 학생이었던 이선경 선생은 3·1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구국민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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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들어선 이선경 선생 집터. 2024.7.26 /이영지기자 bbangzi@kyeongin.com

화성의 이순모 선생 생가는 빈집으로 방치되고 있다. 이 밖에도 상당수 독립운동가의 가옥과 집터는 대부분 멸실된 채 흔적을 찾기 어렵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3·1 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들은 공간의 유무에 따라 기억하기도, 잊히기도 한다. 더욱이 개발로 인해 공간이 사라진 것은 미래를 위해 과거가 지워진 안타까운 현실이다.

경기도는 지난 2016년부터 항일유적 실태조사와 현장조사를 실시해 2018년부터 항일 유적 안내판을 설치했다. 도는 257개의 항일 유적지를 확인해 그중 17곳의 집터에 안내판을 설치했다.

집의 형태로 남아있지 않는 한 집터는 숨겨진 채로 잊힌다. 안내판이 없으면 존재조차 모르기 일쑤다.

개발로 인해 공간이 사라진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기억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100여년 전에 우리의 선조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외쳤던 독립의 목소리,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영선·이영지기자 zero@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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