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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아임 프롬 인천·(32)] 소래포구서 자란 사자, 농구 코트를 휘젓다… ‘라이온킹’ 오세근

박경호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입력 2024-08-07 13:29 수정 2024-10-30 14:46

부모님 가게 차린 소래포구에서 보낸 유년기

길거리 농구 푹 빠진 소년, 중학 농구부 입단

1998년 창단 제물포고 농구부 첫 우승 이끌어

 

고교랭킹 1위, 대학시절부터 태극마크 달아

프로 데뷔 때 ‘플레이오프 MVP’로 왕좌 등극

2014 인천아시안게임 국가대표 나서 ‘금메달’

“내가 자란 인천에서 금메달 달성해 큰 영광”

부침겪던 지난시즌… 우승후보 부담 내려놔

한국 프로스포츠에서 ‘라이온 킹’이란 칭호는 종목마다 단 한 명의 선수에게만 부여됐다. 야구 이승엽, 축구 이동국, 그리고 농구에서는 인천 출신 국보급 센터 오세근(서울 SK 나이츠)이 있다.

2011년 한국프로농구(KBL) 신인 드래프트에서 안양 KGC 인삼공사 유니폼을 입은 ‘갈색 사자머리’의 오세근은 입단 첫해부터 골대 밑을 지배하며 ‘왕좌’(2011~2012 시즌 챔피언 결정전 MVP)에 올랐다. 4차례의 KBL 우승, 3차례의 챔피언 결정전 MVP, 정규 시즌 MVP를 차지하며 오세근의 시대를 이어갔다. 국가대표 농구팀 센터로 출전한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과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각각 은메달과 금메달을 따낼 때 큰 힘을 보탰다.

지난달 16일 오후 경기도 용인에 있는 서울 SK 나이츠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라이온 킹’ 오세근. 2024.7.16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지난달 16일 오후 경기도 용인에 있는 서울 SK 나이츠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라이온 킹’ 오세근. 2024.7.16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완숙기에 접어든 오세근은 12년 동안 몸담았던 안양 KGC에서 지난해 서울 SK로 이적해 한 시즌을 치르며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KBL ‘라이온 킹’은 아직 권좌를 내려놓지 않았다.

지난달 16일 경기도 용인에 있는 서울 SK 나이츠 클럽하우스 체육관에서 2024~2025 시즌 준비에 한창인 오세근을 만났다. 지난 시즌이 아쉬웠다는 그는 “열심히 몸을 만들고 있다”며 “올 시즌은 분명히 코트에서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어린 사자가 뛰놀던 곳은 대초원이 아니라 서해의 포구다. 부모님은 충북 청주에서 오세근을 낳자마자 인천으로 이주했고, 소래포구에서 회와 각종 해산물을 파는 가게 겸 식당을 30년 넘게 운영하다 접었다. 오세근의 조부모가 먼저 소래포구에서 장사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그 가게가 집이자 놀이터였다. 예나 지금이나 소래포구는 관광객으로 붐비는 어시장이기도 하지만, 오세근이 어린 시절을 보낸 1990~2000년대 초반은 소래논현지구 도시개발사업으로 대규모 아파트 단지(약 1만2천가구)가 들어서기 전이라 지금보다는 더 어촌다운 풍경이었다.

“지금은 소래포구 주변 환경이 워낙 많이 변해서 어릴 때 모습은 거의 없다시피 하네요. 예전엔 시장 같은 느낌이 더 컸고요. 배가 들어오면 그물째로 해산물을 옮기는 모습도 신기했습니다. 그땐 갯벌에도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프로 선수가 돼서도 가끔 부모님 가게에 들러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게 일을 도와줬어요.”

오세근이 어린 시절 보았을 1998년 12월27일 관광객이 몰린 소래포구 풍경. /경인일보 DB

오세근이 어린 시절 보았을 1998년 12월27일 관광객이 몰린 소래포구 풍경. /경인일보 DB

강제윤 시인이 2010년 펴낸 인천문화재단 문화의길 총서 1권 ‘바다의 노스탤지어 파시’를 보면, 소래포구는 협궤열차로 수원~인천을 오갔던 옛 수인선 철도(1937~1995년 운행)가 건설되면서 생겨났다. 일제는 주안, 남동, 소래, 군자 일대 대규모 천일염전에서 생산하는 소금과 여주·이천 곡창지대의 쌀을 인천항으로 반출하고자 1935년부터 수인선 건설에 나섰다. 철도 건설 노동자와 염전에서 일하는 염부들을 태운 나룻배가 소래포구로 드나들었다. 더러는 소래포구에 정착해 작게나마 어업 활동을 시작했다.

소래포구를 키운 건 실향민을 비롯한 이주민들이다. 1960년대 초 인근 섬 지역과 인천 연안부두 등지에서 황해도 출신 실향민들이 새우잡이를 위해 소래포구로 모여들었다. 어민들은 1962년 2월 소래어촌계를 결성했다. 1970년대 초에는 어선들이 어획물을 하역할 수 있는 물양장도 조성됐다. 1982년 인천항에 소형 어선의 출입이 금지되면서 어선들이 소래포구로 대거 몰렸다. 시흥시사편찬위원회가 2007년 발간한 ‘시흥시사’에 따르면 1976년 80가구 320명에 불과했던 소래포구 일대 인구는 1986년 500가구 2천명으로 늘었다.

횟집도 번성했다. 정부는 1983년 무허가 횟집을 양성화했는데, 이때 소래포구 주민 32명이 허가를 얻었다. 1984년 11월 한 달 동안 소래포구를 찾은 관광객은 18만명을 넘었고, 관광버스가 하루 100대씩 오갔다. 실향의 아픔을 다룬 이원규 작가의 단편소설 ‘포구의 황혼’(1987년 발표)은 당시 소래포구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경인 산업도로로 이어지는 관통 도로가 뚫리자, 소래포구 종점 거리에는 수십 개의 횟집이 들어섰다. 주말은 물론 평일 저녁에도 자가용을 가진 도회 사람들이 싱싱한 생선회를 먹으러 찾아왔다. 김장철에는 물 좋은 새우를 사려고 사람들이 몰려와 경쟁을 벌였다.’ (이원규 ‘포구의 황혼’ 중에서)

오세근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기도 전에 키 170㎝를 넘겼다. 종종 함께 농구를 했던 담임 선생님과 키가 비슷했다고 한다. 소래포구 동네에서도 중학생 형들보다 큰 키로 유명했다. 조용한 성격이라서 튀는 학생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잠시 볼링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고, 농구와 축구 가릴 것 없이 운동이라면 다 좋았다.

중학생이 돼서도 운동부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운동을 취미로 아주 열심히 즐겼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길거리 농구에 푹 빠졌다고 한다. 오세근이 미추홀구 주안동에 살면서 동인천중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집 근처 인천고등학교 농구 코트가 그의 주무대였다. 1997년 KBL 출범과 일본 농구 만화 ‘슬램덩크’ 신드롬에 힘입어 청소년들 사이에서 길거리 농구가 큰 인기를 끌었다. 인천에서도 지자체, 사회단체 등이 각종 청소년 길거리 농구대회를 개최했다. 신세계백화점 인천점(현 롯데백화점 인천점 자리)은 1999년 3월부터 매주 일요일마다 길거리 농구대회를 열기도 했다.

“키만 조금 컸지, 길거리 농구를 평정할 실력까진 아니었어요. 그저 친구들과 즐겁게 농구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길거리 농구를 하는 다른 학교 친구들도 많이 알아서 연습 경기도 정말 많이 했고요. 대회도 여러 번 나갔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송도중학교에서 개최한 길거리 농구대회에 출전했는데, 주최 측에서 저를 잘 봤는지, 저에 대한 얘기가 농구부가 있는 계양구 안남중학교 코치님한테까지 들어갔다고 합니다. 코치님이 동인천중까지 찾아와 스카우트 제의를 했어요.”

SK 서울 나이츠 센터 오세근이 중학생 시절 길거리 농구 대회에 출전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2024.7.16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SK 서울 나이츠 센터 오세근이 중학생 시절 길거리 농구 대회에 출전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2024.7.16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오세근은 중학교 3학년 때 키가 190㎝에 달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농구 선수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아버지도 어렸을 때 운동선수 생활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운동부 활동이 얼마나 힘들지 알기에 아들을 고생시키기 싫었다고 한다. 다른 선수들보다 비교적 늦게 운동을 시작하는 것도 걱정이었다. 오세근은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아 아버지를 계속 설득했고, 결국 승낙을 받았다. 이때 아버지와 아들은 두 가지를 약속했다. ‘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겠다.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라는 약속이다.

오세근은 2002년 여름 안남중학교로 전학해 농구부에 입단했다. 운동을 일찍 시작한 선수들보다 체력과 기본기 모두 부족했다. 대회에서는 8강에 오르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아쉬운 성적이었다. 오세근은 더 좋은 선수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고, 학교 코치와 부모님과 상의한 끝에 유급을 결정했다. 그리고 학교 인근에 사는 농구부 동기의 집에 머물면서 1년 더 연장한 중학교 생활을 오로지 운동으로 채웠다.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그 덕에 탄탄한 기본기를 갖출 수 있었다.

오세근은 2004년 제물포고등학교로 입학해 농구부에 입단했다. 인천에서는 송도고등학교 농구부의 역사가 더 깊었고, 서울의 다른 고등학교에서도 입학 제의가 있었으나, 오세근은 “안남중 동기 6명과 함께 운동하고 싶어서” 제물포고를 택했다.

제물포고 농구부는 송도고에 이어 인천에서 두 번째로 창단한 고교 농구부다. 1998년 5월7일 창단했다. 경인일보 1998년 5월7일자 신문에 실린 ‘港都(항도) 바스켓 새요람 선언’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면 창단 선수는 10명, KBL 광주 나산 플라망스 트레이너직을 맡았던 김태일 코치로 팀을 꾸렸다. 오세근의 모교인 안남중과 효성중 선수들을 영입했다. 제물포고 출신으로 연세대 농구부와 한국은행 실업팀, 국가대표에서 주전 센터로 활약했던 최종규 당시 KBL 대우 제우스 감독을 중심으로 제물포고 동창과 조기농구회 ‘농우회’가 1997년 10월 후원회를 조직해 농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제물포고 농구후원회가 농구부 창단을 위해 모은 기금은 3천만원이었다.

제물포고 농구부가 초창기 기반을 닦는 데에는 1997년 인천을 연고지로 창단한 프로농구단 대우 제우스가 많은 도움을 줬다. 제물포고 농구부 창단식에도 대우 제우스 오기택 단장, 최종규 감독, 훗날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는 유재학 코치, 선수들이 참석했다. 제물포고와 대우 제우스의 친선 경기도 개최했다. 대우 제우스는 ‘IMF(국제통화기금) 사태’ 여파로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그해 신세기통신으로 넘어가 신세기 빅스(SK 빅스), 2003년 전자랜드 엘리펀츠(블랙슬래머)로 이어졌다. 2021년 한국가스공사가 전자랜드 엘리펀츠를 인수해 연고지를 대구로 옮기면서 인천 프로농구단의 명맥이 끊겼다.

경인일보 1998년 5월7일자 신문에 실린 제물포고등학교 농구부 창단 관련 기사.

경인일보 1998년 5월7일자 신문에 실린 제물포고등학교 농구부 창단 관련 기사.

신생 제물포고 농구부는 고교 농구계의 ‘다크호스’로 떠올랐으나, 첫 우승은 오세근이 3학년 재학 중이던 2006년 8월24일 제1회 고려대총장배대회(옛 쌍룡기)에서 이뤄냈다. 키 2m에 육박한 ‘빅맨’ 오세근이 주목받기 시작한 때다.

“고등학교 1·2학년 때는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던 것 같아요. 2학년에서 3학년으로 넘어갈 때 동계훈련을 열심히 하면서 실력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 시기 김영래 코치님이 새로 부임하고, 좋은 후배들이 들어오면서 농구부가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이듬해 창단 첫 우승까지 달성했어요. 당시 제물포고 농구부는 신생 팀인지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운동했던 것 같아요. 인근 자유공원 산책로와 계단을 엄청 뛰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합니다.”

2006년 부임해 현재까지 제물포고 농구부를 이끌고 있는 김영래 코치는 고교 시절 오세근에 대해 “보자마자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영래 코치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세근이는 농구에 대한 센스와 기본기가 워낙 좋은 선수였습니다. 신장에 비해 스피드가 빠르고 체격 조건도 좋았죠. 가장 큰 장점은 성실함과 농구에 대한 집중도였습니다. 당시 전국 고교에선 두각을 나타낸 장신 센터가 4명 정도 있었는데, 제가 보기에 오세근은 네 번째 정도였습니다. 다른 선수들보다 농구를 늦게 시작한 탓도 있었죠. 서울의 한 고등학교와 시합을 하는데, 세근이가 전국 최정상급 센터와 맞붙었어요. ‘시합에서 져도 좋으니 저 선수를 철저히 맨투맨으로 막고 40점을 득점하라’고 세근이에게 주문했죠. 정말로 그 경기에서 상대 선수보다 득점과 리바운드를 두 배 이상 해냈어요. 그때부터 오세근은 랭킹 1위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 것 같아요.”

2007년 중앙대 농구부로 진학한 오세근은 현재 서울 SK 동료이기도 한 가드 김선형과 함께 대학리그에서 파죽지세로 52연승이란 진기록을 세웠다.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2010년 대학리그에선 상명대와 맞붙어 14점, 18 리바운드, 13 어시스트, 10 블록으로 한국 농구 역사상 첫 ‘쿼드러플 더블’을 달성했다. 오세근은 이미 대학생 때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대표로 뛰었다.

2011년 프로 데뷔 무대에서도 안양 KGC의 정규리그 2위에 이은 창단 첫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이끌며 ‘신인왕’에 등극했다. 그동안 너무 쉬지 않고 질주한 탓이었을까. 발목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으로 이듬해 2012~2013 시즌은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고 재활에 집중해야 했다. 2016~2017 시즌에는 팀의 정규리그 우승과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만들었고, 정규리그 MVP와 챔피언 결정전 MVP까지 휩쓸었다. 오세근은 안양 KGC 시절에 대해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선수 생활이었다”고 말했다. 팬들이 붙여 준 또 다른 별명 ‘건세근’은 ‘건강한 오세근은 아무도 못 막는다’는 뜻으로, 아쉬움의 표현이기도 했다.

“정상에 올랐다가 바닥을 찍기도 하고, 그런 상황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안양에서 좋은 기억이 더 많아요. 국제대회도 많이 나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아무래도 제가 자란 곳에서 열린 2014 인천아시안게임입니다. 인천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어 큰 영광이었고, 저의 자부심입니다.”

KBL 2024~2025 시즌 준비에 한창인 오세근이 지난달 16일 경기도 용인 서울 SK 나이츠 클럽하우스 체육관에서 슈팅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4.7.16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KBL 2024~2025 시즌 준비에 한창인 오세근이 지난달 16일 경기도 용인 서울 SK 나이츠 클럽하우스 체육관에서 슈팅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4.7.16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오세근은 큰 경기에서 더욱 강해진다. 큰 경기를 앞두고는 농구 코트뿐 아니라 일상까지도 경기에 맞춰 집중력을 쏟아붓는다고 한다. 사춘기를 겪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다소 내성적이면서 무난한 성격이 오세근의 집중력을 만드는 동력 중 하나인 듯했다. 그러한 측면에서 서울 SK에서의 첫 시즌(2023~2024)은 조금 아쉬웠다고 했다.

“지난 시즌에 대해 핑계를 대고 싶진 않지만, 세 시즌 연속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해 몸 관리할 시간도 부족했고, 팀 이적과 함께 아킬레스건 시술도 받으면서 운동할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시즌은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습니다. 팀 동료들과의 호흡도 더 좋아질 거고요. 지난 시즌 때 팀이 6강 플레이오프에 들긴 했지만, 팬들은 조금 아쉬워했어요. 외부에서 올해 시즌 서울 SK는 우승 후보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하니까 오히려 더 편하게 새 시즌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언더도그’가 한 번 돼 봐야죠. (웃음)”

그는 세 남매의 아빠다. 가정적인 선수로도 유명하다. 그 모습은 오세근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라이온 킹의 인생 목표가 의외다. “그냥 무탈하게 사는 게 가장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소소한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추구합니다.”

‘농구는 재능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오세근은 “99% 노력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약력
1987년 충북 청주 출생
2000년 인천영화초등학교 졸업
2004년 인천안남중학교 졸업
2007년 제물포고등학교 졸업
2011년 중앙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졸업
2011~2023년 안양 KGC 인삼공사 선수
2014년 상무 농구단 선수
2023년~ 서울 SK 나이츠 선수

■주요 수상
KBL 2011~2012 시즌 신인 선수상, 플레이오프 MVP(신인 최초)
KBL 2016~2017 시즌 MVP, 올스타전 MVP, 플레이오프 MVP
KBL 2022~2023 시즌 플레이오프 MVP

■국가대표 주요 경력
2008년 베이징올림픽 최종 예선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은메달
2012년 런던올림픽 최종 예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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