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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한국 그림책 연구 대가' 신명호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 교수

강기정
강기정 기자 kanggj@kyeongin.com
입력 2024-09-24 21:09 수정 2024-09-24 21:22

"단순해보여도 어린이 성장 교과서… 글·그림의 조화 잃지말길"


韓유리천장에 日대학원 새길 개척… 귀중서 접하며 심도있는 공부 '전환점'
출판사 '시공사' 고문·파주 '네버랜드 픽처북 뮤지엄' 등 저변 확장에 애써
군포 '그림책꿈마루' 1周 관여…"이곳서 '한국 원화' 순회전 마무리 하고파"


공감인터뷰) 그림책 연구자 신명호교수
군포 '그림책꿈마루' 개관 1주년 특별전을 위해 한국을 찾은 신명호 교수가 지난 5일 그림책꿈마루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그림책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며 내실을 키워야 하는 게 한국 그림책 시장의 상황"이라고 발언하고 있는 신 교수의 모습.

그림책은 통상 아이들이 읽는 책 정도로 여겨진다. 비교적 가볍게 치부됐던 그림책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은 1994년 책 '그림책의 세계'가 출간된 게 영향이 컸다. 그림책의 발전사와 좋은 그림책의 개념 등을 망라한 책으로, 그림책을 학문적으로 접근해 풀어낸 국내 도서는 사실상 처음이었다.

해당 책은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강연 중인 신명호 교수가 유학 시절 자신의 석사 논문을 토대로 써낸 책이다. 논문을 기반으로 국내 상황에 맞게 설명을 덧붙였다. 이전엔 그림책의 개념이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분석한 연구 자료가 마땅히 없었던 터라, 신 교수의 책은 그림책을 알고 싶고, 펴내고 싶어하는 많은 이들에게 훌륭한 교본이 됐다.

'그림책의 세계'가 출간된 지 꼭 30년이 된 지금, 신 교수는 한·일 양국에서 그림책을 연구하고 알리는데 분주하다. 전국 유일 그림책 복합문화공간인 군포 '그림책꿈마루'가 개관 1주년을 맞이한 때, 신 교수를 그림책꿈마루에서 만났다.



그림책의 매력을 '커뮤니케이션'으로 꼽은 신 교수는 각종 예술이 그림책을 만들고 읽는 행위에 집약된다고 말한다. 빠르게 성장해 온 한국 그림책 시장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지적했다.

■국내에 처음으로 펼쳐낸 '그림책의 세계'

신 교수가 그림책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1985년 무렵 덕성여대 재학시절이었다. 미술학도였을 때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로 유명한 이원복 덕성여대 교수가 유럽에서 가져온 그림책들, 일러스트들을 보게 된 게 계기가 됐다.

대학 졸업 후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게 됐지만 여성의 사회 활동이 지금처럼 쉽지 않았던 시기였던 만큼 유리천장을 절감했다.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일본으로 향했다. 한국보다 그림책 산업이 앞서있던 일본, 그것도 일본 내에서 그림책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던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은 게 전환점이 됐다.

신 교수는 "무사시노 미술대학은 당시 외국인 유학생이 매우 드물었어서, 학교 측이 한국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내용들을 모두 수강할 수 있게 배려해줬다. 도서관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귀중서도 직접 손으로 펼치며 볼 수 있게 해준 덕분에, 외부인이 절대로 만질 수 없던 책들을 보며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쌓은 지식을 논문으로 정리했다. 그림책 자체가 연구가 많이 이뤄졌던 분야가 아니라, 논문을 쓸 때 참고가 되는 이렇다 할 논문도 없었다"며 "논문을 낸 후 한국 그림책이 '없다시피 하다'는 데 문제 의식이 생겼다. 그래서 논문으로 정리했던, 1680년대부터 1910년대에 만들어진 세계의 그림책을 소개하는 전시를 처음으로 열었다. 당시 서울 남산 쪽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이 서초구로 이전했는데, 새로 문을 여는 것을 기념하는 전시회격으로 진행했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선 그림책에 대한 인지도나 관심이 낮을 때였어서 관람객 자체가 많진 않았지만, 그 와중에도 이억배 작가나 정승각 작가 등이 전시를 봤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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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신 교수는 국내 그림책 산업 성장기 곳곳에 발자취를 남겼다. 출판사 '시공사'에서 본격적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책을 펴낼 때 고문을 맡아 각 책마다 어떤 의미가 있는 책인지, 어린이가 왜 읽어야 하는 책인지 등을 일일이 적어 삽지로 넣었다. 그림책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2000년대에 들어선 그림책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미술관 등이 하나둘 생겨났다.

가장 처음 조성된 공간은 파주 '네버랜드 픽처북 뮤지엄'이다. 건물 설계부터 초창기 전시 기획까지 모두 신 교수의 손을 거쳤다. 원로 그림책 작가인 홍성찬 작가의 원화전을 열어 한국에도 내로라하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있음을 각인시키는가 하면, 국내에선 처음으로 세계적인 어린이 도서전인 '볼로냐 도서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의 원화를 전시하며 그림책의 저변을 넓히는 데 애썼다.

■한국 그림책 시장, 내실 키워야 할 때…그림책꿈마루, 소프트웨어 잘 갖췄으면

신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그림책들을 각각 일본어와 한국어로 번역해 양국에 소개하는 일도 여러 번 했다. 지난해만 해도 이시카와 에리코의 '책방 고양이', 곤도 구미코의 '슬픔의 모험' 등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그 스스로도 그림책 출판 작업에 참여하다보니 그림책에 대한 고찰이 더욱 깊어진다고 했다.

신 교수는 "그림책의 주 독자는 어린이다. 또 글과 그림이 각각 뛰어나면서도 조화를 이뤄야 하는 복합 예술이다. 독자의 속성을 고려하면, 어린이들이 성장하는 시기에 접하는 책이라 그림책에서 배운 내용이 오래 각인될 가능성이 커서 프로파간다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단순히 그림만 멋진 그림책, 작가의 메시지만 일방적으로 담긴 그림책이 과연 어린이들에게도 좋은 그림책일지는 의문"이라며 "한국의 그림책 시장은 매우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이런 오류에 빠진 작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비주얼은 뛰어난데 이야기와 그림이 조화되지 않아 해외 시장에선 외면받는 작품들도 있다. 독자를 잃어버린 그림책들이 적지 않다. 외적으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그림책은 무엇인지, 어때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하며 내실을 키워야 하는 게 현재 한국 그림책 시장의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런 의미에서 군포 '그림책꿈마루'가 "그림책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장소가 됐으면 한다"는 게 신 교수의 바람이다. 그간 그림책을 주제로 한 다수의 공간, 전시를 설계하고 기획해 온 신 교수는 그림책꿈마루 개관 전부터 깊이 관여해왔다.

개관 1주년 기념 특별전 '그림책, 문학과 예술의 하모니-안데르센 인어공주전'의 총괄 기획도 신 교수가 맡았다.

이에 대해 그는 "기존 문학에 삽화가 더해지면서 예술로 거듭난 그림책의 매력을 안데르센의 '인어공주'가 가장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여겼다. 안데르센이 완전한 문학인 '인어공주'를 썼다면, 이후의 인어공주는 시각적 이미지가 더해진 그림책으로 거듭나며 하나의 '예술'로 뻗어나갔다. 이번 전시는 그런 '인어공주'를 소개함으로써 문학, 예술, 그림책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의미가 있다. 그림책꿈마루의 정체성인 물과의 연관성을 잘 나타낼 수 있는 이야기라고도 생각했다"고 말했다.

공감인터뷰) 그림책 연구자 신명호교수9

현재 신 교수는 일본에선 한국 그림책 작가들의 원화를 소개하는 순회 전시를 열고 있다. 요코스카 시립 미술관, 오카야 시립 이루후 동화관 등에서 진행했는데 내년엔 주일한국대사관에서 전시를 예정하고 있다. 순회전의 마지막을 그림책꿈마루에서 장식하고 작가들에게 원화를 돌려주는 게 신 교수의 구상이다.

그는 "국내에서도 그림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림책을 다루는 공간들도 늘어나고 있다. 모두 하드웨어적으로는 매우 멋진데 중요한 점은 소프트웨어를 충실히 갖추는 것"이라며 "그림책꿈마루는 정말 좋은 시설을 갖춘 곳이다. 이런 공간이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를 잘 만들어보고 싶다. 이번 특별전을 보는 분들이 그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그림책의 여러 면을 느끼는 계기를 만든다면, 국내 그림책 전시의 방향도 사뭇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이라고 밝혔다.

글/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사진/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신명호 교수는?

▲덕성여자대학교 산업미술학과 졸업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 시각전달디자인 석사, 일본 도쿄대학 표상문화론 박사과정 수료
▲1985~1992 리빙뉴스·일본 창미기획·KORAD 디자이너 근무
▲1992~1995 '시공사' 어린이 그림책 출판기획 고문
▲2000~현재 무사시노 미술대학·사가미 여자대학 강사
▲2002~2007 일본대학 법학부 한국어 강사
▲2009~2012 홍익대 대학원 메타디자인학과 강사
▲한국 KBBY 운영위원, 일본 JBBY 위원

■주요 저서·번역서

▲1994 그림책의 세계(2009년 개정판 출판)
▲2002·2003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한국편
▲2005 그림책은 작은 미술관
▲2019 두꺼비가 간다
▲2022 토끼와 고슴도치의 오늘도 좋은 날, 이파라파 냐무냐무, 우로마
▲2023 책방 고양이, 슬픔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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