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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리뷰] 예술로 보는 ‘문자와 여성’…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올랭피아 오디세이’展

박경호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입력 2024-10-16 10:19 수정 2024-10-16 11:34

국내 최초 ‘게릴라 걸스’ 작품 대규모 선보여

조선시대 여성의 애절한 편지 ‘원이엄마 편지’

현대미술, 유물 등 통해 본 문자와 여성의 관계

프랑스 샹폴리옹 세계문자박물관 교류 기획해

게릴라 걸스 대표 포스터(1989년)로, 아래는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협업해 제작한 한글 버전. 2024.10.15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게릴라 걸스 대표 포스터(1989년)로, 아래는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협업해 제작한 한글 버전. 2024.10.15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옷을 벗어야 하는가?(Do Women Have to Be Naked to Get Into the Met. Museum?)’

1980년대부터 활동해 온 익명의 여성 예술가 단체 ‘게릴라 걸스’가 1989년 펼친 그들의 대표 포스터 문구다. 1984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현대미술의 경향을 집결하고자 한 전시가 열렸는데, 대부분의 여성 작가들은 조명받지 못했다. 이를 계기로 게릴라 걸스를 결성한 여성 예술가들은 성차별, 인종차별 등 불평등의 강렬한 메시지를 도발적 문구의 포스터 등을 통해 표출해왔다.

인천 송도국제도시에 있는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특별전 ‘올랭피아 오디세이-문자와 여성, 총체적 예술의 거리에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게릴라 걸스의 작품들을 대거 전시했다. 이들의 메시지는 대표 포스터 속 작은 문구인 ‘미술관 현대 미술 섹션에 있는 여성 예술가는 5% 미만이지만, 누드화의 85%는 여자를 그린 것이다’로 압축할 수 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은 게릴라 걸스 측과 협업을 통해 대표 포스터의 한글 버전도 제작했다. 게릴라 걸스는 포스터 속 한글에 대해 “귀엽다”는 반응과 함께 한국에 문자박물관이 생겨 환영한다는 뜻을 전했다고 한다.

‘올랭피아 오디세이’는 문자를 주제로 과거 ‘타자’로 존재했던 여성들부터 오늘날 동시대의 ‘타자들’까지 살피는 전시다. 자유를 갖지 못한 타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가장 힘 있는 수단으로서 문자의 역할을 재조명했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특별전 ‘올랭피아 오디세이’ 전시장 모습. 2024.10.15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국립세계문자박물관 특별전 ‘올랭피아 오디세이’ 전시장 모습. 2024.10.15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벌거벗은 여성이 상류층 남성의 위선에 도전하는 듯한 시선으로 차갑게 관람객을 응시하는 에두아르 마네의 1863년작 ‘올랭피아’는 발표 당시 대중의 지탄을 받은 문제작이었다. 현재는 프랑스 오르셰미술관의 대표작이자, 전 세계에서 이 그림을 보러 미술관을 찾게 만드는 명작으로 대중의 인식이 바뀌었다. 전시장 초입에서 마주하는 아네스 튀르노에의 2012년작 ‘올랭피아 #2’는 마네의 ‘올랭피아’ 위에 12세기부터 현재까지 프랑스에서 ‘여성’을 뜻하는 동의어(문자)를 가득 채웠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양지원 학예사는 “여성들이 문자를 사용하게 되는 과정도 ‘올랭피아’의 여정과 같은 스토리 라인이 있다는 생각으로 이번 전시명이 정해졌다”고 말했다. 양 학예사의 설명처럼 한글도 ‘암글’ ‘언문’이라 불린 낮은 지위의 문자에서 공식 문자가 되기까지 400년 넘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조선 시대 여성이 한글을 사용해 남긴 글 ‘원이엄마 편지’(1586년)를 보면, 당시 여성들이 표현한 깊은 사랑과 정서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원이엄마 편지’는 한문이 공식 문자였던 조선 시대에 한글이 여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소통 수단이었는지 알려준다.

‘원이엄마 편지’(1586년)와 글쓴이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미투리’. 2024.10.15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원이엄마 편지’(1586년)와 글쓴이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미투리’. 2024.10.15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일본의 히라가나도 과거엔 여성의 문자였다고 한다. 중국 후난성의 소수민족 여성들이 사용했던 세계 유일의 여성 전용 문자 ‘여서’(女書) 관련 유물도 이번 전시에서 국내 최초로 선보인다. ‘행운을 빌게요’라고 쓰인 여서 자수 손수건과 삼조서(三朝書) 등 유물은 여성들이 감정을 나누고 소통했던 방식과 그들의 연대를 상징하는 기록들이다.

아네스 튀르노에의 ‘실물 크기의 초상화’(2017~2020년작)들은 유명 화가의 ‘이름값’만 부각하는 실태를 풍자한 시리즈로, 초상화가 아닌 화가의 이름만 쓰인 동그란 조형물이다. 실제 유명 남성 작가의 이름인 ‘Andy Warhol’(앤디 워홀)을 여성 이름인 ‘Annie Warhol’로 비틀어 여성 예술가가 소수임을 꼬집는다.

여성 지성인들의 방을 지나 전시의 마지막은 소피 칼의 대형 영상 작업 ‘바다를 보다’(2011년작)가 장식한다. 작가는 바다로 둘러싸인 도시 이스탄불에 살면서 한 번도 바다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바다를 보여주고, 뒤돌아서서 그들에게 눈을 보여달라고 한다. 이 작품을 통해 동시대의 ‘타자들’을 조명함으로써 전시 주제인 ‘문자와 여성의 관계’를 또 다른 타자들로 확장한다.

아네스 튀르노에의 ‘실물 크기의 초상화’(2017~2020년) 시리즈.  2024.10.15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아네스 튀르노에의 ‘실물 크기의 초상화’(2017~2020년) 시리즈. 2024.10.15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문자는 지루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현대미술과 스토리텔링이 어우러져 문자를 재밋게 접할 수 있는 전시다. 다양한 언어와 점자로 전시를 설명하는 것은 물론 노인층과 어린이를 위한 별도의 설명 코너를 마련했다.

이번 전시는 프랑스 샹폴리옹 세계문자박물관에서 지난 3~5월 열린 기획전 ‘스크립트 걸스’를 재기획한 교류전이다. 프랑스 전시 때와는 다른 색깔을 띤 전시로, 샹폴리옹 세계문자박물관 관계자들도 전시를 관람하곤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는 내년 2월2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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