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친구들과 어디든 덜컥 다녀
어느 순간 결혼·출산 10년이 훌쩍
떠나는 법 잊은 나, 문득 여행 제안
"오랜 만에 여행, 하나도 겁 안 나"
"여행 뭐가 겁나, 인생이 겁나지"
|
김서령 소설가 |
드라마 작가 A와 마케팅회사에 다니는 B는 한때 나와 가장 자주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었다. 가장 일하기 싫은 목요일 오후쯤이 되면 슬그머니 여행사 홈페이지를 열어두고 마우스를 꼼지락거리기 일쑤였다. "칭따오 먹태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러시아 현지에서 마시는 보드카도 정말 낭만적일 것 같지 않아?", "신주쿠 고루덴가이라는 곳엔 진짜 끝내주는 튀김집이 있대." 하릴없이 그런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대부분은 덜컥 결제를 해버리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절 칭따오도, 블라디보스톡도, 도쿄도 아무렇게나 떠나곤 했다. 여행뿐이 아니어서 우리는 서로의 생일을 빼먹지 않고 챙겨주었고 가끔, 아주 가끔 누군가가 쓸쓸하다 하소연하면 가장 빨리 달려와 주었다. 종교인도 아니면서 크리스마스이브는 반드시 같이 보냈고,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밸런타인데이가 되면 셋이서 발렌타인 17년산을 마셨다. "있잖아, 매일 그렇고 그런 선물 말고 조금 로맨틱하게, 목욕가운 같은 선물을 받고 싶어." 누군가 말을 꺼내면 누군가 반문했다. "무슨 날이기에 선물 타령이야?" 그러면 뻔뻔하게도 대답했다. "아무 날도 아닌데?" 아무 날이거나 말거나 우리는 목욕가운을 사주었다. 그래서 나도 그런 투정을 부려 통 쓰잘 데 없는 커다란 곰 인형을 선물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다 옛날얘기다. 웃자고 꺼낸 이야기라 해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추억담은 뭐랄까, 한물간 배우가 옛날 좋았던 시절을 온종일 주절대는 것 같아 청승맞았다. 어느 순간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열 살이 되었다는 건 내가 그랬던 시절로부터 십 년을 훌쩍 뜀뛰기 했다는 거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다 추억 뜯어먹고 사는 거야." A와 B, 나는 칭따오보다 훨씬 맛없는 먹태를 동네 맥줏집에서 추억처럼 뜯어먹으며 투덜거렸다. "열 살이면 십대 아냐? 십대는 엄마 없이도 며칠쯤은 잘 지낼 수 있지 않나?" 비혼의 친구들이 자꾸 내 마음을 들쑤셨다. 나는 곰곰 생각했다. 열 살 딸은 당연히 혼자 잘 수 있다. 엄마가 집을 비우면 나름대로 자유를 만끽하는 재미도 느낄 나이다. 정작 문제는 나였다. 떠나는 방법을 잊은 거였다. "이젠 잘 모르겠어. 잘 꾸며진 수영장에 아이를 풀어놓거나 엄마 아버지 모시고 온천엘 간다거나, 그런 거 말고는 모르겠어. 내가 내키는 대로 떠나는 게 어떤 거였는지 잊은 것 같아." 비혼 친구들 사이에서 나만 폭 나이 먹은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어쩌면 이렇게 시시한 채로 호호할머니가 될지도 모른다는 겁도 덜컥 났다. 내 장래희망은 '이상하고 웃긴 호호할머니'인데 말이다. 이상하고 웃긴 호호할머니의 인생이 시시하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내 작업실에는 일주일에 한 번 목요일마다 친구들이 찾아온다. 그림을 그리러 오는 친구들이다. 대단한 실력들이 아니어도 우리는 함께 그림을 그리고, 수다스럽게 서로의 그림을 칭찬하고, 한 주간 있었던 짜증나고 유쾌했던 일들을 떠든다. 그러고 나면 그 시간이 하도 후련해 우리는 벌써 일 년 반이 넘도록 이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다 내가 문득 말을 꺼냈다. "우리, 어디 좀 가면 안 돼?", "어딜?" "글쎄, 무슨 생각이 있어 말 꺼낸 건 아니고, 그냥." 그 막연한 이야기에 우리는 그림을 그리던 펜을 놓고 즉시 회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를 정했고, 날짜도 정했고, 항공기도 예약했다. 생긴 것만 보아서는 까다롭기 짝이 없게 보이지만 실은 싱겁고 순하기 짝이 없는 그림 친구들은 트집 하나 잡는 일 없이 모든 계획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여행은 삽시간에 이루어졌다. 나는 출국장에서 친구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속살거렸다. "좋아, 함께 떠나서 너무 좋아. 오랜만에 가는 여행인데 하나도 겁이 안 나." 친구가 까르르 웃었다. "여행이 뭐가 겁나. 인생이 겁나는 거지." 그 옆의 친구가 또 말했다. "야, 인생이 왜 겁나? 사는 거, 그게 뭐라고?" 이 쉬운 친구들은 다 웃는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겁날 게 뭐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출국장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다음 달 여행을 미리 예약했다. 입금까지 완료했다. 여행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음 여행 예약이라니. 그건 이 여행이 충분히 즐거울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서령 소설가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