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술로… 향토사가로… '항도사랑' 나는, 인천인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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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의학박사 '한옹 신태범'
한옹(汗翁) 신태범(愼兌範·1912~2001) 의학박사.
신 박사는 인천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누구보다도 인천을 사랑한 `인천인'이었다. `인천 1호 의학박사'란 직함으로 40여년간 많은 인천 시민에게 `인술'을 펼쳤고, 중년 이후부터는 인천 근대사를 담은 각종 서적을 발간했다. 그러나 그가 인천에 대해 가졌던 애정만큼 지역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지난 10일 인천시 남동구 인천학연구소. `신 박사에 대해 취재하고 싶다'고 하자 김창수 선임연구원이 손때가 먹은 책 몇 권을 내놨다. 그러면서 “신 박사의 서적들은 인천 근대사를 가장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며 “그가 남긴 서적 몇 권 외에는 인물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다음날 인천문화재단 최원식 대표이사에게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한번도 인천을 떠날 생각조차 한 적이 없는 분이었다”고 했다.
신 박사는 1912년 서울 관수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첫 군함 함장인 신순성(愼順晟)씨이다. 신 박사는 6살때 아버지가 인천에 정착하면서 인천 사람이 됐다. 비교적 부유한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제가 태어나기를 다행히도 중의 상쯤 되는 가정에서였어요. 그래서 서울 중류 가정의 상쯤 되는 그런 식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그 시대로서는 행운이었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 고맙게 생각합니다.”(황해문화 1993년 겨울·창간호-원로를 찾아서 중)
대한민국 최초 국비 유학생으로 뽑힐 정도로 머리 좋기로 이름 난 아버지 영향때문인지, 신 박사는 `축현심상소학교'를 졸업한 뒤, `경성공립중학교'(현 서울고 전신)에 무난히 합격했다. 학업 성적이 뛰어나 경성중을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이후 `조선 사람은 의사가 돼야 일본인들의 간섭을 덜 받으면서 넉넉하게 살 수 있다'는 아버지 가르침을 따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183㎝, 90㎏. 당당한 체격을 가진 신 박사는 운동에도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대학생때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전국대학 빙상경기대회'에 3차례나 출전한 경험이 있고, 유도(4단) 선수로도 이름을 알렸다. 개업의로 활동할 때는 대학생때 틈틈이 익힌 야구 실력을 `전국 성인야구대회' 인천 대표로 출전, 뽐내기도 했다.
신 박사는 대학 졸업후 `순천도립병원'(당시 전라남도 소재)에서 외과과장을 지내다 1942년 고향 땅 인천으로 와서 당시 일본지계의 중심지인 `본정'(本町), 지금의 중구 중앙동에 병원 문을 열었다.
`신(愼)외과'. 일본 침략기에 그것도 일본지계에서 창씨 개명을 하지않고 자신 이름으로 병원을 낸 것이다. 그의 의술은 뛰어났다고 한다. 고일(高逸) 선생은 인천석금에 “신태범은 광복 4년전 인천에서 일본인 최고 권위자인 `서야입외과'(西野入外科), `목뢰외과'(木瀨外科), `산구(山口)병원'과 경쟁해서 우위를 점하였고, 1942년에는 인천의 한인으로서는 최초의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재였다”고 적었다.
광복후 신 박사에게 정치에 입문할 기회가 찾아온다. 1945년 10월 신 박사는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과 처음 만난다. 죽산이 열개 손가락 중 여섯 개가 상한채 신 박사를 찾아온 것이다. 당시 인천에서는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 때문에 죽산의 손가락이 많이 상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신 외과에서 입원 치료를 통해 죽산은 완쾌했고, 이후 이들은 가끔 만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때의 만남은 정치 성격을 띤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전문 직업인으로서 서로의 지식을 논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잠시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듬해 죽산은 좌익단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인천지부 의장으로 선출되고, 신 박사는 부의장으로 선출된다. 신 박사는 이후 각종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죽산과 나는 이념이 달랐다”며 “부의장은 내가 원하지 않던 일이었다”고 했다.
▲경성제대의학부 졸업사진=신태범 박사는 경성제대 의학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뒷줄 오른쪽 2번째가 신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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