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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지 마세요<104>

경인일보 발행일 2007-09-13 제0면

글 배명희 그림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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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수의 작업실은 내부 공사가 마무리되어 있었다. 전병헌은 이형수의 작업실에서 함께 밤을 새운 것 같았다.

"미서가 그리스에서 엽서를 보냈어요."

"김상우랑 함께 있대요?"



이형수가 물었다.

"그런 말은 안했어요. 김 선생과 함께 갔어요?"

"김 선생이 여름 방학 때 동료 교수들과 그리스 본토를 돈다고 그랬거든요."

이형수는 공사 때문에 지저분해진 바닥을 청소하기 위해 출입구를 열어젖혔다. 앞 쪽에 덧문이 달린 창을 열자 투명한 정오의 햇살이 사선으로 비춰들었다. 진공청소기를 작동시키자 모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제 온다는 말은 없었어요?"

전병헌은 이상할 만큼 침묵을 지켰고, 이형수는 질문을 했다.

"엽서에 찍힌 소인을 살펴보았는데 너무 흐려서 안보였어요. 아마도 써 뒀다가 나중에야 부친 것 같았어요."

"가끔 해외에서 보낸 엽서가 여행이 끝나고 돌아 와서 한참 지난 후에 도착할 때도 있더라고요."

이형수는 청소기 소음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청소기는 공사 중에 생긴 먼지와 나무 부스러기를 말끔히 먹어치웠다. 출입구 반대편 어두운 코너에 조그마한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 속에서 관람객들은 원하는 포즈로 사진을 찍고, 즉석에서 뽑은 사진을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사진을 붙일 지하철 노선표를 배치하기 위해 옆 공간을 텅 비워 놓은 상태였다. 오늘은 지하철 노선표를 확대 복사할 예정이었다.

원래는 전병헌의 도움을 받아 물감으로 노선표를 그릴까도 생각했다. 전병헌은 노선표를 확대 복사하는 편이 좋겠다고 했다. 이형수도 레디메이드가 개념 미술의 본질을 더 잘 살릴 수도 있다고 의견을 냈다. 그러나 무한정 크게 복사를 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었다. 어쨌든 나로서는 그리는 것보다는 복사를 하는 편이 한결 수월했다. 물론 쉽게 하겠다는 생각이 앞 선 것은 아니었다. 먼저 벽면의 크기를 재야했다. 부분적으로 복사를 해서 이어 붙여 볼 생각이었다. 나는 줄자를 들고 벽으로 다가갔다.

전병헌은 청소를 하느라 열어 둔 창가에 붙어 서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줄자를 빼면서 전병헌의 옆모습을 보았다. 이곳에 처음 왔던 날 밤, 이형수를 기다리며 카페에 앉아 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전병헌에게서 얼핏 느껴지던 감정이었다. 쓸쓸해보였던가? 아니 오히려 고뇌하는 느낌이었다. 섬광같이 불안감이 한 순간 내 몸을 가로질렀다.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제, 오늘 나는 계속 이상한 기운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금지된 곳에 발을 들여 놓은 데 대한 벌일까? 내 속에 제도와 관습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고개 숙이고 있는 탓일까?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남편과 전병헌의 태도는 전혀 이상이 없는데 내가 흔들리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남편의 비난을 받으면 어쩌나 두려운 걸까? 지금까지 내가 전병헌에게 보여준 이미지를 깨고 싶지 않은 것인가? 스스로도 감정을 정리할 수 없었다.

나는 건성으로 줄자가 가리키는 숫자를 수첩에 기록했다. 벽면 어디쯤 내가 서 있을 장소가 붙여질 것이다. 만약 내가 지금보다 좀 더 강해진다면 나는 좀 더 멀리 있는 역에 사진을 갖다 붙일 수가 있을 텐데 생각했다.

이형수가 청소기의 스위치를 껐다. 실내에 울려 퍼지던 기계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전병헌은 시선은 바깥에 둔 채로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줄자를 벽에 대고 이형수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사진, 자궁 속의 아기처럼 찍겠어요."

전병헌과 이형수가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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