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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戰場 인천, 평화를 말하다·한국전쟁과 그 상징도시 인천·38]피해와 참상

목동훈·임승재 목동훈·임승재 기자 발행일 2011-11-01 제9면

밤낮없는 전투·폭격으로 '屍山血海' 아수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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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기계제작소 앞 거리에서 한 여자 아이가 울고 있다.(인천, 1950.9.16)

■ 무덤이 된 전선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국군이 손에 든 장비는 소총뿐이었다. 북한군의 포격에 맞서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고, 하루하루 부대원 수가 달라 보일 정도로 많은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투는 참혹했다. 전투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밤에는 적군과 아군을 식별하기 어려웠다. 아군끼리 사격을 가해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국군이 점령한 고지에는 북한군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계곡에도 시체가 즐비했다. 참전용사들은 당시의 상황을 '시산혈해'(屍山血海)로 표현한다. 사람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고 그 피가 바다를 이뤘다는 얘기다. 미군의 네이팜탄 공격으로 숨진 북한군의 모습은 마치 개가 불에 탄 형상이었다. 이런 광경을 본 군인들은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아군과 적군의 포격으로 항만과 철도 등의 도시기반시설이 파괴됐으며, 산은 벌거숭이가 됐다.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진 인천 월미도의 경우에도, 월미산의 높이가 낮아질 정도로 포격이 집중됐다고 한다.

인천항은 물양장과 호안 350m, 갑문비 4매, 교량 3기, 상옥급 창고 1만8천262㎡, 공사용 선박 17척, 기중기 2대 등이 피해를 입었다.



전쟁 중에는 부상자도 많이 발생했다. 하지만 병실이 부족해 부상자 대부분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걸을 수만 있으면 병실에서 나가야만 했다.

아군이 생포한 포로는 짐이 됐다. 대부분 포로수용소로 보냈지만, 데리고 다니기가 어려워 생포 즉시 죽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던 장병들은 인천 구치소 안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학살당한 참상을 목격하고 치를 떨었다는 증언도 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허영철(81·당시 해병대 삼등병조)씨는 "인천에서 북한군 소탕작전을 벌였다"며 "(북한군도)같은 민족이지만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 당시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며 "지금 생각해 보니까 너무나 비참하다"고 덧붙였다. 허씨는 서울 연희고지 전투에도 참가했다. 그는 "17살 먹은 인민군을 잡았는데, 알고 보니 남한 학생이었다"며 "내가 생포한 인민군 여장교 중에는 이화여대 학생도 있었다"고 말했다.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까지 한반도를 거의 다 점령했었다. 그 때 북한군은 남한의 청년들을 군인으로 모집했다. 국군이 남한 청년에게 총부리를 겨눈 셈이다. 유엔군과 국군은 서울 수복 이후 북쪽으로 진격한다.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은 또 다른 적이었다. 눈에 묻혀 실종되거나 졸다가 숨진 군인도 많았다. 한국전쟁은 발발한 지 3년 1개월 2일 만에 끝났다. 정전협정(1953년 7월 27일)이 늦어진 탓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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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범들이 처형된 현장.(대전, 1950.10.4)

■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양민

1950년 9월 10일 새벽, 미 공군이 네이팜탄 등으로 인천 월미도에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을 앞두고 이뤄진 일이다.

주민들이 살던 마을은 인민군과 그들의 군사시설이 있던 장소로부터 300여m나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미군은 아무런 사전 경고 없이 대량살상무기인 네이팜탄을 월미도에 쏟아부었다. 당시 월미도에는 6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이 사건을 조사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종합보고서에서 "이 과정에서 월미도에 거주하던 주민 100여명이 희생됐다"면서 "월미도 주민들은 사건 직후 고향을 떠나야 했으며 현재까지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과거사정리위는 2008년 합당한 피해 보상과 귀향 대책 마련을 정부에 권고했지만 현재까지 아무런 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그의 책 '한국전쟁'에서 "적을 제압하기 위한 무리한 전술 속에서 아군의 생명 역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한다"며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유엔군이 그랬다"고 했다. 또 "최근의 전쟁은 상대편 지역을 초토화하는 전략을 쓴다"며 "공군과 해군을 동원한 무자비한 폭격이 이뤄진 다음 육군이 투입되는데, 그 과정에서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가 발생한다"고 했다.

민간인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도 많았다. 인천 강화도의 내무서원과 지방좌익은 우익인사 등 다수의 주민들을 1950년 9월 29~30일 양사면 인화리 중외산 중턱에서 집단 사살했다. 또한 강화군 교동도에서 집단 학살이 벌어졌다. 이희환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는 "한국전쟁 당시 인천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이 특히 심했다"며 "미군 포격 등 다양한 유형의 학살로 많은 주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숨졌다"고 말했다.

성공회대 김동춘(사회학) 교수는 저서 '전쟁과 사회'에서 "학살은 전쟁이 가져다 주는 비인간성과 비극성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며 "전쟁에서는 승리하는 자도 패배하는 자도 없다는 말이 학살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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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군 헌병들이 북한군 부역자들을 구덩이에 몰아넣은 뒤 처형 준비를 하고 있다.(대구, 1951.4)

■ 미망인과 기지촌

전쟁은 깊은 후유증을 남긴다. 사회적 변화도 가져온다. 여몽전쟁이 끝난 뒤 고려에서는 조혼 풍습과 일부다처제가 생겼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환향녀'(還鄕女)가 사회적 문제가 됐다. 한국전쟁 이후, 미망인이 크게 늘었다. 전쟁으로 남편이 숨지거나 실종됐기 때문이다. 목숨을 건졌어도 부상 때문에 경제활동을 못하는 남성도 많았다.

생활전선에 뛰어든 여성들은 돈을 벌기 위해 허드렛일을 했다. 이 중에는 외국인(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매춘 여성'도 적지 않았다. 이른바 '기지촌 여성'이 새로운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이다. 기지촌 여성은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됐고, 이들과 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역시 사회적 문제가 됐다. 특히 이산가족 문제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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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의 네이팜탄 공격으로 몸에 상처를 입은 여성들. 전쟁의 참혹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수원, 1951.2.4) /출처: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전쟁 혼혈아 돌봐온 서재송씨

"'양색시 자식' 사회적 차별 생계 곤란…"

한국전쟁은 '혼혈아'를 낳았다. 미군과 한국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는 사회적 문제가 됐고, 해외 입양은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됐다.

서재송(83·사진)씨는 최분도(미국 출신으로 인천 덕적도에서 의료봉사를 펼치고 혼혈아의 미국 입양을 주선한 인물) 신부와 함께 혼혈아를 돌봤다. 서씨는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한국전쟁 참전용사이기도 하다. 서씨는 1964년부터 40년 동안 1천600여명의 혼혈아를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로 입양을 보냈다. 당시 혼혈아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매우 차가웠다. 혼혈아는 미군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다. 혼혈아 가정은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사람들은 혼혈아의 어머니를 '양색시'라고 불렀다. 서씨는 "옛날에는 인천 부평에 있는 미군 부대가 매우 컸다"며 "그 때 혼혈아들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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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입양에 어려움도 많았다고 한다. 그는 "해외로 입양을 보내려면 인감증명이 필요했다"며 "하지만 한 번 발급받은 인감증명은 3개월밖에 효력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혼혈아 어머니들이 거주지를 자주 옮겨 이들을 찾는 일이 매우 힘들었다"고 덧붙였다.

혼혈아 어머니가 자식의 해외 입양을 꺼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서씨는 "미국 도움으로 혼혈아 가정에 생활비가 지원됐다"며 "생활비를 받으려고 아이를 입양보내지 않는 어머니도 있었다"고 말했다. 또 "아이가 어릴 때는 괜찮지만 학교에 들어가면 놀림거리가 된다"며 "이런 일로 어머니와 자녀 간에 갈등이 발생했고, 뒤늦게 해외 입양을 추진하다 보면 어려움이 컸다"고 말했다. 지금도 덕적도에 살고 있는 서씨는 "혼혈아는 우리의 불우한 과거다"며 "혼혈아는 물론 그의 어머니도 매우 불우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목동훈기자

※ 무기로 본 한국전쟁

세계열강들 신형무기 실험장… 인류역사 첫 제트기공중전도

한국전쟁은 당시 나온 최신식 대량 살상 무기가 총동원된 전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맹활약한 무기들은 크게 개량화됐고, 세계 최초로 등장한 신무기들은 가공할 만한 위력을 과시하며 한반도 전역을 초토화시켰다.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세계 열강들이 개발한 '신형 무기의 실험장'이었다.

북한군은 소련제 최신형 전차인 'T-34 전차'와 'SU-76 장갑 자주포'를 앞세워 38선 일대 주요 방어선을 무너뜨린 뒤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까지 거침없이 밀고 내려왔다. 특히 북한군 주력 전차인 T-34 전차는 뛰어난 기동력과 강력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어, 마땅한 방어수단이 없었던 아군에게는 말그대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T-34 전차 1대의 당시 전투력은 보병 1개 대대와 맞먹는 것으로, 북한군이 운용한 T-34 전차 200여대는 무려 15개 사단의 위력과 비슷하다는 분석도 있다. 전차가 없었던 국군은 T-34 전차에 대항하기 위해 57㎜ 대전차포와 2.36인치 로켓포를 운용했으나,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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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사용한 소련제 T-34 전차. /전쟁기념관 제공

북한군 병력은 약 19만8천명이었던 반면, 국군은 이에 절반 정도인 약 10만5천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북한군 T-34 전차의 위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미국이 대전차 무기로 개발한 '3.5인치 로켓포'의 등장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에서 최초로 사용된 이 로켓포는 보병 개인 휴대화기로, 북한군 T-34 전차를 제압할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이 북한군의 총공세에 버텨낼 수 있었던 데에는 3.5인치 로켓포의 힘이 컸다.

육상과 달리 제공권은 개전 초기부터 아군이 쥐고 있었다. 특히 미국의 대표적인 폭격기인 'B-29'는 엄청난 양의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붓는 이른바 '융탄폭격'을 가해 북한군 진영을 쑥대밭으로 만들다시피 했다. 미국은 폭격 목표지점을 삽시간에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네이팜탄'을 쓰기도 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제트기 공중전이 펼쳐진 것도 한국전쟁이었다. 대표적인 전투기로는 'F-80' 등이 있다. 기존 프로펠러식이 아닌 고속회전이 가능한 제트기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해상에서는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 등 유엔군 함대들이 연합 작전을 수행했다. 인천상륙작전은 함포 사격 등 항공모함의 위력이 크게 발휘된 사례로 꼽힌다.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용해 게릴라 전술을 폈던 중공군의 주력 화기는 소위 '따발총'으로 알려진 기관단총 'PPSh 41'이었다. 이 총은 무게가 가볍고 분당 600~900발이나 나갈 정도로 성능이 뛰어났다.

한국전쟁 무기 관련 전문가인 강창국 혜천대 교수(군사과)는 "한국전쟁이 중요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전세가 여러 번 뒤바뀌었던 이면에는 양측의 막강한 무기체계가 뒷받침돼 있었다"며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는 '신무기의 전시장'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임승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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