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는 더이상 노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적으로 머리를 맞대야할 사회 현안중 하나다. 이에 경인일보는 치매 극복의 날(9월21일)을 맞아 인천시와 인천시치매예방관리사업지원단이 시행한 '치매 체험수기' 공모에서의 최우수 수상작을 전재, 치매에 대한 사회적 의식을 공유하고 치매 예방과 극복에 일조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늘 깔끔하고 독서 즐기시던 아버지
'마른하늘에 날벼락' 병원 치매진단
내 얼굴도 못 알아보시는 낯선 눈빛
머리는 받아들이지만 가슴은 울먹
고된 병수발 지쳐 문득 든 생각
"이제 그만 돌아가셨으면…"
아버지 사후 나에게 찾아온 죄책감
이젠 악수하며 화해를, 떠나보내야
사람들은 말한다. 세월이 약이라고. 누군가를 위로해야 할 때, 당장 해결될 일이 아닌 버거운 상황일 때 그렇게들 말을 한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더 또렷해지는 아픔들이 있다.
더 이상 지인들에게 토로할 수 없는 유효기간이 지난 상처는 오롯이 혼자만의 몫으로 남겨진다. 꽃노래도 하루 이틀이지 뭐 좋은 거라고 치매로 고생하시다 가신 노인의 얘기에 그 누가 오래도록 맞장구를 쳐 주겠는가. 전쟁은 그때부터였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게 된 이후부터 나만의 트라우마가 내 영혼을 공격해 왔다.
아버지의 기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사람의 마지막이 어찌 저리 참혹할까 싶을 만큼 아버지는 고통과 싸우셨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누워계시다 삶을 놓으셨다.
모든 일은 어느 날 일어난다. 그 어느 날이 누군가에겐 잔인한 시간을 예고하지만 사람의 어리석음은 그것조차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맨 처음 아버지가 집으로 오는 길을 잃어버렸다고 했을 때 단순히 기억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내 아버지가 치매라는 질환을 앓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 무의식은 겁을 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그 이름.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산 세월이 십 년이 채 안 된다. 어머니가 안 계신 세상은 언제나 외로움과 그리움을 형벌처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양 손에 부모의 손을 잡고 세상의 험한 다리를 건너야 할 유년 시절은 그래서 언제나 한 쪽으로 기울어진 채로 불안을 견디며 살았다.
그런 내게 아버지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또래 친구들이 제 어머니의 치마폭에 있을 때 난 아버지의 바지춤을 잡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감성이 풍부했다. 화단엔 꽃들이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얼굴을 달리하며 피어났다. 과실수도 종류별로 있어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행복을 느끼며 살았다. 내 유년은 쌉쌀한 초콜릿과도 같았다. 달콤한 것 같으나 쌉쌀하고 쓴 듯하나 달콤한.
짧게 머물다 서둘러 가신 어머니와는 되새길 추억이 그다지 많지 않다. 근원적인 그리움에 가슴이 시려오는 정도의 아픔이랄까. 가슴이 터지도록 오열을 할 만큼 회한이 달려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니다. 애증의 세월을 함께 건너 온 그 시간의 두께가 나를 아직도 묶고 풀어주지 않는다.
아버지의 결벽증은 병적이었다. 수건도 따로 써야 했고 공중목욕탕은 금지된 장소였다. 목욕탕 천정에 맺힌 물방울들이 세균덩어리라고 하도 주입을 시키는 바람에 난 지금도 목욕탕에 가는 걸 무척 힘들어한다. 아버지의 정서가 내게로 그대로 되물림 되어 살고 있는 나를 보면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곤 한다.
고등학교 3학년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아버진 자전거로 나를 데리러 오셨다. 교문에서 큰소리로 나를 부르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부끄러워 숨고 싶었던 나. 결국 아버지 눈에 띄어 자전거를 타고 가던 그 많은 밤들.
가는 동안 아버진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모두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민담이나 설화들이었는데 맛깔나게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솜씨에 넋이 나간 채로 집에 갈 때까지 귀를 기울이며 가곤 했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너무 많아 떠올리려 애쓰지 않아도 무한 출력이 된다. 그만큼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4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버진 내게 도려낼 수 없는 상처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나는 무언가를 드러내야 하는데 그것이 두려워 아버지와의 눈부신 시절만을 이야기하고 있나보다.
이젠 내 자신을 그만 용서해주고 싶은데 그래야 살 것 같은데 그래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내안의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가슴이 얼마나 아파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으려 묻어둔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지금부터는 고해성사를 하듯 아버지와 보낸 마지막 몇 달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아버지가 빠른 걸음으로 피아노를 향해 걸어갔다. 의아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이 났다. 피아노 위에 있던 초코파이가 먹잇감이라도 되는 듯 매의 눈빛이 되어 빠르게 걸어가는 아버지의 행동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 초코파이를 가지고 오는 모습도 무척 웃겼는데 마치 꿩이 제 몸통은 드러낸 채 머리만 숨기고 있는 모습처럼 아버지는 모두가 다 아는데도 혼자만 비장한 얼굴로 허리춤에 초코파이를 숨겨서 오는 것이었다.
처음엔 웃었지만 날이 갈수록 이상한 행동들이 늘어갔다. 길을 잃어서 애를 먹인 것이 시발점이었는데 내 아버지는 절대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서 병원에 가지도 않았다. 젊은 사람도 깜빡 깜빡 하는데 노인들 정신은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랴 싶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아버지가 낯선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걸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라고 여겼는데 내게 그런 상황이 거짓말처럼 펼쳐졌다.
"아줌마는 누군데 우리 집에 있는 거요?"
사람이 너무 놀라면 기가 막힌다고 하던가. 놀라움 뒤엔 두려움이, 두려움 뒤엔 분노가, 분노 뒤엔 절망이 차례대로 내 몸을 휘젓고 지나갔다.
"아빠, 왜 그래? 누구보고 아줌마라는 거야. 농담해?"
불안한 맘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애써 웃으며 말을 건넸지만 날 보는 아버지의 눈빛은 모르는 사람을 처음 보는 낯선 눈빛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음의 준비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토록 깔끔하던 아버지, 완벽에 가깝도록 정리벽이 있던 아버지였다.
늘 책을 읽으셨고 늘 글을 쓰셨다. 손재주가 많아 나무를 조각하고 꾸미는 것을 좋아하셨다. 아버지의 성정으로는 도무지 치매가 찾아 올 수 없다고 확신했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만큼 아버진 다른 사람들과는 아주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참 이상했다.
머리로는 아버지의 병명을 받아들이지만 가슴은 아니라고 밀어냈다. 아버지가 날 골탕 먹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기억을 하나씩 잃어가면서도 자신의 이름은 똑똑하게 발음했다.
아버지의 이불안엔 갖가지 먹을거리들이 숨겨져 있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식사시간이 되면 무척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식탐과 고집이 늘어가고 혼자서는 씻지도 용변을 처리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기저귀를 채우던 날, 아버지의 앙상한 다리를 들어 올리면서 난 하염없이 울었다. 저 다리로 나를 키우셨겠구나. 저 연약한 다리로 험한 세상을 건너 오셨겠구나. 미칠 것 같은 슬픔이 해일처럼 쉬지 않고 밀려오던 날이었다. 기저귀만 채우면 될 거라고 안심하던 나에게 아버진 멋진 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야, 너 오래 오래 살아라. 벽에 똥 칠 할 때까지."
그 말이 얼마나 끔찍한 농담인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아버지는 기저귀를 풀어 헤치고 반죽을 해서 벽에다 손을 닦았다. 방문을 열던 나는 역겨운 냄새보다 사람의 일생이 이토록 참혹해야 하는 건지 삶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무연히 바라보던 그 눈빛은 지금까지도 내게 아프게 박혀있다. 자신이 무얼 한 지도 모른 체 나를 보자 배고프다며 밥 달라고 하는 목소리엔 그 어떤 수치심도 없었다.
아버지는 무엇보다 체면을 중요시 했었다. 자신의 치부를 들키거나 남들로부터 지적당하는 걸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어 하는 성정이었다. 그랬던 아버지가 자신의 하체를 드러내놓고 용변을 방안에다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만드는 치매란 놈은 도대체 어떤 놈인가. 끝이 보이지 않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절망이 나를 후려치는 시간이었다.
하루에도 여덟 번은 빨래를 했다. 아무리 빨아대도 집안에 냄새는 빠지지 않았다. 아들이 구역질을 하면 불같이 화를 냈다. 비위가 약한 아들이 구역질을 하는 건 당연했는데도 왠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나만 힘든 줄 알았다. 가족이 모두 심정적인 고통을 느낀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아버지를 씻기는 일은 너무 힘이 들었다. 빨래는 애벌 빨아서 세탁기에 돌리면 그나마 견딜 만 했는데 아버지의 몸은 혼자로는 버거웠다. 마를 대로 마른 아버지의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방안에서 욕실까지 가는 그 짧은 거리가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 마냥 멀고멀었다.
방 밖으로 나가는 걸 무척 두려워하는 아버지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달래도 고집을 부리는 아버지가 너무나 미웠다.
이불에 둘둘 말아 질질 끌고 가서 욕실 안으로 밀어 넣는 일이 날마다 반복되었다. 욕창이 생길까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욕실까지 가는 시간이 전쟁 같다면 욕조 안에 들어간 아버지는 평화 그 자체였다. 머리를 감겨주면 숙여주는 배려도 했고 수염을 깎아주면 입술을 오므려주기도 했다.
본능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헛된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아버지. 아무리 야단을 맞아도 나아지지 않는 아버지. 숨이 가빠지고 얼굴이 달아올라 일상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낮엔 낮대로 밤엔 밤대로 숙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체력이 바닥나는 걸 느끼면서 모든 게 귀찮아졌다. 잠깐 집을 비울 때도 마음이 불안해서 달리기를 했다. 내 몸에 상처가 여기저기 나도 흔한 연고 하나 바를 새가 없었다.
그런 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온 집안을 들쑤셔 놓았다. 꿀을 손으로 퍼서 드셨는지 얼굴이며 몸이 꿀로 범벅이 되었고 냉장고 안에 있는 음식은 죄다 꺼내놓고 마구잡이로 입에 우겨넣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보고도 멈추지 않았다. 날 째려보며 못 먹게 할까봐 음식들을 품속에 끌어다 넣었다. 아버지는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그 처절한 슬픔을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런 광경을 특집으로 일 년에 한두 번 명절날 방영되는 가족드라마에서 보았을지도 모른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 앉아 혀를 차며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태도로 말이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자신을 몰라본다는 건 가장 참혹한 이생의 형벌일 지도 모른다.
그 형벌을 고스란히 일방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건 자식의 몫이니 그 절망의 깊이는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부모에게 자식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수없이 도망치고 싶은 나와 그러면 안 된다고 만류하는 또 다른 나 사이에서 날마다 시소를 타야했다.
밤이면 아버지 머리맡에 앉아 기저귀를 빼지 못하게 지켰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이제 그만 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생각을 아무도 모르게 내 맘에 품으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침에 아버지 방문 앞에 서면 두 마음이 널을 뛰었다. 혹시 아버지가 가셨을까. 안 돼, 이렇게 가시면 안 되지. 차라리 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 아버지를 위해서라고 말은 하지만 결국 나를 위해서 가셨으면 하는 걸 내 양심은 알고 있었다.
주변에서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입을 모아 추켜세웠지만 그런 칭찬을 받을 만큼 난 순수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식사량을 줄여나갔다. 식탐만 오롯이 남은 아버지를 즐겁게 해 주려는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먹는 대로 내보내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죄책감이 들수록 우울해져 갔다.
내 자신이 우울증에 빠진 것도 모른 채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며 무력해져 갔다. 아버지를 시설로 모시라는 사람들의 말이 위로가 되면서도 내가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떠넘긴다는 생각에 선뜻 결정 할 수 없었다. 내안에 뿌리 깊게 박힌 혈육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무모한 콩쥐 콤플렉스였다. 내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자만했던 것이다.
옛날,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가며 들었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착한 사람들이었다. 고난을 이겨낸 후 찬란한 보상을 받게 되는 그런 이야기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낮동안 아버지와 씨름하다 밤이 되면 베란다에 쭈그려 앉아 아래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차가운 타일바닥에 그대로 앉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할 감정들을 다스리려 애를 썼다.
아버지가 부르는 대로 나는 아줌마가 되기도 하고 누이가 되기도 하고 마누라가 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다리를 다친 나는 깁스를 해야 했다. 목발을 짚고서는 도저히 아버지를 돌볼 수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요양원에 가시게 되었다. 그 곳에서 아버지는 숨을 거두셨다.
겨우 겨우 숨만 쉬고 계셨던 아버지. 눈도 못 뜨고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고 산소마스크만 쓰고 계셨던 아버지. 오래 누워계신 탓에 결국 욕창이 생겨서 차마 들춰서 보기 힘들었던 참혹한 상처들. 손발이 묶여서 피멍이 들었던 아버지. 그래서 진심으로 빨리 가시기를 바랐던 마지막 날들.
아버지의 고통이 끝나면서 내겐 새로운 고통이 찾아왔다. 좋은 기억보다 슬픈 기억은 어찌 그리도 힘이 세던지 온종일 아버지의 처참한 모습만 떠올랐다. 만약에 그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렇게 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런 소용없는 물음만 내 자신에게 던지고 또 던지면서 울다 잠이 드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 연배로 보이는 어르신들을 보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중절모자에 양복을 입으신 할아버지를 보면 그대로 굳어버리기도 한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다. 세월이 얼마나 지나야 자유로울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주꾸미. 마트에서 보게 되는 과자와 사탕들. 그런 것들을 보면 마음이 무너진다.
나처럼 치매를 혹독하게 앓다 가신 부모를 둔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죄책감이라는 썩지 않는 몹쓸 불청객이 하루도 떠나지 않고 도사리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많이 힘이 들었다. 들춰서 괴로운 이야기를 하기란 용기가 필요했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 세상에 내 맘을 보이기로 했다. 부끄럽고 옹졸한 철없는 딸이 아버지께 띄우는 반성문이자 용서를 비는 고해성사를 하는 맘으로 이 글을 썼다. 나처럼 후폭풍에 쓰러져서 일상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싶었다.
그들이 얼마나 남몰래 가슴을 치며 눈물을 삼키는지 나는 알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는 서로 알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조금이나마 견디게 된 나만의 비법을 소개하면 이렇다.
내 자신에게 정직한 답을 말할 것을 주문한 다음 스스로에게 묻는다.
"넌 아빠가 다시 살아오셔서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니?"
난 아직도 이 질문에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나마 슬픔을 억누르는 최후의 보루 같은 이 질문을 던지며 유보하고 있는 것이다.
내일이면 칠월이다. 올해도 반이 지나갔다. 이젠 나를 괴롭히는 것들과 악수하며 화해하고 싶다. 새로운 시간을 지나간 시간으로 채우며 살아가고 싶지 않다.
"양서영, 넌 너만의 최선을 다한 거야. 거기까지가 너야. 그만 눈물을 닦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