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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3]한남철 '바닷가 소년'

김명래 김명래 기자 발행일 2014-07-03 제9면

무지개문 지나 온
'바닷가 소년'
세상에 돌직구 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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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일 오후 인천 중구 송학동 홍예문. 한 노인이 인천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홍예문을 향해 힘든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무지개처럼 생긴 문이라는 뜻의 홍예문은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 공병대가 1906년 착공하여 1908년 준공하였다. 당시 인천 중앙동과 관동 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수가 급격히 늘자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송학동 마루터기를 깎아 이 홍예문을 뚫었다. /임순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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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간 쓴 14개 단편 '자전적 소설집'
홍예문 등 어릴적 추억, 서민풍경에 녹여
사상계로 입문한 후 문학기자 길 걸어
시국선언 참여… 군사정권 강하게 비판


지난 1일 낮 12시에 인천시 중구 송학동에 있는 홍예문엘 갔다. 동인천 삼치거리에서 홍예문로를 따라 신포동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아치형 터널 아래 그늘이 깊다. 일제가 송학동 마루터기를 깎아 1908년 완공한 홍예문(虹霓門), 무지개문이라는 뜻이다.

제국주의 국가의 군인들이 만들었다는데, 이 화려하고 고운 이름을 누가 지었을까 생각하게 한다.



한낮의 더위에 지친 행인들이 화강암과 붉은 벽돌이 만든 홍예문 그늘에 이르면 보폭을 줄이게 마련이다.

한남철(본명 한남규·1937~1993)의 소설을 읽고 보니, 인천에 살면서 종종 지나치던 홍예문이 새로웠다. 어린 시절 수도국산 달동네에 살던 작가는 이따금 할머니 손을 잡고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놀러갔다. 그의 자전적 소설 '강 건너 저쪽에서'의 한 구절이다.

이따금씩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만국공원으로 놀러 가기도 하였다. 배다리를 지나 싸리재 마루턱을 넘어 한참을 걷다보면 홍여문이 나타났는데 그 안에서 소리치면 목소리가 되울려퍼져 의미없이 목청을 높이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한 재미였다. 아치형 벽은 물먹은 고목처럼 늘 거무튀튀하였고 고개너머 부두에서 불어닥치는 바람이 풍성하게 쏟아져들어 그 안은 항상 서늘했다. 신포동과 송림동 쪽을 넘나들던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서면 으레 땀을 들이다 떠나는 것이 상례였다. 그래서 홍여문 주변에는 참외, 자두, 수박 같은 여름과일과 아이스케이크, 빙수, 냉차 등속을 파는 장사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한남철은 1992년 소설집 '바닷가 소년'을 창작과비평사에서 냈다.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집이었다. 그 이듬해 한남철은 병으로 세상을 떴다. 작가가 1958년 등단 이후 30여년 간 쓴 14개 단편을 담았다.

소설집은 "나는 어렸을 때 인천에서 살았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강 건너 저쪽에서'로 시작해 그의 문단 데뷔 작품으로 1958년 사상계 10월호(통권 제63호)에 실린 '실의(失意)'에서 끝난다.

한남철은 사상계 작품 발표 이후 필명을 썼는데, 첫 소설집을 낼 때 본명 한남규로 돌아갔다. 바닷가 소년은 곧 작가 자신을 뜻한다. 이 책을 읽으면 한남철 개인이 거쳐온 삶의 궤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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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홍예문. /출처=사진으로 보는 인천시사
작가는 유소년기 체험을 당대 인천의 '서민 풍경'속에 녹였다. 세상살이는 가팔랐고 서민들은 고달팠다. 한남철은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그렸다. 수도국산 언덕바지 초가집의 이엉을 얹힌 지붕에 올라가 본 인천 풍경을 보자. 어른들은 "비가 좀 심하게 오면 보꾹에서는 간장 빛깔의 썩은 물이 노래기와 함께 흘러"내린다고 성화였지만, 아이는 지붕에 올라가 시가지를 내다보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른쪽으로는 측후소가 우뚝 선 오정포산, 그 옆은 만국공원, 만국공원 속에는 평화각, 또 그 옆으로는 뾰족 성당, 저 멀리 황골고개 너머 공설운동장, 그리고 바로 눈앞이다싶게 상인천 역사의 지붕, 역 좌우로 있는 배다리와 철다리 (중략) 가장 많이 들리는 것이 엿장수의 가위소리였다. 그리고 시원한 물뼈다귀를 사가라고 목청껏 외쳐대는 아이스케이크 장사꾼들의 목소리, 자동차가 달려가는 소리, 이따금씩 역사로 진입하는 기관차의 힘찬 바퀴소리, 자장가와도 같은 희미한 뱃고동 소리도 섞여 있었다.('지붕 밑의 한낮' 중)

수도국산 달동네 아이들은 부모 직업에 따라 친구의 별명을 지어 불렀다. 용동 시계포집 아들 길상이는 '시계포', 대한통운의 전신인 환성운수에 다니는 아버지를 둔 삼석이는 '마루보시(丸星)'였다.

주인공 광철이는 아버지가 쌀장수인 탓에 별명이 '모리배'였다. 친구 풍길이가 '모리배란 쌀장수를 뜻한다'고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광철은 자신의 별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해방기 쌀의 매점매석은 심각한 사회 문제 중 하나였다. 매점매석이 심할 경우 인천 양곡 시장의 쌀이 바닥난 적도 있었다. 양식이 없어 배를 주리는 아이들은, '이게 다 모리배 때문'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머릿속에 깊이 기억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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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래기자
한남철 소설 작중 어린 화자에게 한국전쟁 발발은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되고 공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학교를 쉰다는 일에 쾌재를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는 학교에서 '국군은 문제없이 이긴다'고만 배웠다. 난리를 피해 할머니가 있는 강화로 간 아이에게 전쟁의 참화가 비켜가지 않았다.

아침에 등교해보니 교정의 분위기는 어딘가 들떠 있었다. 김포 부근에서 통학하는 한반 애는 비행장의 공습광경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것이고, 우리들은 그때마다 정말로 전쟁이 일어났음을 선명하게 느끼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르고' 덤벼든 침략자들을 비웃었다. 국군용사가 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 아닌가.(중략)내가 아저씨를 따라 시골로 내려온지 며칠 안 되어 전쟁이라는 살벌한 어휘와는 전혀 딴판으로, 너무나 어처구니없게 수도는 침략자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소식을 모르는 채 그 여름을 지냈다. 얼마 오래지 않아 침략자들은 내가 있던 시골까지를 점령해버렸고, 그리하여 내 어린시절 중의 극히 짧은 부분은 전혀 상상도 못해본 딴 세상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어둠의 숲' 중)

한남철은 1958년 10월 사상계 신인작품 공모에 단편 '실의'가 당선돼 한국 문단에 등장했다. 하지만 응모작에 주소를 적어내지 않아 사상계 편집자들이 한동안 잡지 편집후기란에서 '한남철을 찾는다'는 글을 여러차례 남긴 일도 있었다.

지난 달 25일 서울 태평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난 임재경(78) 전 한겨레신문 부사장은 "당시 한남철은 서울 삼선교 무허가 판잣집에서 생활했는데, 이런 이유로 주소를 적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남철은 서울대를 중퇴하고 1959년 사상계에 입사해 '문학기자'의 길에 들어섰다. 이 때부터 '대표 문인'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시인 김수영은 나이가 한참 아래인 한남철을 친구처럼 대했고, 사석에서 '내 동생에게 장가들면 안 되겠냐'고 말할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소설가 황석영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62년 사상계 신인상 입선으로 등단했는데, 당시 편집자가 한남철이었다. 이밖에도 소설가 서기원, 이호철, 이문구, 시인 신경림, 문학평론가 백낙청, 염무웅 교수 등과 가깝게 지냈다. 한남철은 사상계가 폐간된 뒤 대한일보, 신동아, 월간중앙에서 문학 기자로 일했다.

지난 달 24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신경림 시인은 한남철을 "작품을 보는 안목으로 당대 문학 기자 중 최고 수준이었다"며 "글 쓰는 사람은 글이 좋으면 그만이고,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글을 못 쓰면 빵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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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정권에서 '기자질'을 했지만 한남철은 반골 기질이 강했다. 1971년에 공명선거 등을 촉구하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찬성 서명자 60인에 이름을 올렸고, 1974년에는 민주적 질서 회복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연행된 적도 있었다.

그는 1970년에 발표한 풍자소설 '신각설이'에서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거야 벙어리나 진배없고, 눈뜨고도 멀쩡하게 속는 놈들이야 장님이지 별거냐"며 폭압 정권에 꼼짝 못하고 재갈 물린 세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한남철은 1980년 여름, 신군부가 득세하던 때 회사에 사표를 던진다. 아들 한기웅(41) 씨는 "당시 아버님이 '더러워서 못해먹겠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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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대 철학과 재학시절 한남철. 2 3 한남철이 KBS에서 홍보위원으로 일하던 당시의 모습. /장남 한기웅씨 제공
작가는 이후 약 4년간 직장을 다니지 않았다. 소설가이자 대학 전임교수까지 했던 아내(이순)가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했다. 한남철은 1984년 계약직으로 KBS 홍보위원에 취직해 사보를 만드는 일을 했다. 1985년 겨울 아내가 뇌수막염으로 쓰러진 이후에는 즐기던 술·담배를 거의 하지 않고 병간호를 했다.

한남철은 1991년 집을 나서다 갑작스레 쓰러졌다. 간경화로 투병했고 1993년 4월30일 밤 10시30분에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 용미리 1묘역(비석번호 400-6-243)에 있다.

작가를 1992년 7월에 인터뷰했던 인하대 최원식 교수에 따르면 한남철은 병상에서 소설을 구상했고, 제목은 '내 고향 서쪽바다'였다.

글 = 김명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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