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가기

[경인신공]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의 역사/평택 소사벌·1

김해규 기자 발행일 2015-03-03 제18면

정유재란 日북진 차단
동북아 정세 바꿔놓아

946857_508038_4136
▲ 소사벌대첩 당시 일본군을 이끌었던 구로다 나가마사.
평택시는 경기도 최남단의 도시입니다. 산이 적고 들이 넓어서 평택이라고 하지요. 소사벌은 평택시 소사동 앞에 펼쳐진 너른 들판입니다. 벌판 끝에는 안성천이 흐르고 마을 앞에는 소사천이 흐릅니다. 조선시대 소사벌에는 삼남대로가 지났습니다. 큰 도로가 지나는 고을은 전쟁의 피해를 많이 입었고 백성들의 고통도 심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소사벌에서는 두 개의 큰 전투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의 소사벌대첩, 청일전쟁의 소사벌전투(성환전투)입니다.

소사벌대첩은 왜란(1592~1598)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입니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침략을 받은 조선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예상외의 규모, 잘 훈련된 병사들, 우수한 무기로 조선군을 몰아붙였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과 의병들의 활동, 그리고 명나라의 도움으로 전세는 뒤집혔고 곧 강화회담이 열렸습니다.

946857_508039_4136
▲ 정유재란 당시 대회전이 있었던 소사1동
하지만 몇 년 동안 지속되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일본군은 다시 침략했습니다. 이것이 정유재란(1597)입니다. 일본군의 재침으로 호남의 관문이었던 진주성이 함락되었으며 남원성과 전주성도 점령당했습니다. 조선수군까지 칠천량에서 대패하면서 일본 육군은 거침없이 북진하게 됩니다.



일본군의 북상 소식을 들은 명나라의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양호는 급히 기병과 보병 4천명을 평택 소사벌로 파병하였습니다. 좌우군으로 나눠 북상하던 일본군 6만여 명도 천안 부근에 집결한 뒤 6천여 명을 소사벌로 올려 보냈습니다.

1597년 9월 5일, 6일 사이 명나라 군대와 일본군은 소사1동 앞 소사교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습니다.

946857_508040_4136
▲ 정유재란 당시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소사벌 벌판.
이날의 대회전에서 우백영과 해생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는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일본군을 맞아 6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습니다. 소사벌대첩의 승리로 왜군의 북상은 꺾였습니다. 4일 뒤에는 이순신이 명량대첩에서 승리하면서 육군과 수군의 양동작전도 실패했습니다.

북상을 포기하고 경상도 일대로 후퇴했던 일본군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소사벌대첩은 왜란 육전3대첩으로 꼽힙니다. 왜란 당시 육전에서는 행주대첩, 진주성대첩, 평양성전투, 연안성전투 등 괄목할만한 전투가 있었지만, 전세를 뒤바꾼 싸움은 평양성전투, 진주성대첩, 소사벌대첩 뿐입니다.

만약 이들 전투에서 패했다면 조선은 왜군에게 짓밟혔을 것이고, 동북아시아의 판도는 크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김해규 평택 한광중학교 교사

■필진 약력

▶ 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의 역사
김해규 평택 한광중 교사 등 경인지역 국사교사 20명




경인 WIDE

디지털스페셜

디지털 스페셜

동영상·데이터 시각화 중심의 색다른 뉴스

더 많은 경기·인천 소식이 궁금하다면?

SNS에서도 경인일보를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