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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옹진 인천20년 보석을 다듬자·27] 파시(波市) <상>인천 파시의 역사

박경호 박경호 기자 발행일 2015-07-09 제9면

황금빛 조기떼 ‘그리운 풍어가’
이 많은 배들이 만선… 돈이 차고 넘쳤던 그 시절

▲ 1950년 미군이 촬영한 연평도 조기파시 풍경. 어선 수천 척이 해안선을 따라 길게 늘어서 정박해 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당시에는 무동력 중선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옹진군 제공
▲ 1950년 미군이 촬영한 연평도 조기파시 풍경. 어선 수천 척이 해안선을 따라 길게 늘어서 정박해 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당시에는 무동력 중선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옹진군 제공
1910년대 신형 어선·어구 도입
조기 어획량 늘어 ‘연평도 파시’
산란기때 포획… 상품가치 으뜸

굴업도-민어·대청도-고래 집결
한때는 돈 쓸어담던 바다 위 시장
남획 탓 1960년대부터 쇠락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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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여름에 전국의 고깃배가 연평도 근해로 모여 조기를 잡았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둬 나라 비용으로 썼다. -세종실록지리지

바다 위에서도 시장은 섰다. 1960년대 말까지 오뉴월의 연평도 앞바다는 배와 지느러미가 샛노란 참조기떼로 황금 물결을 이뤘다. 나이 든 연평도 주민들은 “조기 한 바가지, 물 한 바가지였다”고 그때를 기억한다.



연평바다 위에는 어선 수천 척이 몰렸고, 만선인 조기잡이 배들은 선착장에 돌아가는 대신 해상에서 장삿배에 조기를 팔기도 했다.

섬마을에는 색주가 수십 곳이 5~6월에만 임시로 차려졌다. 거기서 일하는 수백 명의 색시는 배 한가득 조기를 싣고 돌아오는 선원들을 손님으로 맞이했다. 바다 위의 시장, ‘파시’(波市)가 그렇게 열렸다.

#파시의 역사

▲ 1967년 연평도 조기파시. 파시가 사라질 무렵이지만 여전히 수많은 어선이 연평도를 찾았다. 어선은 동력선으로 대체됐고 대형화됐다.  /옹진군 제공
▲ 1967년 연평도 조기파시. 파시가 사라질 무렵이지만 여전히 수많은 어선이 연평도를 찾았다. 어선은 동력선으로 대체됐고 대형화됐다. /옹진군 제공
연평도 참조기, 덕적도·굴업도 민어, 대청도 고래 등 과거 인천 섬 곳곳에서 파시가 섰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 3대 어장 가운데 하나로 꼽혔던 연평도 조기파시가 가장 성시를 이뤘다.

조기가 우리 식탁에 오른 기록은 고려 때 처음 등장한다. 고려 후기 문신인 이색(李穡·1328~1396)의 문집 ‘목은집(牧隱集) 목은시고(牧隱詩藁)’에 수록된 시에는 조기의 다른 이름인 석수어(石首魚)를 말려 먹었다는 구절이 있다. 조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굴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봄과 여름에 전국의 고깃배가 연평도 근해로 모여 조기를 잡았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둬 나라 비용으로 썼다고 기록하고 있는 등 예로부터 연평바다는 전국 최대 규모의 조기어장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든 1910년대 일본 나가사키 지방의 안강망 어선(중선) 등 당시 신형 어선과 어구가 조선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조기 어획량도 크게 늘었다. 연평도에 대규모 파시가 열린 것도 이때부터로 보인다.

당시 신문보도를 살펴보면, 1910년 5~6월 연평도 근해에 전국 각지에서 어선 300여 척이 몰렸던 것이 1927년에 700척(조선어선 400척, 일본어선 300척)을 넘어섰고, 1946년에는 어선만 2천 척 이상이었다.

동아일보는 연평도 조기파시가 절정을 이루던 1948년 6월 2일자 신문에서 ‘1천300여 척의 어선과 3만 명의 어부를 동원해 390만 관(시가 6억원)의 어획고를 올렸다’고 보도했다. 390만 관을 t 단위로 환산하면 1만4천625t으로, 지난해 연평도 봄철(4∼6월) 꽃게 어획량 716t보다 무려 20배나 많다.

덕적도와 굴업도의 민어파시도 명성이 높았다. 1920년 굴업도 근해에서 민어어장이 발견되면서 성어기인 7~9월 전국 각지에서 어선 500여 척이 굴업도를 찾았다. 지금은 불과 10가구도 살지 않는 섬이지만, 민어파시 때는 음식점·세탁소·목욕탕 등 선원들을 위한 임시편의시설도 있었다.

하지만 굴업도는 방파제 시설 등이 없는 자연항(自然港)이라서 1923년 8월 13일 불어닥친 태풍으로 어선 63척이 완전히 파손되거나 행방불명됐고, 30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당시 경기도수산회의 공식 발표인데, 실제로는 어선과 인명피해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규모 재난으로 인해 이듬해부터는 인천 근해 어업기지가 덕적도 북리(北里)로 옮겨졌다. 조선총독부가 1937년부터 북리항을 개발하면서 덕적도가 민어파시의 중심이 됐다.

대청도 선진항은 1918년 일본 동양포경주식회사 사업장이 들어서면서 1930년대 초까지 매년 30~40여 마리의 고래를 포획하는 전국 최대의 포경장이었다. 당시 한반도 연안의 포경업은 일본이 독점했다.

#파시의 풍경

▲ 연평도 앞바다 안목어장. 연평도 사람들이 ‘어업의 신’으로 모시는 임경업(林慶業·1594~1646) 장군 설화가 깃들어 있으며, 근대 이전에는 안목어장에서 조기를 잡았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 연평도 앞바다 안목어장. 연평도 사람들이 ‘어업의 신’으로 모시는 임경업(林慶業·1594~1646) 장군 설화가 깃들어 있으며, 근대 이전에는 안목어장에서 조기를 잡았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조기는 회유성 어류로 2월 하순까지 제주도 남쪽 동중국해에서 월동하다가 3월에 흑산도에 나타났고, 4월이면 전북 부안군 칠산 앞바다로 북상했다. 조기떼는 5월 초 산란을 위해 연평도에 도착해 30~40일간 머물렀다.

어선들은 조기떼를 쫓아 올라갔고 파시도 흑산도, 부안군 위도, 연평도 순으로 돌아가며 열렸다. 연평도 조기파시가 다른 지역보다 번성했던 이유는 산란기인 연평도 조기가 크기도 크고 알이 꽉 차서 최상품으로 평가됐기 때문이다.

연평도 파시는 조기떼가 올라온 5~6월에 열렸다. 이때가 되면 섬마을에 어선과 상선 수천 척이 몰려들었다. 선주와 선원, 전주(錢主)와 객주(客主), 색주가 주인과 작부(酌婦), 음식장사, 옷 장사, 약사, 이발사 등 수만 명이 인구 3천 명에 불과한 섬으로 들어왔다.

포구 쪽 민가는 술집이나 음식점으로 바뀌었고, 이마저도 모자라 해변에는 임시 점포로 쓴 ‘하꼬방’(판잣집의 일본식 표현)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특히 선원들을 상대하는 술집과 요정이 많았다.

1947년 신문보도를 보면 연평도에 술집·요정이 260곳에 달했고, 파시를 쫓아다닌다 해서 ‘물새’라 불린 작부가 400여 명이 넘었다.

연평도 토박이인 조홍준(80)씨는 “왜정(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 선원을 상대하는 일본 기생도 있었다”며 “우리나라 기생들은 전라도, 황해도 등 각 지역에서 와서 자기 지역 손님들을 받았다”고 말했다.

작은 섬에서 수만 명이 경제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히 섬에는 돈이 차고 넘쳤다. 파시 때는 전국에서 현금이 가장 많이 도는 동네가 연평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고 한다. 오죽하면 온 국민이 즐기는 경기민요 ‘군밤타령’ 1절 가사에 연평바다가 등장한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분다. 연평바다에 어허 얼싸 돈바람 분다. 얼싸 좋네. 아 좋네 군밤이여.’

반면 파시의 주역이 아니었던 연평도 원주민들은 빈곤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한국전쟁 때 황해도 해주에서 연평도로 피란 온 김상순(83·여)씨는 “파시 땐 간통에 조기를 절이거나 갱변(해변)에서 조기를 말리는 품을 팔았고, 마을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어선에 팔았다”며 “연평 사람들이 득 본 것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파시의 종말

▲ 파시 때 해안가 뒤쪽 골목에는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지금은 2010년 연평도 포격 이후 많은 집을 새로 지어, 옛 모습을 간직한 집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 파시 때 해안가 뒤쪽 골목에는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지금은 2010년 연평도 포격 이후 많은 집을 새로 지어, 옛 모습을 간직한 집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영원할 줄만 알았던 연평도 조기파시는 1960년대 말에 끝이 났다. 덕적도 북리 민어파시도 1970년대 이후 서서히 막을 내렸다. 어획량이 점점 줄어들다가 급기야 물고기의 씨가 말라버린 것이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1만t가량을 유지했던 연평도 조기 어획량은 1960년대 말부터 급격하게 감소했다. 연평도 조기 어획량은 1972년 1천348t, 1973년 288t, 1975년 103t, 1976년 36t으로 추락했다.

덕적도 민어어장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상설극장까지 있던 덕적도 북리는 선주와 선원들이 대부분 인천으로 떠나면서 한적한 어촌마을이 됐다. 1950년대 덕적도 인구는 1만 명에 육박했으나, 지금은 1천200명 수준이다.

파시의 쇠락은 남획의 결과라는 게 전문가와 어민들의 생각이다. 어선이 대형화되고 1960년대 기존 면사 그물이 나일론 그물로 대체되면서 어획량은 획기적으로 늘어났지만, 저인망식 마구잡이 조업을 부추겼다. 어군탐지기 등 첨단장비 보급 역시 어족자원의 씨를 말리게 한 원인으로 꼽힌다.

남북 분단 상황도 파시가 종말을 고하는 데 한 몫 했다. 정부는 1968년 연평도 북쪽 NLL 부근에서 어선들의 항해를 금지하는 어로저지선을 설정했고, 다음 해에는 어로저지선이 남쪽으로 더 내려왔다.

이 같은 조치는 1950년대 남한 어선들이 NLL 이북을 넘어 조업하다가 북한군의 포격을 받은 사건이 여러 번 발생한 데 따른 것이다. 우리 어선들은 조기 황금어장인 연평도 북쪽과 서쪽 바다를 항해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희망적인 얘기가 있다. 최근 6~7년 전부터 연평 앞바다에서 이따금 참조기가 잡히고 있다고 한다. 크기가 10㎝ 이하로 상품성이 없는 조기가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위판장에서 거래가 이뤄지기도 했다.

인천시 수산자원연구소 변정훈 연구사는 “연구소에서 3년째 조기 치어 방류를 하고 있지만, 단기간에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며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으나 조기가 다시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는 의미일 수도 있기 때문에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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