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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고택기행·9] 제물포고등학교 '성덕당'

김주엽 김주엽 기자 발행일 2016-03-03 제9면

독재정권 시절 '민주주의 광장'… 철거 이겨낸 건축물 가치·추억
{ 제물포고 성덕당 : 1935년 인천부립중학교 개교때 만들어진 건물 }

연중기획 고택기행 제물포고등학교 강당
1935년 설립된 인천제물포고등학교 강당인 성덕당. 콘크리트에 화강석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만든 '적벽돌쌓기 구조'로 지어졌고, 지붕은 쌍대공 트러스트(지붕틀에 기둥을 세우는 것) 구조로 돼 있다.원안 사진은 제물포고 상공에서 드론으로 촬영한 성덕당 모습.

노후·학생 수용 이유 3차례 철거론 힘실려
동문들 학교 정체성 무너질까 강당 지켜내
적벽돌쌓기 구조 일본식 권위적 외관 특징
해방후 3·1운동 학생대표 길영희교장 부임
명사 강연·학생들 자유토론 장소로도 쓰여
"일제강점기 잔재 아닌 품고 가야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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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학교 건물은 보전이 어렵다. 예전에 지어진 학교 대부분은 지금의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아 부동산 개발 대상지에 포함돼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 안에 위치한 노후화 된 건물은 붕괴 위험성이 제기돼 학생들의 안전상 철거의 대상이 된다.

1935년에 건립된 제물포고등학교 '성덕당(등록문화재 제427호)'도 이 같은 이유로 3차례 철거 위기를 맞았다. 1991년과 1997년에는 건물이 낡고 좁아 전체 학생을 수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성덕당을 없애고, 새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동창회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후 2008년에는 인천시교육청 안전점검 결과, 시설물의 안전도가 C등급(중점관리대상)인 것으로 확인돼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성덕당이 일본인들을 위해 일제가 만든 인천 중학교 부속건물이라는 것도 철거 입장을 내세운 사람들의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제물포고 동문들과 지역문화재 위원들을 중심으로 '제고 강당 보존 추진 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이들은 문화재 등록을 추진해 근대건축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당시 추진위원회 총무를 맡았던 김윤식(10회 졸업생)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는 "개발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낡은 일제시대 건물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반드시 품고 가야 할 역사라는 생각에 보전을 추진했다"며 "강당까지 사라지면 제물포고의 정체성이 무너질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제물포고는 1935년 설립된 5년제 일본인 학교인 인천부립중학교를 광복 후 인수한 것으로 처음에는 인천중학교로 개교했다. 이후 학생수 증가와 맞물려 1954년 제물포고는 인천고등학교의 부설고등학교가 됐다. 성덕당은 인천부립중학교가 개교할 당시 만들어진 건물이다.

연중기획 고택기행 제물포고등학교 강당
성덕당 실내 모습. 강단 양 옆에는 '학식(學識)은 사회(社會)의 등불', '양심(良心)은 민족(民族)의 소금'이라는 교훈이 적혀져 있다.

건축물 대장에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만들어졌다고 기재돼 있지만 성덕당은 콘크리트에 화강석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만든 '적벽돌쌓기 구조'로 지어졌다.

망사르드(지붕 속에 공간을 만들어 다락 등으로 사용하는 건축 방식) 구조로 건축된 것으로 알려진 쌍대공 트러스트(지붕틀에 기둥을 세우는 것) 구조로 돼 있는 것으로 최근 조사 결과 밝혀졌다.

건축가 김호성씨는 '2011년 대한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에서 발표한 '제물포고등학교 강당의 건축 특성' 논문을 통해 "적벽돌쌓기 구조의 건물들은 정면 중앙에 포치형의 주출입구를 두고, 출입구와 출입구 상부를 붙임기둥·화강석 돌림띠·페디먼트(장식 벽돌)·벽면구획 등으로 장식해 권위적인 외관을 연출한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건물이었기 때문에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형태로 지어졌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제물포고 성덕당을 찾았다. 강당 내부에 들어서자 얼마 전 있었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사용됐던 의자가 눈에 띄었다. 학교 관계자는 "면적이 좁아 전체 학생이 참여하는 행사는 진행하기 어렵지만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나 학년별 간담회 장소로는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강단 양 옆에는 '학식(學識)은 사회(社會)의 등불', '양심(良心)은 민족(民族)의 소금'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다. 지난 60년 동안 무감독 시험 전통을 이어간 제물포고 학생들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문구다.

연중기획 고택기행 제물포고등학교 강당
학생 대표로서 3·1 운동에 앞장섰던 길영희 인천 제물포고 초대 교장.

김윤식 대표이사는 "내가 학교에 다니던 60년대에는 '유한흥국(流汗興國 ·흐르는 땀이 나라를 부흥하게 한다)', '위선최락(爲善最樂·선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다)'이라는 사자성어가 강단 양 옆에 붙어 있었는데 전교생이 아침 조회 때마다 함께 구호를 외쳤다"며 "전국 최초로 무감독 시험을 치르는 인천 최고의 학교에 다니는 자부심이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강당 내부는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중앙 기둥이 없는 형태로 지어졌다.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한 형태로 간결하면서도 기능적이다. 이 때문에 당시 대규모 실내 집회 장소가 없었던 인천 지역의 큰 행사는 무조건 이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1956년부터 13년 동안 제물포고 교사로 근무한 심재갑 '길영희 선생 기념사업회' 고문은 "학교 행사는 물론이고, 전국 웅변대회가 매년 개최될 정도로 인천을 대표하는 건축물이었다"고 말했다.

건립 초기 성덕당에선 일본 제국주의의 필요성과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강연이 많이 열렸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후 학생 대표로서 3·1 운동에 앞장섰던 길영희 선생이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대쪽같은 훈시장소로 탈바꿈했다.

또 현상윤, 설의식, 장이욱, 변영태, 유진오, 백낙준, 함석헌 등 당대 석학들의 강연도 펼쳐졌던 곳으로 유명하다.

연중기획 고택기행 제물포고등학교 강당

심 고문은 "길영희 선생이 당시 명사들과 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제물포고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인천시민을 위한 명사 강연을 많이 벌였다"며 "1960년도 졸업식에서는 그 해 사망한 조병옥 박사의 추모식을 진행할 만큼 인천 시민들에게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고 했다.

김 대표이사도 "독재 정권 시절이었기 때문에 모든 학교에서는 강압적인 분위기가 많았지만 성덕당 안에서 만큼은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이 열렸다"며 "인천 지역 민주주의의 광장과 같은 역할을 했던 장소다"고 전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제물포고 구(舊) 교사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이제 예전 제물포고를 추억할 수 있는 건물은 성덕당 밖에 남지 않았다.

김 대표이사는 "운동장에 있던 인천중 건물과 제물포고 본관이 사라져 버린 것이 너무 안타깝다. 학생 수가 늘어 사용이 어려웠을 수도 있겠지만, 건물을 보수하면 충분히 오랜 기간 보전할 수 있었던 건물"이라며 아쉬워했다.

이어서 그는 "지금 남아있는 성덕당이라도 잘 보전해 인천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며 "낡았다고 무조건 부숴버리는 것이 아니라 건물의 가치와 추억을 살릴 수 있도록 고민해봐야 한다"고 했다.

/글 =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 사진 =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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