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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고택기행·17] '수탈의 거점' 일본 은행들

김영준 김영준 기자 발행일 2016-04-28 제9면

일제의 경제침략 본거지서 시작된 한국 금융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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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인천 본정통 모습. 사진 오른편에 일본 제1은행이 보이며 중앙쪽에 제58은행 지붕과 그 앞에 제18은행 지붕이 보인다. /인천 한중문화관 제공

'인천 최초 은행' 일본 제1은행 개설 이후
1900년대초 일본계 금융업체 20여개 달해
일본인 거주 중심 '본정통' 3개 은행 위치
19세기 '서구식 건축 양식' 고스란히 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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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대불호텔을 지나서 은행거리로 접어들었다. 일본제1은행과 일본제18은행이 개점하면서 이 넓은 길은 '은행거리'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중략)…왜나막신을 신은 일본인들로 붐비는 은행거리로 다시 접어들었다.

여름에 개점 예정인 제58은행은 공사가 한창이었다. 초상집과 감옥의 서글픔 따윈 낄 자리가 없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향한 열망이 건물과 함께 우뚝했다. - 김탁환의 소설 '뱅크' 중에서
일본은 조선 경제 침탈을 위해 은행을 앞세웠다.

조선 상인들은 개항장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는커녕 일본 상인들에게 밀려 몰락할 위기에 처했다. 1899년 개성, 서울, 인천 상인들은 대한제국 황실의 재정 지원을 받아 '대한천일(天一)은행'을 세웠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부터 러일전쟁 시기인 1905년까지 인천을 배경으로 한 소설 '뱅크'는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인 천일은행 탄생을 소재로 삼았다.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뱅크'에선 치열한 돈줄 쟁탈전이 전개된다.

인천 연중기획 고택 일본 제1은행

소설에서 그려진 것처럼 19세기 말 한반도에서 벌어진 열강들의 세력 다툼에서 실권을 쥔 일제는 가혹한 경제적 수탈을 자행했다.

잇단 화폐개혁, 토지몰수, 토지를 담보로 한 대출, 미곡 탈취 등은 일제가 경제 수탈의 수단으로 식민 통치 기간 내내 애용한 정책이었다.

경제 수탈의 앞잡이 역할을 한 일본계 금융 기관이 인천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개항된 1883년이다. 그해 11월 인천지역 최초의 은행인 일본 제1은행 부산지점 인천출장소가 개설됐다. 이 은행의 주요 업무는 한국산 금 매입과 해관세 취급이었다.

일본 상인에 대한 대출 등으로 업무가 확장되자 1888년 9월 인천지점으로 승격됐으며, 한 달 후에는 서울에 인천지점의 출장소를 두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인천에 일본 상인이 늘고 거래량도 급증하자 1890년 10월 제18은행이 인천에 지점을 냈다.

또, 1892년 7월 인천전환국에서 주조하는 신화폐와 구화폐의 교환을 주목적으로 제58은행도 인천에 지점을 열었다. 이어서 일본의 보험회사들도 잇따라 인천에 진출하는 등 1900년대 초 조직적으로 건너와 인천에 문을 연 일본계 금융업체는 20여개에 달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모여 살던 거류지의 중심가를 본정통(本町通)이라 불렀다. 현재 인천 중구청 정문 앞 신포로 23번길을 따라 수십m 사이에 일본 제1은행, 제18은행, 제58은행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자리 잡고 있다.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은 "인천의 본정통은 경제 침략의 본거지로 보면 된다"면서 "개항 이후 세관이 설립되고, 물품이 오고 가면서 자금의 결재에 은행이 필요했으며, 요충지에 일본 은행들이 자리 잡았다"고 설명했다.

인천 연중기획 고택 일존 18은행과 58은행

100여년 전 우리 경제 수탈의 상징인 인천의 일본 은행들은 19세기 일본이 받아들인 서구식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건축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899년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진 제1은행의 설계자는 니이노미 다카마사(新家孝正)다. 모래와 자갈, 석회를 제외한 벽돌, 석재, 시멘트 및 목재 일체의 건축자재를 일본에서 가져와 사용했다. 이 석조 건물이 세워지기 전 제1은행은 서양식 목조 2층의 외벽에 페인트칠을 한 건물에서 영업했다.

손장원 인천재능대 교수는 '손장원의 다시 쓰는 인천근대건축'에서 건물의 전체적 외관은 주출입구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구성한 절충주의 양식의 건축물로 규정하고 있다. 출입문 상부에 반원 아치(Arch)를 틀었으며, 주출입구 상부의 지붕에는 르네상스풍의 돔(Dome)을 올려놓았다.

넓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내부에 4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 구조체를 지지하도록 했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됐다.

건물 출입구 상단에는 조선은행이라고 뚜렷이 새겨져 있다. 이는 제1은행이 식민지 시대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으로 승격되면서 얻은 이름이다. 해방 후 한국은행이 그 역할을 이어갔지만, 옛 흔적은 고스란히 남았다.

1890년대 인천에 살고있는 일본인의 절반가량은 야마구치(山口), 나가사키(長崎) 사람들이었다. 나가사키에 근거지를 두고 설립된 제18은행은 나가사키 출신 상인들을 위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인천에 첫 해외 지점을 냈다.

이 건물은 기단을 석조로 처리한 뒤 벽돌을 쌓고 그 위에 돌을 붙여 전체적으로 석조물로 보이도록 했다. 지붕형식은 모임지붕이며, 일본식 기와로 마감됐다. 일본 제1은행과 제58은행 인천지점이 금고를 본관 외부에 설치한 것과 달리 이 은행의 금고는 내부에 설치돼 있다.

인천 연중기획 고택 -  메인 일본 58은행과 18은행 전경

제58은행은 대외 상거래가 가장 활발한 오사카(大阪)에 본점을 두었던 은행이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19호인 이 건물의 벽돌은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다. 프랑스풍의 건축물로 초기 양식건축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이 건물은 석조기단과 발코니, 도머창, 맨사드지붕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들 세 은행이 정치 자금의 융자와 해관세의 취급, 한일 양국의 국고금 취급 등에서 특허를 받으면서 인천 개항장은 한국 금융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하지만 한일병합 이후 모든 제도와 업무가 서울 중심으로 변해감에 따라 각 은행 지점들도 본부를 서울로 옮겨 갔다. 이에 따라 인천의 은행들도 그 기능을 축소하면서 기본적인 금융업무만을 보는 곳으로 정체됐다.

해방과 한국전쟁은 인천지역 금융 판도를 바꿔놓은 큰 사건이다. 100여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세 은행의 건물은 금융기관을 비롯해 각종 기관의 사옥으로 사용됐다. 현재 제1은행과 제18은행은 인천 중구청이 개항박물관, 근대건축전시관으로 각각 운영하고 있으며, 제58은행 건물은 중구요식업조합이 사무실로 쓰고 있다.

지역의 각급 학교 학생들에게 현장 체험 학습장으로 인기를 끌면서 평일 하루에 500~800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는 개항박물관과 근대건축전시관은 주말에는 외지에서 인천을 찾은 단체 관광객과 가족 단위 관람객들에게 100여년전 역사를 전하고 있다.

조우성 관장은 "민간에서 사용하고 있는 제58은행 건물의 경우 공공의 자산으로써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인천시가 건물을 사들이기 힘들다면 지역 독지가가 구입 후 시에 기탁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면서 "지역의 근대 문화재들을 적극적으로 보존하면서 문화 자원화의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 은행이름에 숫자가 들어간 이유

1872년 실시된 일본의 국립은행조례에 의해 인가된 허가번호에 따라 각 은행을 '제00국립은행'으로 명명한데 따른 것이다. 국립이지만, 국가가 운영한 것은 아니고 국가의 통제를 받는 민간업자가 설립해 운영했다. 1~153번까지 있었고, 이들 은행은 서로 인수와 합병을 거듭해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인천에 진출했던 세 은행 중 제1은행과 제58은행은 현재 하나의 은행으로 통합(미주보은행)됐으며, 제18은행은 옛 명칭으로 영업하고 있다.

/글 =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 사진 = 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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