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가기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황해도 순위도 출신 임경애 할머니(2)

정진오 정진오 기자 발행일 2017-01-26 제10면

염전이 있고 모래·나무가 많았던 곳
북녘 섬마을도 일제수탈은 못피했다

인천 기획 실향민
황해도 순위도에서 태어나 두 번의 피란생활과 평생을 생선장수를 하며 살아온 임경애 할머니가 경인일보 정진오 기자에게 태어난 황해도 순위의 기억을 더듬으며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2017012501001704500083214
임경애 할머니(84)가 들려주는 피란 이전의 어릴 적 삶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그야말로 딴 세상 이야기이다. 할머니가 태어난 황해도 옹진군 흥미면 순위도는 북한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강령군 순위리에 속한다. 기다랗게 뻗어 내린 작은 섬인데 가운데 허리 부분이 잘리다시피 움푹 파인 모양새가 특이하다.

섬은 강령반도의 끝자락인 등산곶을 서쪽에서 방파제처럼 막아주고 있다. 창린도와 기린도 너머는 그 유명한 옹진반도의 장산곶이다. 등산곶에서 장산곶으로 이어지는 해안은 연평도와 백령도로 연결되는 물길과 맞닿아 있는데 작가 황석영은 소설 '장길산'의 첫 페이지를 바로 이곳에서 시작한다.

'황해도는 동으로 함경도와 강원에 인접해서 마식령 산맥의 산세에 닿고… 팔대 명산의 하나이며 태곳적 단군의 도읍지인 구월산은 그 줄기가 남서쪽으로 우회하여 추산을 따라 불타산에 이르고, 막바지로 그친 곳에 장산곶이라는 험한 해안 마루턱이 있으니 … 조기 떼가 연평을 경유해서 대청 소청 앞바다를 지나가는 철이 돌아왔다.' 타고난 이야기꾼 황석영이 장산곶매에 얽힌 전설을 풀어내는 장면이다.

'장길산'의 문을 여는 장치로 장산곶과 해동청 보라매를 설정했다는 것은 이곳이 아마도 남북분단의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소이자 통일 염원의 절절함이 넘쳐 흐르기 때문이었을 터이다.



할머니는 열아홉 살 먹던 해인 1951년 첫 피란 때까지 순위도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자동차라는 것도 피란길에 백령도에서 처음 봤다. 미군 차량이었다. 할머니의 집은 순위도에서도 섬의 가운데 허리 쪽인 널목이란 동네에 있었다. 할머니는 '널먹'이라고 불렀다.

할머니는 계모 밑에서 컸다. 다섯 살에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그 이듬해에 아버지(임응태)는 새엄마를 얻었다. 계모의 학대는 가혹했다. 응석받이로 유치원에나 다닐 예닐곱 어린 여자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심했다. 일곱 살부터 밥을 하라고 시켰다. 절구보다도 작은 애가 절구질까지 했다. 기막힌 노릇이다.

"일곱 살 애가 무슨 밥을 할 줄 알겠어. 솥에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 부뚜막에 올라 앉아 밥을 했어. 그런데 어떻게 하는지 알아야 하지. 어찌나 불쌍했는지 옆집 할마이가 와서는 물은 요렇게 손등에까지 와야 한다고 가르쳐 주어서 배웠어."

계모가 얼마나 부려먹었던지 동네에서는 '임응태네 머슴'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정도였다. 한량처럼 지낸 아버지는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계모는 아버지 없을 때만 그랬다. 일꾼을 사 밭일을 할 때는 일꾼들 밥까지 시켰다. 양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다 하고 보니 밥이 설익었다. 마침 옆집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 그 할머니는 안 퍼진 밥을 그대로 두고는 솥뚜껑에 아궁이에서 불기가 그대로 남은 재를 수북이 얹었다.

얼마간 있다가 재를 털어내고 뚜껑을 여니 밥이 아주 잘 되어 있었다. 일하던 사람들은 속도 모르고 '어린애가 어쩜 이렇게 밥을 잘 했느냐'고 칭찬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부엌에는 솥이 3개가 걸려 있었다. 큼지막한 밥솥과 물 솥이 양쪽에서 2개의 아궁이를 하나씩 차지했고, 그 사이에 작은 솥을 하나 더 걸었다. 국솥이었다. 이렇게 배운 할머니의 음식 솜씨는 정평이 나 있었다. 좀 커서는 한동네에 살던 큰아버지 댁 반찬까지 도맡아서 해줬다.

큰아버지 입맛에 꼭 맞았기 때문이다. 반찬거리야 별다른 게 있지는 않았다. 감자나 푸성귀가 전부였다. 동네에서 제법 잘 살았던 큰아버지 집에는 커다란 방이 있었다. 그 방에서 동네 아이들은 학교 수업처럼 '양학(洋學)'을 배웠다. 그러나 할머니만 다니지 못했다. 계모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기억하는 고향생활은?

길게 뻗은 섬 허리부분 '널목'이란 동네
1951년 피란전엔 자동차를 본적도 없어
계모 밑서 일곱살부터 밥하며 고된세월
친구들과 달리 본인만 '양학'도 못배워
염전식 자염법으로 소금생산 이뤄져…
농업이 주업이고 수산·광공업도 '성업'


딸에게 무심했던 아버지는 뭘 만드는 솜씨 하나는 좋았다고 한다. 버선본을 만들어 놓으면 동네 사람들이 다 갔다가 쓸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각자 집에서 옷을 지어 입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그런 것만 잘했다고 기억한다.

계모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다. 팔뚝에는 아직까지 흉터가 남아 있었다. 한번은 죽을 뻔한 경우도 있었다. 때리는 걸 피해 방에서 뛰쳐나가 맨발로 도망치다가 뱀에 물리고 말았다. 시골에서 별달리 처치할 방도가 없었다. 온 몸이 퉁퉁 부어올랐다. 다들 죽는다고 했다. 그런 딸을 아버지가 살렸다.

"신도 신지 않고 도망 나가다가, 울타리 옆에 복숭아나무가 있었거든. 그 밑 돌 더미에 뱀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거기를 밟은 거야. 그때 엄지발가락 쪽을 물린 거지. 말도 못하게 부었지. 아버지가 긴 못을 뾰족하게 해서는 불에 달궈서 잔뜩 부은 발이며 다리 여기저기를 쑥쑥 찔렀어. 말쑥대기 풀이라고 있는데 그걸 찧어서 덮어줬어. 얼마 있으니 독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래서 살았어."

집은 큰방, 윗방, 사랑방, 헛간이 있었다. 물론 초가집이었다. 소도 키웠는데 오빠 결혼시킬 때 팔았다.

할머니는 고향에서 피란 나오던 배를 설명하면서 전혀 생각지 않았던 얘기를 했다. 끌배로 나왔는데 그 배는 소금 같은 짐을 싣던 배라는 거였다. 염전이 있었느냐고 물으니 순위도에서 소금을 구웠다고 했다.

일제는 1907년 인천 주안염전을 시작으로 하여 서해안 일대에서 천일염전을 대대적으로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순위도에서는 한국전쟁 때까지도 우리의 전통 방식으로 소금 생산이 이뤄졌다는 얘기다.

"평평한 곳에 있는 개흙을 소로 끌어다가, 거기서 나온 짠물을 다시 커다란 솥에다 넣고 끓이는 거야. 나무도 말도 못하게 많았어. 그걸 일본 놈들이 들어와서는 다 가져갔어."

2017012501001704500083212
임경애 할머니가 얘기한 대로 소금을 만들기 위해 소로 개흙을 끌어 모으는 광경을 묘사한 '한국수산지' 그림을 토대로 다시 그렸다.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순위도 염전식 자염법

해안가 갯벌을 갈아 염분이 달라붙은 흙 생성
흙에 해수를 침투시켜 염도를 높인 후에 끓인다
갯벌을 뒤집어 짠흙을 생성하는 채함 작업은 힘센 소가 필요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굽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나무가 필요
쇠 솥에 끓일 때는 특히 소나무가 주로 들어갔다
-우리나라 제염업과 소금 민속(2008년, 민속원)


할머니는 바로 염전식 자염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제염업과 소금 민속'(2008년, 민속원)이란 책에서 설명하는 것과 똑같다. '염전식 자염법은 먼저 해안가의 갯벌을 갈아서 염분이 달라붙은 흙을 생성한다. 이후 흙에 해수를 침투시켜 염도를 높인 후에 끓이는 것이다.

갯벌을 뒤집어 짠흙을 생성하는 채함 작업은 힘센 소를 필요로 하며, 농기구의 발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굽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나무가 필요했다. 쇠 솥에 끓일 때는 특히 소나무가 주로 들어갔다. 조선 때부터 소금 생산이 많은 서해안에는 그에 따른 소나무 남벌을 막도록 하는 금송정책이 자주 있었다.

'옹진군민회지 편찬위원회'가 1995년 북한 땅 옹진군의 옛 지리지(地理誌)를 되살려 펴낸 '옹진군민회지'는 할머니 동네인 예진리 널목과 등산리 등 연안에는 화염전(火鹽田)이 여러 곳 있어 소금을 생산했다고 밝히고 있다.

할머니는 또 순위도의 모래가 질이 좋았는데 일제 때 마구 퍼갔다고 했다. '한국 근대사의 풍경'(2006년, 생각의 나무)이란 책에 따르면 일제는 유리산업의 원료로 쓰기 위해 구미포 등 황해도 해변의 질 좋은 모래 '세금사'를 연간 7만t 이상씩 퍼갔다. 나무는 철도 부설이나 광산 개발에 쓰였을 것이고, 모래는 유리를 제조하는 데 들어갔을 터이다. 우리의 모든 강토가 그랬듯이 할머니의 고향 역시 일제의 수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할머니는 소금과 수산물 얘기를 하면서 "창바위라는 데에는 조합이 있었다"고도 했는데 '옹진군민회지'에는 '창암리(蒼岩里)'에 '흥미 어업조합'이 있었다고 적시하고 있다. 할머니는 창암리를 창바위라고 불렀다.

할머니가 기억하는 순위도의 수산물 중에는 해파리가 있다. "해파리가 유명했어, 흔했지. 순위도 해파리는 크고도 유리처럼 맑았어. 깨끗했지. 맛도 좋았어." 해파리 얘기는 '옹진군민회지'의 수산업 분야에도 나오지 않는다.

2017012501001704500083213
황해도 옹진반도와 강령반도 일대가 자세히 드러난 지도. 붉은 선으로 표시된 섬이 순위도. 출전 /옹진군민회지

'옹진군민회지'에 따르면 순위도 연안에서 잡히는 어패류는 가오리, 상어, 멸치, 숭어, 갈치, 돔, 문어, 오징어, 굴, 백합, 전복, 바지락, 해삼, 가시리(가사리), 우무가시리(우뭇가사리) 등이다. 해파리는 빠져 있다. 혹시 해파리를 가사리나 우뭇가사리 중의 하나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정약전(1758~1816)의 '자산어보'에는 해파리를 해타(海타, 해팔어)라 했는데 우뭇가사리와 같다는 표현이 나온다. '전진할 때에는 무르녹을 듯이 나약하여 우산 같고 밖으로 처진 듯이 헤엄친다. 그 성질과 빛깔이 흡사 우뭇가사리와 같다. 우모초(牛毛草)를 쪄서 이루어진 기름이 엉기어 굳은 것을 우뭇가사리라 한다.' 할머니는 분명히 해파리라 칭하고 많이 났다고 했는데 '옹진군민회지'에서는 왜 빠졌는지 궁금할 뿐이다.

할머니가 살던 순위도를 포함한 황해도 옹진군 흥미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흥면(新興面)과 아미면(蛾嵋面)을 병합하여 생겨난 이름이다. 흥미면 인구는 1940년 기준으로 2천70호에 1만823명이었다. 산업은 농업이 주업이며 수산업과 광공업이 성업했고, 육지부 연안과 섬 주민 중에는 반농, 반어 형태가 많았다.

국가무형문화재 제82-나호인 서해안풍어제의 본향이 바로 할머니의 고향 흥미면이라고 할 수 있다. 서해안풍어제인 배연신굿과 대동굿 기능보유자이면서 인간문화재인 김금화 만신이 할머니보다 3년 먼저 앞 동네에서 태어났다. '옹진군민회지'는 김금화 만신이 흥미면 괘암리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글/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경인 WIDE

디지털스페셜

디지털 스페셜

동영상·데이터 시각화 중심의 색다른 뉴스

더 많은 경기·인천 소식이 궁금하다면?

SNS에서도 경인일보를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