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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4]평안북도 용천군 출신 이형근 할아버지 (下)
목동훈 기자 발행일 2017-04-13 제9면

북방 방어와 대륙 진출 전초기지
철길위 쌀·소금 수탈 끊이지않아

인천 연중기획 실향민 이형근 할아버지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출신 실향민 이형근(88) 할아버지가 파란만장한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반공포로 출신이라 이산 상봉 신청못해
육군 근무경력도 있어 식구들 피해 우려
무역회사 운영 부친 영향 중국서 살기도

압록강 하구 드넓은 평야·염전으로 유명
2004년 용천역 열차폭발로 알려진 지역
일제때 수탈·물자수송 목적 '철도' 발달

팔뚝만한 '조기' 잡혀 용암포 어시장 유명
기독교 전파·경제적 풍요 탓 교육열 높아
1915년 서당 104개 1930년 유치원 설치도
해방후엔 소련군 수탈 이어져 고통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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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출신 실향민 이형근(88) 할아버지의 삶은 파란만장 그 자체다. 인민군으로 한국전쟁에 강제 동원돼 전장(戰場)에 내몰렸다가 미군의 포로가 됐다. 포로 석방 이후엔 국군에 자진 입대해 인천항 인근 육군 병참기지창에서 군 생활을 했다.

그 인연으로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제대 후 동인천역 앞길에 자그마한 전기상회를 차려 전기통신 자재를 납품·시공하는 회사로 키웠다. 포로 생활이 몹시 힘에 겨웠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덕에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상황은 면했다. 인천에 자리를 잡은 뒤로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러나 남모르는 혼자만의 고통도 있었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한으로 남아 가슴 한편에 구멍을 뚫었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은 생각도 하지 않아. 브로커 시켜서 겨우 가족을 찾았지. 3년 전 중국까지 가서 통화를 했어. 뭐 있겠어. 한참 울었지. 살아 있는 날까지 잘살라고 한 게 마지막 통화였어."

반공포로 출신, 특히 남한에서 군 복무를 한 실향민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하지 않는다고 한다. '못한다'는 표현이 맞는 듯, 행여 이북에 남아 있는 가족에게 해가 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다.

전쟁에서 인민군으로 싸우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남한에 번듯이 살아 있는 게 알려지면, '반동분자 집안'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여기서도 할아버지의 고향 마을 구석구석을 구체적으로 싣지는 못하고 그저 용천까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이형근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중국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중국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해 몇 년간 중국에서 산 적이 있다"며 "(아버지는) 무역을 하시니까 중국어와 영어도 잘하셨다"고 했다.

용천군은 중국과 가깝다. 철도 등 교통이 발달해 왕래가 어렵지 않았다. 중국 대륙으로 연결되는 경의선을 중심으로 양시선(신의주~양시~남시), 다사도선(양시~용암포~다사도) 등의 철도 노선이 있었다. 1904년 3월 23일 개항한 용암포에서는 배가 떴다.

"용천군이 뭔가 하면, 2004년 용천역 열차 폭발사고 알지? 그게 용천이야. 그때 많이 죽었어. 그래서 모금 운동도 벌였잖아."

용천군에 철도가 발달한 이유가 있다. 일본이 쌀과 소금을 빼앗고 군수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철도가 필요했다. 용천은 압록강 하구에 펼쳐진 평야와 염전이 유명하다.

"용천에는 인천 소래와 같은 염전이 있어. 이북에서 가장 큰 염전이지. 그래서 소금 염(鹽)자를 써서 '염주군'(1952년 12월 용천군과 철산군 일부를 합쳐 신설한 지역)이라고도 하잖아. 용천벌(용천평야)은 우리나라에서 3~4번째로 넓은 평야야."

철도는 쌀·소금 수탈과 전쟁의 수단이었다. 일본인이 만든 회사 불이흥업은 용천에도 불이농장(不二農場)을 만들어 쌀과 노동력을 착취했다. 일제는 곡물검사소와 정미소까지 운영했다. 어찌 보면 인천과 비슷한 처지였다. 일제는 인천항을 통해 쌀과 소금을 자국으로 실어 날랐다.

"호남에도 불이농장이 있잖아. 그게 일본놈 회사인데, 용천에도 있었어. 노동 착취가 심했어. 쌀이 100가마 나오면 70가마는 일본놈에게 바치고 30가마밖에 못 먹었어. 지주한테도 줘야 하니까 30가마도 안 되는 거지 뭐."

평북 출신 장충식(85) 단국대 이사장은 대하소설 '그래도 강물은 흐른다'를 썼는데, 주요 배경이 용천이다. 그의 소설은 용천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용천군은 평안북도에서 가장 풍요로운 곡창지대로서 산세가 아름다우며 물이 맑고, 예로부터 북방 방어의 요충이며 대륙 진출의 전초 지역이었다. 용천군은 압록강 하류에서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광활한 황해 바다와 접하고 있어서 농수산 자원이 풍족하고 지형이 평야를 이루고 있어 천혜의 옥토로 생활 수준이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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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회유도. 주강현 저서 '조기에 관한 명상'(한겨레신문사, 1998)에서 발췌.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쌀과 소금 다음으로 용천에서 유명한 것을 꼽자면 '조기'일 것이다. 용천 앞바다는 인천 연평도처럼 '조기 어장'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주강현(62) 제주대 석좌교수는 저서 '조기에 관한 명상'에서 "용천 용암포 근역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흩어져 있으며 서쪽의 마안도는 우리나라 최북단의 섬이다. 밑으로는 반선열도가 이어져서 조기떼가 몰려든다"며 "군 소재지인 용암포는 어시장으로 유명했다"고 했다. 용암포와 부라면 선리동의 어시장에서는 해산물 등이 거래됐으며, 용암포 어시장은 4월부터 11월까지 매일 열렸다.

경향신문은 1985년에 '분단 40년-다시 가야 할 우리의 산하'라는 기획기사를 연재했는데, 그 10회째가 '용천군'이다. 기사 내용 일부를 옮겨 본다.

"용암포구 어시장에서 할아버지가 사오신 조기가 두름으로 엮어져 처마 밑에 치렁치렁 매달려 있는 우리의 집들이 오손도손 모여 살았습니다. (중략) 오늘도 며느리가 구워 올린 굴비를 볼 때마다 '남기지 말고 많이 먹어'라며 굴비의 살점을 발라내어 주시던 오마니의 정겨운 냄새가 가슴으로 저며 들어 왈칵 되살아나는 우리의 고향, 용천입니다."

용천 출신으로 군민회장도 지낸 평안북도중앙도민회 이인범(82) 사무총장은 "용천의 조기는 팔뚝 만하다. (나는) 해방 이후 남한으로 왔는데, 고향에서의 기억 때문에 모든 조기가 그렇게 큰 줄 알았다"며 "조기를 소금에 절여 부엌 그늘에 매달아 놓고 1년 내내 먹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세종실록지리지' 용천군 편에도 조기가 나온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여우가죽·삵가죽·수달피(水獺皮)·옻·족제비털·어교(魚膠)·동(銅)·철(鐵)·지초(芝草)요, 약재(藥材)는 감출(甘朮)이며,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삼(麻)·닥나무·왕골·배·밤이요, 토산(土産)은 밴댕이(蘇魚)·조기(石首魚)·민어·준치·홍어·넙치·세린어(細鱗魚)·오징어·상어·큰새우·굴·도아조유(島阿鳥油)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어교는 대구 등 물고기의 부레를 말린 것, 지초는 버섯의 일종, 감출은 엉겅퀴과에 속하는 약초를 말한다. 도아조유는 사다새(펠리컨·pelican)의 기름이란 뜻으로, 피부병 등을 치료하는 데 쓰였다. '본초강목'과 '동의보감'에는 사다새 기름이 음식창(陰蝕瘡, 음부에 생기는 부스럼)과 옹종(癰腫, 큰 종기)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귀한 진상품이었던 사다새 기름은 남획 등으로 인해 멸종된 것으로 보인다. '명종실록'에는 '사다새가 평안도에도 희귀했다'는 기사가, '선조실록'에서는 '내의원이 평안도 사다새 기름을 때맞추어 올려보내지 않는다고 하여 글을 내려 독촉하자고 청하였는데, 민폐가 극심할 것이니 아직 하지 말라고 전교했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잡지 '개벽' 제38호(1923년 8월)에 실린 '평북의 산업, 농·공·상·축·임·광'이란 제목의 글에서도 조기를 중요 수산물로 꼽기도 했다.

용천은 교육열이 대단히 높았던 지역이다. 이형근 할아버지의 아버지·어머니도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서당을 거쳐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했다.

"내가 보통학교 들어가기 전 일이야. 아버지가 큰 초가집을 사서 서당을 만들었어. 그렇게 해놓고 중국으로 가셨는데, 서당 선생이 그렇게 무서웠어. 그때는 어머니 분통 덮개에 모래를 담아서 한자를 쓰고 지우고 했어."

경향신문 용천
경향신문 1985년 8월 10일자 12면에 실린 캠페인성 기획기사 '분단40년-다시 가야 할 우리의 산하 ⑩용천'. 용천의 중요 수산물 '조기'를 소금에 절인 뒤 줄에 엮어 말린 굴비 모습이 인상적이다.
김효전(1945년 용천 출생) 동아대 명예교수가 펴낸 '용성지'(龍城誌)를 보면, 용천은 교육열이 대단해 신식 학교도 많았지만, 야학도 번창했다. 일제는 평북 최초로 용암포에 일본인 전용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1915년 용천군의 서당 수는 104개로 평북 내에서 가장 많았으며, 1930년에는 유치원도 설치됐다.

교육열이 높은 이유로는 '기독교 전파'와 '경제적 부(富)'를 들 수 있다. 용천노회(老會, 목사와 장로 대표 모임)가 1928년 평북노회에서 분리돼 신설됐는데, 군(郡)에 하나의 노회가 조직된 곳은 당시 평북은 물론 전국에서 용천이 유일했다고 한다. 그만큼 교회와 교인이 많았다는 얘기다.

용천은 쌀과 소금, 농·수산물이 많다 보니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다. 자녀를 중국이나 일본 등 해외로 유학 보내는 사람도 많았다.

이형근 할아버지는 용골산성(고구려시대 산성)이 유명하다고 했다. 용골산성이 있는 용골산은 아이들의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산에는 더덕과 도라지 등이 널려 있었다. 산세는 험했다.

높이 올라가면, 사람이 못 들어갈 정도로 참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밤에는 산에 사는 '승냥이'와 '삵' 같은 짐승이 마을로 내려와 닭 등 가축을 물어 가기도 했다.

일본의 항복으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지만, 용천 주민들의 고통은 계속됐다. 해방 후 용천에 주둔한 소련군의 수탈이 일본인 못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놈이 착취하고, 해방이 되니깐 마찬가지로 소련이 다 가져갔어. 그래서 해방 다음 해에 기근이 온 거야. 오죽했으면 김일성 장군을 '죽장군'이라고 불렀겠어." '죽장군'은 매일 풀죽만 먹인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란다.

이형근 할아버지는 "우리 용천, 그리고 황해도 재령이랑 연백, 평남 신안주 삼천리벌은 엄청 큰 곡창 지대"라며 "우리나라는 통일이 되면 참 살기 좋은 곳인데, 내 생에는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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