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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4]평안남도 남포 출신 이호섭 할아버지(上)

목동훈 목동훈 기자 발행일 2017-06-22 제9면

총탄세례 속 '바람은 배를 거세게 떠밀었다' 마치 살라는 듯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4]평안남도 남포 출신 이호섭 할아버지(上)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사진/해군 제공

1·4후퇴때 부친 '범선' 타고 가족과 떠나
해주서 南으로 향할때 인민군 추격 당해
우여곡절 끝에 인천 화수부두 정박 불구
곡식 빼앗기고 배는 물자수송 강제 동원
결국 군산서 5년 머물다 '다시 인천으로'

해상 교류 활발 '진남포~인천항~군산항'
부친 뱃일따라 이동 장소만 바뀌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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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생 이호섭 할아버지 고향은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다. 평양의 '관문' 남포항이 있는 항구 도시다.

남포시(1952년 개명), 남포직할시(1979년 〃), 남포특급시(2004년 〃)를 거쳐 2010년에 남포특별시가 됐다. '남포'는 남쪽에 있는 포구마을이라는 뜻이다.



일제가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 군대를 누르고 남포에 상륙했다고 해서 '남포' 앞에 '진압할 진(鎭)'자를 붙여 사용했다. '진남포'는 그러니 일본식 이름이다.

남포항은 1904년 한반도와 만주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충돌한 러일전쟁 때 일제의 군사기지가 되는 아픔도 겪었다.

이호섭 할아버지의 부친은 뱃일을 했다. 80t짜리 화물 수송용 범선(帆船)의 선장이었다. 나무로 만든 돛단배이지만, 당시에는 꽤 큰 편에 속했다고 한다.

"일본 놈이 만든 배야. (해방 후) 그놈들이 놓고 간 건지 이북 놈들이 빼앗은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본 말로 '하시끼'라고 불렀지. 바람으로 간다고 해서 풍선(風船)이라고도 했어."

할아버지는 자꾸 '하시끼'라고 했는데, 이는 거룻배를 뜻하는 일본어 '하시케'(はしけ)가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그렇게 굳어진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거룻배는 '돛이 없는 작은 배'라는 뜻이어서 범선과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

할아버지의 부친은 진남포 앞바다에 외항선이 들어오면, 그 배에 있는 벼와 조 등의 화물을 남포항으로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반대로 남포항에서 바다에 떠 있는 외항선으로 화물을 옮기기도 했다.

당시 대형 선박들은 얕은 수심 때문에 남포항 입·출항이 어려워 범선을 이용해 해상에서 항구까지 화물을 옮겨야 했다.

인천 연중기획 실향민 이호섭 할아버지3

이호섭 할아버지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배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름은 '대동호'였다. 길이는 50~60m이고, 너비는 13~14m, 높이는 3m 정도 됐다. 가운데가 짐을 싣는 자리다. 선수와 선미 안쪽에 침실이 있었고, 조타실은 없었다.

"외항선은 주로 소련에서 많이 왔어. 아버지한테 들은 얘기이지만 범선을 몰고 대동강까지도 올라가고 그랬더라고. 평양에 다녀왔다는 얘기도 들었어."

이호섭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큰 배의 선장이었지만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다"며 "대동호는 북한 정부에 소속된 화물선이고, 아버지는 직원에 불과했다"고 덧붙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고 국군이 끝없이 밀리기만 하자 참전한 유엔군은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었다. 그러나 중공군이 끼어들며 11월 말부터 이듬해 1월 사이 서울 이남 지역까지 철수했다. 이름하여 1·4후퇴다. 이호섭 할아버지가 부친이 몰던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난 게 바로 이때다.

"아버지가 부두에 배를 대고 집에서 식구를 데리고 나왔지. 근데, 부두에 나와 보니까 배에 한 260명은 타 있더라고."

배에는 벼 또는 조를 담은 가마니도 있었다. 배가 사람과 화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금방 가라앉을 것 같았다. "배에서 내리라고 한다고 해서 내릴 사람이 어디에 있어. 그대로 출항해야 했지. 아버지가 벼는 그냥 두고, 조는 바다에 던지라고 하셨어. 그러니 배가 조금 뜨더라고."

이호섭 할아버지는 미국 군함이 황해도 쪽에 정박해 있고, 비행기가 공중에서 빨간색과 파란색 연기를 뿜어냈다고 했다. 이때가 유엔군의 진남포 철수작전이 이뤄진 12월 3~6일 사이였던 듯하다. 국방군사연구소가 1996년 12월 펴낸 '한국전쟁(中)'을 보면, 1950년 12월 초순 진남포에는 평안도 지방 피란민들이 밀어닥쳤다.

이 지역 철수 작전을 담당한 한미 해군은 4일 피란민 중 3만 명은 해상으로, 2만 명은 육로로 철수시켰다.

진남포를 떠난 배는 황해도 해주에 잠시 들렀다. 식수 등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해주를 떠나려고 할 때 인민군을 만났다. 이들은 "곧 전쟁이 끝나니까, 피란을 가지 말고 다시 북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인민군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고 뱃머리를 돌리는 배도 있었다.

"이북 놈 새끼들이 발동선(통통배)을 타고 다니면서 '피란 가지 말라'고 하는 거야. 우리 배에는 돌아가지 말자는 사람이 많았어. 마침 북쪽에서 강한 바람이 불었지."

'대동호'는 이 센 바람 덕분에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배가 남쪽으로 움직이자, 인민군이 탄 발동선이 따발총을 쏘며 쫓아왔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바람이 세게 부니까 (엔진 단 발동선도) 우리를 못 쫓아왔다"며 "바람이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의 목숨을 살렸다"고 했다.

또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배 바닥에 엎드리라고 하고서, 자신은 선 채로 키(배의 방향을 잡아주는 장치)를 놓지 않았다"며 "아버지가 뱃일을 하지 않았으면 우리 가족 모두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고 했다.

피란민을 가득 실은 배는 인천 팔미도까지 왔다. 그곳에 있던 미군 함대가 보트를 보내 '대동호' 내부를 수색하더니 "군산이나 부산까지 가야 안전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오늘은 조류와 바람 때문에 남쪽으로 못 간다. 인천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미군을 설득해 화수부두에 배를 댔다. 남포에서 화수부두까지 오는 데 약 1주일 걸렸고, 화수부두에서는 3~4일간 있었다. 일행 중에는 "고향과 가까운 인천에서 전쟁 끝나는 것을 기다리겠다"며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난 8일 이호섭 할아버지와 함께 그 화수부두 현장을 찾았다. 할아버지는 화수부두 주차장에서 동국제강 인천제강소 쪽을 가리키며 "우리 배가 저쪽 동국제강 쪽에 있었어. 그때는 돌로 축대를 쌓아 놓았지. 물길도 지금보다 좁았던 거 같아"라고 했다.

화수부두에 있을 때, 진남포에서 싣고 온 벼를 군(軍)과 경찰에 징발당했다. 외항선에 실려 소련으로 갈 식량이기 때문에 적군의 재산이라는 게 징발 이유다. 경찰은 벼를 빼앗으면서 "수고했다"며 일부를 남겨 주기도 했다. 군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해군이 배에 남아 있던 벼 가마니를 깡그리 빼앗아갔다.

위협을 느낀 아버지는 "벼를 다 가져가도 좋으니 우리 가족만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대동호'는 군수물자 수송에 강제 동원돼 군산으로 떠나야 했다.

"월미도로 배를 옮겼어. 이것저것 싣더라고. 그러더니 경찰이 우리 배에 탔고, 엔진이 달린 고기잡이배 두 척이 우리 배를 군산까지 끌고 갔지."

인천 연중기획 실향민 이호섭 할아버지2
이호섭 할아버지가 인천 화수부두 공영주차장에서 동국제강 인천제강소 쪽을 가리키며 피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1·4후퇴 때 아버지 배를 타고 고향 진남포를 떠난 이호섭 할아버지는 화수부두에 잠시 머물렀다. 할아버지는 "지금은 매립이 돼서 담으로 돼 있지만, 옛날에는 돌 축대가 쭉 쌓여 있었다"고 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군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아버지는 군산항에서 석탄, 쌀, 휘발유 드럼통 등 해외에서 온 군수·원조 물자를 실어 나르는 일을 했다. 진남포에서 일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군산에서 5년 정도 살다가 인천으로 올라왔다.

진남포에서 해주를 거쳐 인천, 군산에서 다시 인천으로. 한국전쟁 이후 할아버지 삶의 경로는 서해 바닷길과 이어져 왔다.

서해 항구 도시 인천, 진남포, 군산은 과거부터 해상 교류가 활발했다. 그중 인천이 핵심 기지였다. 이 같은 내용은 일본인 저널리스트 가세 와사부로(加瀨和三郞)가 1908년 5월 편찬한 '인천개항25년사'에 잘 나온다.

1890년대 후반 인천과 무역이 가장 활발한 곳은 진남포와 군산항이었다. 가세 와사부로는 이 책에서 "진남포에서 수입하는 것은 대개 인천항이 중재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인천항이 진남포의 중개소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며 "진남포에서 수입·수출하는 각종 화물은 모두 인천항을 거쳤다"고 했다.

또 "지난해(1907년) 군산항과 진남포 부근은 완전히 인천항의 세력 범위로 간주돼 지점 출장소를 설치하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실제로, 인천항 인근에서 선구점을 운영한 일본인 무라타니 기찌조우(村谷吉藏), 무역상 시바타 마고베에(柴田孫兵衛) 등 인천 거류 일본인이 진남포에 지점을 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해운 분야에서는 일본인 호리 리키다로(堀力太郞)가 운영한 '호리상회'를 빼놓을 수 없다. 손태현 한국해양대 명예교수의 글을 엮은 '한국해운사'를 보면, 호리상회는 1897년 기선을 사들여 평양~만경대~진남포~인천~군산을 운항했다.

손 교수는 "철도가 부설되기 전에는 육상교통이 불편했다"며 "인천~군산선, 인천~진남포선은 대량의 세곡 수송량이 있는 항로였다"고 했다. 호리 리키다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을 인천에 설립하고 운영한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의 아들이기도 하다.

신태범(1912~2001) 박사는 저서 '인천 한 세기'에서 "한강수로는 1900년에 경인철도가 개통하기까지 인천항에 거점을 두고 평양, 진남포, 군산, 목표 등 연안해운을 운영하던 호리상회가 독점하고 있었다"며 "호리상회도 경부선(1905년), 경의선(1906년)이 개통하자 해운업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고 했다.

호리상회는 1906년 말 해운업을 폐업했다. 물론 여기에는 러일전쟁에 동원된 자사 선박 여러 척이 러시아 군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승무원이 숨지면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이유도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호리상회는 1910년 2월 일본우선주식회사의 대리점을 맡아 운영하는 등 1912년 초까지 해운업의 끈을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

이호섭 할아버지가 군산에서 인천으로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의 직장이었다. 아버지는 500t급 무동력 철선 '대한호'를 이용해 인천 앞바다에 정박한 외항선에서 대한제분까지 밀을 실어 날랐다.

부친은 남포항, 군산항, 인천항 등 장소만 바뀌었을 뿐 서해 부두에서 배를 부렸다. 이호섭 할아버지가 인천에서 구한 첫 직장은 배를 수리하고 부품을 만드는 철공소였다.

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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