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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6]평안남도 남포 출신 이호섭 할아버지(下)

목동훈 목동훈 기자 발행일 2017-07-06 제16면

피란부터 실향까지 같은 아픔… 인천 정착 '부부의 연'으로

인천 연중기획 실향민 이호섭 할아버지
이호섭(76) 할아버지와 최영애(73) 할머니 부부가 인천 동구 만석동 자택에서 고향 평안남도 진남포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부부는 1·4후퇴 때 각각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피란을 나왔다. 진남포에서는 서로 몰랐다. 양가 부모 소개로 인천에서 만나 결혼했는데, 부모들은 진남포에서 살 때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지산소학교' 다니던 어린 시절 고향 기억
집 앞서 합류해 줄맞춰 등교 '이북 스타일'
과수원서 '진남포 명산물' 사과 따먹기도

한국전쟁 후 마당에 '방공호' 새로 만들어
'최고 명물' 제련소도 빼놓을 수 없는 추억
'동향' 최영애 할머니와 부모 소개로 결혼

외할아버지 돌본다며 北에 남은 둘째누나
아픈 동생 약 구해다 주던 '어머니 같은 분'
美군함에 폭격당하는 마지막 모습 못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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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섭(76) 할아버지 고향은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 비석리(碑石里)다. 남포특별시 남부 '항구구역'에 위치한 도시로, 남포항에서 멀지 않다. 1·4후퇴 시기에 남한으로 피란 왔으니, 10대 이전의 고향 기억이 전부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줄을 맞춰 학교에 갔던 일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집에서 학교까지 한 2키로(㎞)? 멀어야 3키로 정도 된 거 같아. 근데 개인적으로 학교에 못 가.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단체로 줄을 맞춰서 가야 해. 그게 이북 스타일이야."

대문 앞에 나와 있으면 서너 명이 줄을 지어 온다. 대열이 집 앞에 다다르면, 그 속으로 뛰어들어가 줄과 발을 맞춰 학교로 이동해야 한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학교에 거의 다 왔을 때는 학생 수가 10여 명 정도 돼. 다른 곳에서도 (학생들이) 줄 서서 온다"며 "학교 정문 앞에서는 복장 검사를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이호섭 할아버지가 다니던 '지산소학교' 뒤편은 사과밭이었다. 할아버지는 "학교 뒤에 있던 과수원이 우리 것이라고 해서 사과를 따 먹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진남포는 사과가 유명했다. 1934년 7월 30일자 동아일보에 유치원 교사가 그 지방을 소개하는 '유치원에서 본 그 지방이야기'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유치원 교사 박옥향 씨는 "진남포를 사과의 산지라고 누구나 연상하지만 실로 사과가 많다"며 "송림이 자욱하게 들어서고 능금나무가 곳곳에 가득 서서 보기에 퍽 아름답다"고 했다.

남포지역 과수원 면적의 절반 이상은 사과밭이었다. 특히 이호섭 할아버지 고향이 있는 항구구역 등 남부와 중부지역에서 많이 산출됐다. 남포 사과는 알이 크고 맛이 좋아 그 지방의 명산물로 꼽혔다.

'식민지 조선의 이주 일본인과 지역사회'(도미타 세이이치 지음, 국학자료원 펴냄, 2013년)에 진남포 사과 이야기가 나온다. 1905년 일본인이 야마모토촌(山本村)에서 사과 묘목을 가져와 조선인들에게 심게 한 것이 진남포를 사과 재배 산지로 만든 기원이라고 이 책은 설명한다.

비석리는 도시 변두리에 있었다. "비석리는 큰 동네였어. 조금 변두리였지만 시내와 같아. 인천으로 따지면 내가 사는 만석동이랑 비슷해. 도시인데 약간 사이드에 있는 거지."

할아버지가 살던 집은 초가집이었다. 하지만 끼니를 거르거나 풀죽으로 때울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다.

초가집은 일(一)자 모양이었다. 부엌 1개와 방 2개로 돼 있었다. 마당에는 헛간, 장독대, 화장실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나면서 전에 없던 구조물이 생겼다. '방공호'다.

"전쟁 때 마당에 만들었어. 집안 식구들이 다 함께 팠어. 어른 키로 한 키 반 정도는 팠을 거야. 그 위에 통나무를 얹어 놓고 흙 가마니를 높이 쌓았지."

다행히 폭격은 없었다. 그렇다고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폭탄은 안 맞았지만, 미군 '쌕쌕이'(전투기)가 농토 위를 날아다니면서 움직이는 것만 보면 갈겨댔다"며 "미군이 마을 사람을 인민군으로 착각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인민군이 남포 앞바다에 전쟁포로를 빠뜨려 죽이고 달아난 것도 목격했다.

할아버지는 "전쟁 때 선창에 나갔다가 (인민군이) 포로들을 새끼줄로 묶어서 바다에 넣는 것을 봤다"며 "혼자 같으면 헤엄쳐 나올 수 있지만, 열 명 이상을 묶어 놓았으니 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진남포의 자랑거리 중에서는 제련소를 빼놓을 수 없다. 어마어마한 규모 하나로 명물이 된 것인데,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남한의 '평화문제연구소'와 북한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2005년 펴낸 '조선향토대백과'에 따르면 남포에는 일제 침략자들이 대륙 침략을 위해 설치한 군수산업의 부속물이 많았다.

일제는 서해안 일대에서 생산한 쌀을 약탈하기 위해 제분소와 정미소를 설치했다. 유색금속광물 등 지하자원을 빼앗기 위해 제련소, 제강소 등 산업시설도 건립했다. 이들 시설은 남포항 주변에 집중됐다. 배를 이용해 쌀과 광물자원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서였다.

흰 연기를 내뿜는 커다랗고 높은 굴뚝은 아이들에게 신기하기만 했다. "남포제련소가 아시아에서 최고로 크다고 했어. 굴뚝이 얼마나 큰지, 전쟁 때 미군이 굴뚝을 쐈는데, 너무 커서 부러지지 않고 꺾였어."

이호섭 할아버지는 "제련소로 소풍을 간 적이 있는데, 약 40명이 손을 잡아야 에워쌀 수 있을 정도로 굴뚝이 컸다"며 "남포에서는 제련소가 가장 큰 구경거리였다"고 덧붙였다.

이호섭 할아버지의 외조부는 남포제련소에서 일했다. 철판에 도면을 작성하고 제품을 만드는 기술자였다고 한다.

설악산 계조암에 가면 흔들바위를 흔들어 보듯, 남포제련소를 방문하면 굴뚝을 에워싸는 게 코스였다. 이호섭 할아버지와 함께 평남도민회에서 활동하는 강일근(89·평남 용강군 금곡면) 할아버지도 이 같은 추억이 있다.

강일근 할아버지는 "굴뚝이 얼마나 큰지, 국민학생들이 재면 40~50명은 손을 잡아야 굴뚝이 잡힌다"며 "굴뚝이 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흔들린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또 "굴뚝을 한 번 청소하면, 그 사람은 1년 내내 먹고 놀 수 있는 임금을 받는다는 얘기도 있었다"고 했다.

강일근 할아버지는 해방 이듬해 3월 혼자서 38선을 넘어왔다. 강일근 할아버지는 "기독교 가정이어서 그런지 해방 후에 우리 집이 숙청 명단에 올랐다는 얘기가 있었다"며 "아버지가 '여기 있으면 잡혀 죽으니 너라도 살아야 한다'며 나를 이남으로 보냈다"고 했다.

이어 "이북에 남아 있으면 손이 끊기니까 나를 보낸 것"이라며 "부모님을 모시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고 했다.

인천 연중기획 실향민 이호섭 할아버지 트레이드 포춘호
2007년 인천항 1부두에서 북한 남포항으로 출항 준비하는 트레이드 포춘호. /경인일보 DB

이호섭 할아버지 부인 최영애(73)씨도 한국전쟁 때 진남포에서 피란 나온 실향민이다. 둘은 인천에서 양가 부모님 소개로 만나 1966년 결혼했다. 이호섭 할아버지와 최영애 할머니 부부는 피란 과정과 인천에 정착한 시기가 같다.

최영애 할머니도 1·4후퇴 때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피란을 나와 군산에서 살다 인천에 정착했다. 친정아버지는 시아버지처럼 진남포에서 뱃일을 했고, 인천에 와서는 대한제분 일을 했다. 양가 부모들은 진남포에서 살 때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최영애 할머니 고향은 진남포 후포리(後浦里)로, 남편 집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최영애 할머니는 "남편은 변두리, 우리 집은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며 "집 근처에 중국인 학교와 간장공장, 극장도 있었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가 '인천과 서울 거리가 꼭 진남포와 평양 거리 같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했다.

진남포는 '인천의 야구 영웅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1950년 인천고 야구부 감독을 맡아 제8·9회 청룡기 야구대회 우승 등 화려한 성적을 낸 김선웅(1919~1978), 11년간 국가대표를 지내고 삼미슈퍼스타즈 초대 감독을 지낸 박현식(1929~2005)이 진남포 출신이다.

이호섭 할아버지의 부친은 씨름을 잘했다.

"아버지가 씨름 선수는 아니었어. 몸은 호리호리했는데 힘이 상당히 셌어. 손으로 쥐면 풀지 못할 정도였지. 그때는 원정 다니듯이 친구들과 함께 평양, 황해도 등을 돌아다니면서 씨름 경기를 했어."

진남포 출신이면서, 영화 '친구'를 만든 곽경택 감독의 아버지인 곽인완(83) 씨의 회고록 '소의 눈물'에서도 소 싸움 뒤에 이어진 아이들의 씨름 얘기가 실려 있다.

'소싸움이 끝나면 소고삐를 소뿔에 칭칭 감아 소를 산속에 풀어놓고 이번엔 아이들 씨름판이 벌어진다. 씨름이 끝나면 서너 명씩 떼를 지어 산속을 누비며 머루도 따 먹고 개암도 따서 까먹다가 오후 서너 시쯤 되면 이웃 동네 밭에서 콩이나 밀을 서리해 먹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9남매다. 큰누나와 둘째 누나만 함께 피란 나오지 못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둘째 누나의 마지막 모습을 잊지 못한다.

1950년 12월 초, 이호섭 할아버지가 부모님 등 가족과 함께 중공군·인민군을 피해 남포항을 떠나는 날이었다. 둘째 누나는 4살짜리 조카를 등에 업고 멀어져 가는 배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둘째 누나를 배에 태워야 한다며 남포항으로 되돌아가자고 애원했다.

배가 남포항을 빠져나왔을 때 황해도 쪽에 정박해 있던 미국 군함들이 남포항을 향해 포탄을 쏟아부었다. 남포항은 순식간에 뻘겋게 불바다가 됐다. 그 광경을 본 어머니는 정신을 잃었다. 둘째 누나는 몸이 불편한 외할아버지를 돌보겠다며 피란을 포기했었다. 당시 둘째 누나 나이가 23살이다. 출가했던 큰누나도 피란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둘째 누님을 보고 싶다고 하셨어. 내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하자고 한 적이 있는데, '살아 있겠느냐'며 단념하시더라고. 폭격하는 것을 봤으니 그럴 수밖에."

이호섭 할아버지에게 둘째 누나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었다. 이호섭 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머리카락이 빠지는 병에 걸린 적이 있다. 그때는 전염병에 걸리면 일본놈이 수용소로 잡아갔다"며 "둘째 누님이 약을 구해서 사과와 함께 삶아 먹였다"고 했다.

1992년 인천항과 남포항을 오가는 화물선 항로가 개설됐다. 언젠가 사람도 남북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날이 올 것이란 실향민의 기대는 컸다. 그러나 2010년 '5·24 대북 제재 조치' 이후 남북 교역의 해상 통로였던 인천~남포 뱃길은 끊기고 말았다.

■ 평안남도 남포와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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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목동훈기자 mok@kyeongin.com 사진/임순석기자 sse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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