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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76]'無情'에 대하여

경인일보 발행일 2017-07-12 제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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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한국문학의 금자탑인가, 계몽을 가장한 연애소설인가. 엇갈린 평가 속에서도 춘원 이광수(1892~1950)의 '무정'(1917)은 변함없이 우뚝하다. 임화는 '조선신문학사론서설'(1935)에서 '무정'을 행동이냐 순응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표출된 토착 부르주아지의 옹색한 낭만적 이상주의요, "왜곡된 자유의 표현"이라 비판했다.

그럼에도 '무정'은 근대계몽기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최찬식의 '추월색'(1912)과 조중환의 '장한몽'(1913) 등 신파소설 시대를 넘어 근대소설사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기념비적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무정'은 경성학교 영어교사이자 신문학을 공부한 이형식, 개화 선각자를 자처하는 김장로와 그의 딸 선형, 전통적 여인상을 대표하는 박영채, 지사형 선비의 품격을 지닌 박진사, 신문기자 선우선, 박영채의 멘토이자 후원자인 김병욱 등의 인물을 통해 구질서의 붕괴와 문명개화라는 시대적 화두를 다룬다.

개화사상과 근대의식을 전파하겠다는 목적론적 글쓰기를 앞세웠으나 '무정'은 애정과 애증의 삼각관계가 서사의 중핵을 이루는 멜로드라마이기도 하다.



'무정'은 이른바 '과잉의 양식(mode of excess)'과 도덕률의 작동이라는 통속소설의 문법에 의외로 충실하며, 이를 통해서 대중들의 감수성을 적절하게 자극하고 또 위무한다.

파란곡절 많은 영채의 삶을 통해 구현되는 감정의 과잉, 극적인 사건과 운명의 엇갈림 같은 '과잉의 양식'에 권선징악 · 자유연애 · 문명개화 · 근대의식 같은 도덕적 요소를 배치하고 작동시킴으로써 서사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대중적 설득력을 높이는 기제로 활용하는 기민함을 보여준다.

'무정' 한 편으로 당시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이광수는 단숨에 조선 문단의 기린아로 떠오른다.

열한 살 때 콜레라로 양친을 잃고 이집 저집을 떠돌다 일진회(동학의 일파) 일본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육당 최남선 · 벽초 홍명희 등과 함께 조선의 삼대 천재, 곧 동경삼재(東京三才)로 이름을 날리던 약관의 대학생이 일약 조선을 대표하는 문사로 등극한 것이다.

한일병탄, 톨스토이의 죽음, 2 · 8독립선언서 집필과 독립운동의 좌절, 수양동우회의 좌절 등 "강철로 된 무지개"처럼 견고한 역사적 현실 앞에서 야심만만한 식민지 지식청년 이광수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문학을 하는 일, 그리고 대중들의 환호를 받는 명사가 되는 길이었다.

'무정'은 지사이자 문사가 되고 싶었던 대학생 이광수의 열망이 투영된 작품이면서 문학 속에 내재한 예술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개의 충동을 모두 만족시킨 근대문학 혹은 대중문학이었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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