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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신공]선생님이 들려주는 우리고장 역사/1728년 무신 난 '이인좌의 난'

경인일보 발행일 2017-08-01 제17면

평택 지배계층 재편시킨 '조선 최대 모반'

무신 난으로 적몰된 평택시 지산동 진주 소씨 참판공파 묘역
무신 난으로 적몰된 평택시 지산동 진주 소씨 참판공파 묘역 . /한광중 제공

지방 반란군 힘 합치지 못하고 진압당해
진주 소씨·원주 원씨 등 가담 가문 몰락
광산 김씨 비롯한 노론, 권력·터전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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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년(영조 4년) 무신 난은 일명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합니다. 이 난은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과 재지사족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조선 최대의 전국적 모반사건입니다. 난(亂)을 주도한 것은 서울·경기지역의 소론 과격파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일대의 남인과 북인, 변산의 화적 등 매우 광범위했습니다.

반란에 가담한 가문 중에는 반남 박씨, 북인계의 명문 가문들, 진주 이씨, 창녕 조씨, 성삼문과 황희의 후손들처럼 명문(名門)들이 수두룩했습니다. 이들은 영조의 세제책봉과 경종독살설, 영조의 출생의혹을 내세워 영조와 노론정권의 정통성을 문제 삼고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 탄으로 왕을 교체하려 했습니다.

무신 난은 1728년 3월 15일부터 24일까지 전개됐습니다. 반란세력은 서울에서 세(勢)를 규합하고 지방에서 기병(起兵)하며 서울에서 내응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거사는 예정대로 전개되지 못했습니다. 지방의 여러 세력들은 손발이 맞지 않았으며, 거병을 하려 해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막히거나 지연됐습니다.



당황한 이인좌를 비롯한 경기·호서지역의 반란군은 3월 12일 양성과 괴산에서 비밀회합을 가져 이인좌를 도원수, 정세윤을 부원수로 추대하고 우선 진위, 양성 일대에서 군사를 모아 훈련한 뒤 삼남의 길목 청주성을 점령해 세를 규합한 다음 한양을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계획에 따라 3월 13일에는 평택시 소사1동 소사평에서 훈련을 마쳤으며, 3월 15일에는 청주성을 점령했습니다.

이인좌의 경기·호서반란군이 청주성을 점령하자 태인현감 박필현 등 호남반란군, 정희량과 조성좌의 영남반란군도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호남에서는 반란을 눈치 챈 관찰사의 조처로 봉기가 실패했으며, 나주에서는 나주 나씨 세력의 거병도 실패했습니다. 사정은 영남지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남지역에서는 3월 20일 정희량, 이웅좌, 조성좌 등이 영남반란군을 이끌고 거병했지만 관군의 저항에 부딪쳐 추풍령을 넘지 못했고, 북상계획도 관군의 방어와 호남창의군의 저항에 막혔습니다.

상황이 비관적으로 변하자 이인좌군은 호서지역 재지사족들의 호응을 기반으로 도성(都城)공격을 위해 진천과 죽산을 거쳐 안성까지 진격했습니다.

정부가 용인에 거주했던 전 영의정 최규서의 고변으로 반란소식을 접했습니다. 영의정 이광좌를 비롯한 소론 온건파 정부는 서둘러 민심을 안정시키고 병조판서 오명항을 '사로도순무사'로 삼아 정병 2천으로 반란을 진압토록 했습니다.

발 빠른 대응은 소론과격파와 거리를 두고 온건파만이라도 지켜 소론의 공멸을 막으려는 결단으로 이해됩니다. 출병한 오명항의 토벌군은 3월 23일 안성 금광면과 삼죽면 전투에서 승리했고 여세를 몰아 3월 24일의 죽산전투에서 대승을 거뒀습니다.

정부의 발 빠른 대응으로 3월 25일에는 평안병사 이사성이 붙잡혔으며 3월 27일에는 이인좌가 잡혀 참수됐습니다. 조정은 정범(正犯)이 가장 흉참스럽다고 판단한 62명을 노적하고 642명을 역적으로 지목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중앙에서는 소론과격파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약화됐습니다. 한동안 영남 남인세력의 정계진출이 막혔고 노론의 일당전제화가 심화됐습니다. 반란은 평택지역 양반사족층도 양분시켰습니다.

반란에 적극 가담한 덕암산 남쪽의 진주 소씨, 원주 원씨, 전주 이씨, 안동 권씨, 원주 김씨는 몰락하거나 피해를 입었고 후손들도 출세길이 막혔습니다. 반면 반란을 진압한 평택시 진위면 무봉산 일대의 경주 이씨,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해주 오씨, 원곡면 지문리 해주 최씨는 명가의 위세를 지키며 승승장구했습니다.

반란의 중심세력으로 지목당해 가문이 몰락한 진주 소씨의 터전에는 광산김씨와 같은 집권 노론세력이 터를 잡았습니다. 오늘날 평택지역의 대표가문들은 당시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거나 재빠른 수습으로 피해를 최소화한 가문들입니다. 평택지역 지배세력의 재편이 무신 난으로 일어났습니다.

/김해규 한광중 교사

※위 우리고장 역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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