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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광장]마트의 왕국

채효정 발행일 2017-11-08 제12면

공동체는 없고 시스템만 있는 곳
세계가 '마트'를 닮아 가는 듯
모든 게 예측 가능한 질서있는
사회에선 갈등도 분쟁도 없다
평화롭고 안전하다 여기지만
그 곳에서 정치는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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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효정 정치학자·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 나오는 공동생활의 기본 원칙들은 아주 간단한 것이다. 무엇이든 나누어 가져라, 정정 당당하게 행동하라, 물건을 제 자리에 놓아라, 네가 어지럽힌 것은 네가 치워라, 남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땐 미안하다고 말하라, 밖에선 손을 꼭 잡고 서로에게 의지하라 등등. 그 원칙대로 유치원에서 배운 것만 실천하면서 살아도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말도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유치원에 오기 전에 이미 아이들은 사회를 배우고 오기 때문이다. 그 사회 학교는 '마트'가 아닐까 한다. 아이가 어렸을 때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에 놀이 삼아 자주 갔다. 마트에는 온갖 물건들이 쌓여 있었고, 나는 느리게 동선을 이동하며 손가락으로 '사과, 바나나, 귤' 같은 것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마트는 없는 것이 없는 세계였고, 세계의 모든 단어를 배울 수 있는 작은 학교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마트는 우리가 이 세계의 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한,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지도 간섭하지도 않는 곳이었다. 그때 나는 그곳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리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나는 세계의 학교 같은 마트에서 가르쳐줄 수 있는 단어들이 거의 '명사'에 한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트에서 배운 명사의 세계는 곧 상품의 세계였다. 동사는 빈약했다. '사다(buy)'와 '~하고 싶다' 말고는 거의 없었다. 먹고 싶다, 갖고 싶다, 사고 싶다, 사야겠다, 사지 말자 등등. 그걸 깨닫고 나서 나는 이 학교가 무서워졌다. 대형마트는 이 세계가 얼마나 풍요롭고 안전한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교과서였다. 하지만 거기엔 그 세계를 만드는 노동은 보이지 않았다. 물건은 모두 개체로만 존재했다.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열리지만 마트의 사과는 언제나 하나의 사과로서 완전체였다. 모든 것이 그랬다. 관계를 절연한 사물과 존재로 가득 찬 세계.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부딪치지 않고 누구도 서로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철저하게 자기 동선에 따라 각자가 각자의 볼일을 보고 돌아가는 곳.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계산대 앞에선 줄을 서고, 계산원과는 인사도 대화도 없이 계산을 마쳤다. 문제가 생기면 고객만족센터에 가고 물어볼 것이 있으면 옆 사람이 아니라 직원을 찾았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오고 가는 곳이지만 여기서 나는 아무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또 깨달았다. 우리는 유령처럼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사물의 공간 속을 떠돌았다.



마트는 어떻게 이런 질서를 유지하는 것일까. 마트의 지배자는 그 공간에 들어가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마트의 시스템' 그 자체다. 우리에게 줄을 서라고 가르치고, 보는 것은 자유지만 갖고 싶으면 돈을 내라고 가르치고, 남의 카트에 신경 쓰지 말고 제 볼일이나 보라고 가르치는 곳. 마트의 왕국에서 우리는 시스템의 명령과 규율을 따른다. 나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가 이 '마트'를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공동체는 없고 시스템만 남은 곳 말이다. 질서와 안전은 마트의 규율인데 이제 그 규율은 사회 어디서나 공통된 규약이 되었다. 심지어 촛불 광장에서도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질서와 안전이다.

그게 왜 문제인가? 시스템이 지배하는 사회는 민주주의가 패배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모든 시스템이 완벽하게 작동하는 사회는 우발성과 우연성이 삭제된 사회다. 인간의 창의성과 주체성도 발현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 정신은 예측 불가능성과 우연성의 경험에서 자란다. 인간은 다른 존재와 마주치고 부딪치고 섞이는 가운데 자기를 깨고 타자를 만나며 세계를 확장한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질서 속에서 작동하는 사회 속에서는 갈등도 분쟁도 없다. 우리는 그런 세계가 평화롭고 안전하다 여긴다. 그래서 오늘날 저 말은 이미 다음과 같이 바뀌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마트에서 배웠다'로. 그러나 마트가 시민의 학교가 된 곳에서 정치는 사라진다.

/채효정 정치학자·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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