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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면의 장르문학 산책·99]장르문학과 문학적 기억

경인일보 발행일 2017-12-27 제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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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문학-예술은 기억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 문학-예술 모두 기억의 아들과 딸이다. 또 기억은 존재의 집이며, 정체성의 바탕이기도 하다. 프루스트(1872~1922)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도 한 모금의 홍차와 한 조각의 마를렌에서 비롯된 기억들이 만들어낸 소설이다.

김영하(1968~)의 '살인자의 기억법'(2013)은 장르문학 못지않은 무지막지한 가독성으로 우리의 삶과 정체성이 다 시간과 기억의 구성물임을 확인시켜준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다양한 경험과 정보들을 저장했다 회상하고 활용하는 정신적 기능이자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인생의 징검다리다. 우리의 정체성은 자신에 대한 기억과 타자의 기억에 의해 구성된다. 그렇다고 모든 기억이 다 중요하고 정직하며 진실한 것은 아니다.

기억은 매우 충격적이었거나 자신에게 필요하거나 유리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저장하기에 사실과 다를 수 있다. 어쩌면 국경일이나 역사서도 민족주의와 국가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기 위한 문화정치적 기억의 가공물들일 수도 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 김병수의 이야기다. 치매 노인이 된 전직 연쇄살인범 김병수는 또 다른 연쇄살인범 박주태의 마수로부터 자신의 딸 은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시간은 박주태와 망각의 편이다. 기억과 단어가 속절없이 사라져가고, 이야기는 치매 노인의 의식을 통해서 서술된다.

서사는 긴박하나 안타깝게도 그의 진술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치매에 걸린 독거노인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이기 때문이다. 서사는 치매노인의 의식의 흐름과 그의 메모에 의존한 채 조각나 있으며, 진실은 깊은 미궁에 빠져 있다. 답답하고 불편하나 독자는 김병수의 의식과 진술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치매 노인의 망상이었다는 반전은 새삼 문학과 삶과 진실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진실들은 과연 진실한가.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의 의식과 정체성은 자명한 것인가.

얼핏 추리-범죄 문학을 연상케 하는 '살인자의 기억법'은 영화 '주홍글씨'의 원작인 김영하의 단편소설 '사진관 옆 살인사건'(2001)으로 인해 그닥 낯설지 않다. 정유정의 '7년의 밤'(2011), '종의 기원'(2016) 등에서 보듯 이제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가 와해되고 그냥 문학으로 수렴되는 큰 흐름을 목격하게 된다.

문학은 버려지고 방치된 잉여의 기억들을 예술의 이름으로 긁어모으고 축조한 문학적 기억이라는 변학수 교수와 어떤 평가든 특정한 관점에서만 가능하므로 총체적이고 절대적 관점은 없다는 박이문 교수의 글을 보면서 문득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이라는 이항대립의 구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조성면 문학평론가·수원문화재단 시민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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