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몇시간일 터인데 상상의 과거는 며칠씩 흘렀다
"린, 금방 가마" 필립의 쭈그러든 손이 YES에 닿았다
"뉴스 못보셨어요? 사실은, 어제 김진오가 자살했어요"
필립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음을. 아이엠 트립이 선사하는 상상 속의 과거로 들어왔음을. 자각은 어렵지 않았다.
전해들은 대로 모든 감각이 실제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등 뒤로 느껴지는 햇볕의 따스함과,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깬 자신의 심장 소리, 손에 배인 땀, 선명하게 보이는 교사들의 표정, 더없이 뚜렷하게 들리는 울음소리까지.
이보다 현실적일 순 없었다. 필립은 양손을 비벼 땀을 없애며 아이엠 트립은 상상의 여행이 아닌 타임 워프를 가능하게 만드는 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신뢰도 높은 모든 후기들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실제로 바뀐 과거는 없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이는 아이엠 트립 회사 측에서 공식 발표한 주의사항과도 똑같았다.) 그저 얼떨떨해하던 필립이 정신을 차린 것은 탁자 위 공간에 설치해둔 3D 시계를 보았을 때였다. 시계는 오후 다섯 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필립이 익히 알고 있는 순간이었다. 필립은 실제로 과거의 당시에 오후 다섯 시를 막 넘기던 시계를 보며 오십 년의 교직 생활을 떠올렸었다. 그리고 소리쳤었다. 왜 하필이면!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필립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상상의 여행이든 타임 워프든 상관없었다. 어쨌든 자신은 과거로 왔다. 그것도 밤마다 좀 더 괜찮은 과거를 살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하고 후회한 뒤에 돌아온 과거였다. 수없이 상상했던, 좀 더 나은 과거를 만들어볼 기회가 온 셈이었다.
필립은 돌아온 과거 속에서 이번에는 왜 하필이면! 이라는 말을 뱉지 않았다. 대신 철저하게 조사에 응하여 학교 폭력을 일삼은 가해자들을 제대로 가려내기를, 언론에 많이 노출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기를 지시했다.
그리고 교무 회의를 열어 은퇴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남은 교직 생활 동안 학교 폭력을 없애기 위해 학생들 곁에서 최선을 다하겠으며 다른 선생님들도 성실히 돕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과거의 시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현실에서 잠든 시간은 고작해야 몇 시간일 터인데 상상 속의 과거는 며칠씩 흘러갔다.
그 며칠 동안 필립은 죽은 학생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이리저리 발로 뛰었다. 펫스쿨의 교장이 된 뒤 학교에 전념했듯이, 그렇게 애썼다.
그리고 이번에도 학생의 장례식장에 가서 영정 사진을 마주했다. 필립의 입술이 떨렸다. 그 떨림은 상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생생했다. 필립은 매일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던 말을 드디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미안하네. 정말 미안했네."
필립은 눈을 떴다. 동시에 필립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눈물을 미처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자 어느새 장례식장이 아닌 자신의 방이었다. 현실로 돌아온 거였다. 현실인데도 오히려 조금 전까지 머물렀던 상상 속의 과거보다 더 현실감이 없는 거 같았다.
필립은 한참이나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 자신이 새로 만든 과거의 순간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계속 상기시켰다. 기껏 바꾼 과거가 상상에 불과하다니 아무래도 약간의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과거 속에서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
그래도 어쨌든 아쉬움보다는 후련함이 더 컸다.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렇게 말하지 말 걸.' 했던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갔기에. '그렇게 할 걸.' 했던 행동들을 할 수 있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전하고 싶었던 말을 전할 수 있었기에. 필립은 눈물로 베개가 축축해진 것을 느끼며 그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필립이 아이엠 트립에 푹 빠진 건 그때부터였다. 하루에 적어도 하나씩은 먹었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 속에 찝찝하거나 만족스럽지 못한 채로 남아 있던 사건을 다시 찾아갔다. 매일 다양한 시대를 넘나들었다.
어쩔 땐 천구백팔십 년대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부모님께 버릇없이 굴었던 날을 다시 살아보기도 했고, 어쩔 땐 처음으로 민주적 절차를 거쳐 대통령을 탄핵했던 이천십 년대 후반의 어느 날로 돌아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보기도 했다.
또 어쩔 땐 이천삼십 년대 초반에 있었던 세계 여성 혁명의 날에 직접 참여하여 여성들을 비롯한 유색 인종, LGBT 등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행진하기도 했으며, 어쩔 땐 이천사십 년대 초반에 머물며 그때 당시에는 진짜로 성공할 줄 몰랐던 USNS에 과감하게 투자해보기도 했다.
새로 만들어보고 싶은 과거의 순간은 생각하면 할수록 많이 떠올랐다. 필립의 다이어리는 돌아가고 싶은 언젠가의 날들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찼다. 어쩌면 모든 날들을 다시 살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가끔은 상상 속의 과거가 끝나는 아쉬움이 너무 커서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연속해서 아이엠 트립을 먹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어느 쪽이 진짜 현실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필립은 그 모호해진 경계가 마음에 들어 더욱 자주 상상의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리고 필립은 어느 순간 자신의 성격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부탁하지도 않았었고 자신의 잘못을 굳이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필립뿐만 아니라 아이엠 트립을 복용하는 사람들 모두가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을 후회하여 바꾸겠다는 의지였으므로 자주 과거로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상상과 현실과의 경계를 모호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성격은 바뀌는 게 당연했다.
문제는 그렇게 성격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초래한 '새로운 과거'는 아무리 새로워봤자 결국 '상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서 과거 속 후회와 미련과 아쉬움은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현실로 존재할 수밖에 없고 스스로 내적 변화가 있든 없든 자신이 만들어낸 그 '진짜' 삶의 흔적을 언제까지나 떠안고 갈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필립이 이를 인지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처음 교직 생활을 시작한 이천 육년으로 돌아갔던 경험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초보 선생 특유의 서투름과 어설픔으로 저질렀던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실수들을 만회해보고자 필립은 그날도 어김없이 아이엠 트립을 하나 먹고 누웠다.
그리고 가장 만회하고 싶은 기억의 장면을 집중하여 떠올려 당시로 돌아갔다. 몇 번을 겪어도 현실처럼 생생한 감각에 기분이 좋았다. 특히 이렇게 젊은 시절로 돌아가면 젊음을 다시 한 번 누리는 느낌이라 더 좋았다. 그런데 얼추 원하던 대로 상상 속 과거의 일부를 완성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도 필립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를 맞닥뜨리고 말았다. 바로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같은 학교에 근무했던 동료 선생으로 필립이 짝사랑하던 여자였다.
필립은 여태껏 아이엠 트립을 먹고 과거로 돌아갔을 때 새로운 과거를 만들어내는 것과 관련이 없는 다른 주변 환경에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보았을 때, 필립은 교실에 있었고 그녀는 운동장에 있어 둘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었는데도 필립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로 향했다. 거의 습관처럼.
실제로 과거에도 필립은 멀리서 그녀를 몰래 지켜보곤 했었다. 고백할 생각은 없었다. 워낙 혼자 지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 애초에 좋아한다는 감정을 인정하기까지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인정하고 나서도 고백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감당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그냥 짝사랑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딱히 가까워지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가까워지면 더 좋아하게 될 터였는데 예전의 필립에게 그런 감정의 변화는 그리 달가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녀가 너무 빨리 전근을 가버렸다는 점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일한지 일 년 만에 필립은 그녀를 영영 볼 수 없게 됐다.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으니 근무지가 멀어지면 그대로 끝일 수밖에 없었다. 필립은 비로소 조금 후회했다. 자신이 감당하기 싫어 포기한 경우의 수는 어쩌면 자신의 소심함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생각이 들었다한들 필립에게는 뒤늦게라도 연락처를 알아내 친해질 그런 용기마저 없었다.
후회되어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감정이란 건 식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닳아 없어질 거였다.
하지만 상상 속의 과거에서 필립이 우연히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필립은 그 감정이 닳아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월이 흘러 예전처럼 감정의 형태가 견고하지는 않았으나 분명 그것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여전히 특유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은 후회이자 미련이자 아쉬움이었고 또한 그리움이었다.
필립은 그녀와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보고 싶었다. 새로운 과거를 상상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웬만하면 그 새로운 과거 속에서 오래도록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필립은 혼자만의 계획을 세웠다. 아이엠 트립을 이용하여 만들어내는 개별적인 상상의 과거들을 하나의 상상으로 연결시키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중요한 가설 하나를 입증해야 했다. '상상 속에서 바뀐 과거도 자신의 의식 혹은 무의식 아래 저장된 일종의 실제 기억이므로, 아이엠 트립을 통해 실제 과거가 아닌 가짜 과거로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
필립은 제일 먼저 그녀가 전근 가던 날로 돌아갔다. 당시에는 그녀가 동료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필립은 마치 펫스쿨 입학식 때 학교를 빠져나갔던 사라를 찾으러 갈 때처럼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 앞에 서자 정말 현실인 것처럼 그녀의 향수 냄새가 났다. 필립은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달아오른 얼굴로, 하지만 과감하고 당당하게 연락처를 물어보았다. 그녀는 담당하던 학년도 다르고 평소에는 친하지도 않았던 필립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꽤 당황하는 거 같았다.
필립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림도 그녀의 표정에 묻어나는 당황스러움도 무척이나 생생했다. 필립의 '진짜' 기억에 충분히 각인될 만큼. 다행히 그녀는 당황하는 기색을 곧 거두고 미소를 지으며 필립의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입력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초 뒤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서 진동 소리가 났다.
필립은 핸드폰을 다시 건네받고 그녀를 향해 중얼거리듯 말했다. "늘 이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부터 하면 되죠."
필립은 드디어 가설을 입증해보기로 했다. 아이엠 트립을 먹고 자리에 누웠을 때 그녀와 연락을 이어가던 상상 속의 어느 날을 집중해서 떠올리고 또 떠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가설은 옳았다.
아무리 환상이라고 한들 선연한 인상을 지닌 채 의식 속에 각인된 일종의 경험이었기에 필립은 상상 속에서 그녀와 연락을 지속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모든 필립의 개별적 상상이 필립의 의도 아래에서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했던 셈이다.
새로 만들어내기 시작한 거대한 과거 속에서 필립은 실제로 젊었던 필립보다 용감했고 배려심이 있었으며 또한 대범하고 너그러웠다. 물론 종종 원래 필립의 성격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한번은 그녀가 필립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거랑 참 다른 사람인 거 같아." 그 순간 필립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눈을 피해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젊어진 자신의 손이 보였다. 분명 삼십 대의 피부로 돌아왔는데도 왠지 쭈그러든 노인의 피부를 보는 것 같았다.
필립은 천천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 마음은 항상 이랬어."
어쨌든 그렇게 좀 더 괜찮은 성격으로 거듭난 필립은 그녀와 순탄한 연애 시절을 보냈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게다가 예쁜 딸도 얻었다. 필립은 자신의 품 안에서 잠든 딸의 고른 숨소리에 더할 나위 없이 벅차올랐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필립은 천천히 딸의 호흡을 따라했다.
딸이 숨을 들이쉬면 필립도 숨을 들이쉬었다. 딸이 숨을 내쉬면 필립도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한참을 함께 호흡한 뒤 필립은 딸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뺨을 어루만졌다.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필립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필립에게 다가온 그녀가 필립의 뺨에 입을 맞췄다.
필립은 그녀의 가슴에 기대어 잔뜩 목이 멘 채 중얼거렸다. "린. 린이라는 이름이 좋겠어." 언젠가 딸이 있다면 지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름이었다. 이제 필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이엠 트립에 완전히 빠졌다.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매일매일 상상 속의 과거에서 그녀와 린과 함께 지냈다.
심지어 과거의 시간이 흘러가는 방식은 현실과 같지 않아서 하룻밤을 누워서도 여러 계절을 보낼 수 있었다. 필립은 그렇게 상상 속에서 몇 번이나 봄을, 여름을, 가을을, 겨울을 보냈다. 점점 필립에게 현실과 상상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현실로 돌아온 필립은 약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미리 많이 사뒀다고 여겼는데 언제 다 먹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처 정리를 못해 지저분한 책상 위를 서둘러 헤집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남은 약은 없었다. 필립은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왜 하필이면!" 애가 탔다. 상상 속의 과거에서 필립과 그녀는 막 린의 유치원 학예발표회에 함께 가려던 참이었다. 얼른 약을 먹고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그녀와 린이 자신을 기다리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필립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떨리는 손으로 USNS를 켰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며칠 째 결근 중이었기에 대부분 펫스쿨 측에서 온 메시지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메시지를 무시한 뒤 필립은 아이엠 트립 거래처가 내재된 체크인 칩을 USNS에 꽂았다. 곧 자주 가서 익숙한 배경이 3D 화면 속에 펼쳐졌고 '체크인하시겠습니까. YES/NO'라는 문구가 떴다.
필립은 망설이지 않고 화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YES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터치하기 직전, 린이 나중에 자라서 자신에게 최신 기계에 대해 가르쳐주는 모습을 상상했다.
분명 다급했는데도 절로 웃음이 났다. 이제 더 이상 필립은 뭐든 혼자 물고 늘어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린, 금방 가마." 필립의 쭈그러든 손가락이 YES에 닿았다.
거래처는 평소와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다들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거나 무리지어 수군거리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심각했고 자연히 전체적인 분위기도 아주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필립에게는 아이엠 트립을 당장 사는 게 더 중요했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VIP라는 글자가 새겨진 삼 층으로 올라갔다. 언젠가부터 필립은 아이엠 트립의 VIP고객이 되었다. 항상 조금 더 할인된 가격으로 그리고 조금 더 적은 대기 시간으로 약을 사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쩐 일인지 조용해야 할 VIP 전용 층도 아래층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과연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필립은 그나마 덜 바빠 보이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직원은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포터넷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소?" 필립의 물음에 직원은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오히려 본인이 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채 되물었다.
"아, 혹시 뉴스 못 보셨어요?" 필립이 머리를 긁적이자 직원은 설명하기가 조금 난감하다는 듯이 살짝 웃으며 좌우를 살폈다. 그러곤 곧바로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게 사실은, 어제 김진오가 자살했어요."
필립은 김진오, 하고 두어 번 중얼거렸다. 분명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리고 들어본 적 있다고 생각하자마자 필립의 머릿속에 익숙한 구호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김진오를 다시 직장으로!' 그랬다. 이제는 아이엠 트립의 상징적인 인물이 된 김진오, 그가 죽은 거였다. 그래서 아이엠 트립 측에서도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필립은 곧바로 관련된 뉴스를 찾아보았다. 그제야 어리둥절했던 직원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포터넷은 온통 그 사건으로 도배되어 떠들썩했다.
'아이엠 트립 후유증? 김진오 자살의 세 가지 의문점.' '환각제 유통 이대로 괜찮은가.' '아이엠 트립 측, 확실한 증거 없어. 루머 법적 대응할 것.' '반대세력 오늘 저녁부터 다시 집회 열 듯.' 종합해보면 직장으로 다시 복귀한 김진오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계속 아이엠 트립을 복용해왔고 최근 보름 동안 무단결근을 했으며 어제 집에서 자살한 채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한쪽에서는 아이엠 트립 때문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김진오가 보인 일련의 행동에 뚜렷한 인과성이 없으므로 결정적인 원인은 알 수 없다고 반박했다. 필립은 포터넷 상단에 뜬 '김진오의 마지막 영상'이라는 제목을 눌렀다. 누군가와의 영상 통화 기록처럼 보였다. 김진오의 얼굴은 알려진 바와 다르게 굉장히 초췌했다.
다크서클도 짙고 수염도 깎지 않았다. 그런 얼굴을 거칠게 매만지며 김진오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 돈 노 후 아이 엠 애니 모어(I don't know who I am any more).
"평소처럼 처방받으시는 거죠?" 필립은 직원의 말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회사 곳곳에는 '진실은 밝혀진다.'라는 문구가 적힌, 아이엠 트립의 결백을 믿어달라고 호소하는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다. 그러나 회사 측 입장과는 별개로 이런 사건이 생기면 매출은 떨어질 수밖에 없어서 확실히 보통 때보다 손님 수가 훨씬 적었다.
그나마 VIP층은 변화가 적은 편에 속했다. 필립은 조금 전 지나왔던 아래층을 떠올렸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사람들 대부분이 직원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수많은 손님으로 발 디딜 틈도 없었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긴 했다. 필립은 문득, 언제부터 주먹을 쥐고 있었는지 모를 자신의 양 손을 내려다보았다.
평생 부드러웠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거칠고 초라한 노인의 손이었다. 필립은 천천히 주먹을 폈다. 그때였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난데없이 누군가의 절규가 삼 층을 가득 메웠다. 필립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속옷만 입은 한 젊은 여자가 울부짖었다.
"빨리! 빨리 달란 말이야! 지금 당장 가야해……." 여자의 머리는 자다 일어난 것처럼 형편없이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상태가 어떻든 신경도 쓰지 않는 거 같았다. 그저 비틀대며 빨리! 만을 외쳤고 호흡곤란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 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어딘가 아슬아슬하다고 느낄 무렵 여자는 결국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여러 명이 재빨리 여자에게 달려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필립은 자신의 호흡까지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밭은 숨을 거듭 내뱉었고 그러다 불현듯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필립은 흐느끼며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부여잡았다. 사실 필립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끊임없이 노력한다고 한들 앞으로도 오후 다섯 시만 되면 죄책감에 휩싸이리라는 것을. 학생의 죽음보다 자신의 은퇴를 더 걱정했던 과거의 흔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또한 이 세상에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상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그들을 만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있는 힘껏 애를 써 봐도 그녀와 린의 존재는 끝끝내 환상에 불과하리라는 것을. 새로 만들어낸 과거는 아무리 생생하고 뚜렷해도 결국 '만약에'라는 가정 속에서만 성립하는 신기루일 수밖에 없었다.
없어지지 않고 남을 수 있는 건 '진짜' 삶의 흔적뿐이었다. 이제껏 쌓아올렸던 여러 추억이, 그리고 새롭게 바랐던 미래가 필립의 마음속에서 모래성처럼 속절없이 무너졌다. 필립은 괜찮은지 묻는 직원에게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다고 말하기 위해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막 운을 떼려던 차에 누군가가 외쳤다. 이봐요, 호흡하세요! 하나 할 때 들이쉬고 둘 할 때 내뱉으세요! 하나! 둘! 하나! 둘! 다시 필립의 눈길이 여자 쪽을 향했다.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중 몇 명이 하나! 둘! 하나! 둘! 하며 똑같은 박자로 호흡을 유도하고 있었다.
필립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 박자에 맞춰 천천히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나, 둘, 하나, 둘. 그렇게 한참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필립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품 안에서 잠들었던 린의 고른 숨소리를, 린의 호흡을 따라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덧없이 무너진 기억 어딘가에 각인된 더없이 벅차올랐던 그 시간을. 필립은 어쩐지 텁텁한 입 안을 마른 침으로 축이고 또 축였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역시 딱 한 번만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김진오에 관한 뉴스는 계속해서 실시간으로 쏟아지고 있었고 여자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아이엠 트립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예고한 집회 시간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필립은 손을 내밀었다. 직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약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필립은 속으로 직원의 말을 되뇌었다. 즐거운 여행하시길. 그러곤 약 봉투를 든 손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쩐지 제대로 주먹이 쥐어지지 않았다. 필립은 왠지 모를 아득함을 느끼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끝내 오므라들지 못한 주먹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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