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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그들, 3·1운동을 말하다!·(3)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변기재' 선생]사회주의 이력 '주홍글씨' 연좌제 굴레 후손들 쉬쉬

김학석·공지영 김학석·공지영 기자 발행일 2018-02-26 제4면

3.1절
변기재 선생의 일제 감시대상자 카드 전면과 후면. /화성시 제공

수원청년동맹·농민조합 등 활동
일제때 고문·투옥·감시 견뎌내
순용씨, 부친 흔적 찾아 삼만리
"지금의 잣대로 평가절하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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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일흔 다섯인 변순용씨는 7살 무렵의 기억 한 조각을 지금껏 잊지 못한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수원군청에서 별안간 연락이 왔다.

"인민군이 군청에 건국준비위원회를 차렸던 것 같아. 하루는 아버지가 나를 찾는다고 연락이 온 거야. (북으로) 데려가려던 것 같은데, 어머니가 반대했지. '열심히 잘 커라. 건강하게' 이 한마디 하셨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네."

변씨는 평생 아버지 '변기재'를 지우고 살았다. 딱 한번 만난 아버지가 사회주의자로, 월북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버지가 궁금했지만 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게 그 시대에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오산에 살았는데 전쟁 중에 호적이 불타 버렸어. 당시 어머니가 고아원을 했는데 연좌제가 무서워 나를 변 아무개가 버린 고아로 만들었어. 호적에 변기재 아들이면 평생 그 굴레에 갇히니까. 부모가 있는데 고아로 살았어."

해방과 한국전쟁이 지나간 사회에서 '사회주의' 이력은 주홍글씨였다.

"대학을 중퇴하고 취직을 하려는데, 아무 곳에서도 오라고 하질 않아. 형사들이 회사마다 찾아가 뒷조사를 하니까. 내가 '요대상인물' 이래. 한번은 아버지 둘째 형님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는데, 문전박대를 당했어. 빨갱이가 어디를 오냐고."

그래서 원망이 컸다. 변씨는 자녀에게도 아버지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곳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친구 집에서 우연히 '수원문화사연구'라는 책을 봤는데 아버지 이름이 있었어. 책 속의 아버지는 굉장히 훌륭한 분이셨어. 평생을 원망했던 사회주의라는 것도 당시 지식인이라면 관심을 가질만한 것이고." 아버지는 수원청년동맹, 수진농민조합, 오산노동야학원 등 치열한 활동을 했고 일제의 고문과 투옥, 감시를 견딘 독립운동가였다.

변씨는 아버지를 복원하고 싶었다. 어렵사리 변기재의 아들로 호적도 다시 만들었다. 아버지 흔적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나도 늙어서 아버지를 복원하려니 힘에 부쳐. 서훈도 신청했는데, 월북자는 힘들대. 평생 원망만 한 것이 죄송해. 우리 아이들이라도 할아버지를 자랑스럽게 기억하면 바랄 게 없어."

민족문제연구소 이용창 책임연구원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친일경찰에 고통받으며 생계조차 이어갈 수 없어 쉬쉬하며 살았기 때문에 선대가 무엇을 했는지 잘 모른다"며 "식민지 지식인들은 민족의 미래를 위해 다양한 이념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목표는 '해방' 하나 뿐이었다. 지금의 잣대로 그들의 독립운동까지 평가절하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김학석·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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