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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1)]기생조합 권번(券番)

김영준 김영준 기자 발행일 2018-12-14 제9면

우리의 전통예술 빛낸 '자유인들' 대중의 스타로… 바래지 않은 色


조선시대 국가서 궁중의식 음악·춤 등 집중훈련
갑오개혁후 관기 사라지고… 일제하 '권번'으로
공창제 등 이미지 왜곡 불구 일부 '아이돌' 부상
중구 용동권번 출신 장일타홍·이화자 등 유명세
1930년대 민요·가요 레코드 녹음… 재조명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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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기생은 인천기생조합에서 어린 시절부터 기생 공부를 했다. 조합은 권번(券番)이라 했다.

권번에서는 노래와 춤을 가르쳤는데, 평양의 기생학교만은 못 했어도 선생을 앉히고 가르쳤다.

 

지금 용동권번 자리에는 미용사기술전수학교가 들어섰다.

기생조합 시대에 걸출한 포주 최성인이 조합장이 되었었고, 최후의 권번 대표는 낙원 주인이었다. 인천 기생은 수준이 서울보다 낮고, 개성보다는 높았다. 개성은 갑, 을 2종이었으나, 인천에는 을종이 없었다.



그 옛날의 관기보다는 신세대에 속했고, 카페나 바 종사자보다는 틀이 잡힌 예술가였다.

유행 가수로 진출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이화자는 인천 기생으로 '어머님 전상서'를 레코드에 취입했으며, 같은 레코드 가수 장일타홍도 용동권번 출신이었다. -고일 著 <인천석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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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동권번 기생들의 모습. /'골목, 살아(사라)지다' 발췌

조선의 기생((妓生)은 악(樂)·가(歌)·무(舞)·시(詩)·서(書)·화(畵)에 능통한 종합예술인이었다. 그들은 당대 우리 문화예술의 수준을 대변하는 예술가였으며 자유인들이었다.

이들은 궁중의식에서 음악과 춤을 담당했던 관청인 장악원에 소속돼 오늘날 '예술 영재교육'과도 같은 집중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술은 물론, 산술과 해외 문화까지 두루 섭렵했다.

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 당시 나라에서 관리하는 관기 제도가 사라졌으며, 일제는 기생을 춤과 노래를 공연하는 '기생'과 성매매를 하는 '창기'로 구분 지었다.

또한 기생에게 자체적으로 조합을 설립하라는 규정을 만들었으며, 1915년 기생조합은 일본식 표현인 '권번'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생은 독립 자금을 몰래 마련해 전달하고, 지역 학교 신축을 위한 기금 마련 행사에 참여해 쾌척하는 등 신여성으로서의 이미지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조합이 생기면서 이들의 공연 무대는 요릿집으로 한정됐으며, 일제가 만든 공창제도가 더해지며 기생의 이미지는 철저히 왜곡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자부심을 지녔던 기생들은 신분을 숨기고 더더욱 음지로 들어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와 반대 급부로 공연 예술에 능통했던 기생들은 라디오와 잡지, 영화가 보급되면서 '대중 스타'로 급부상하기도 했다.

100년 전 기생의 삶을 떠올리며 인천 중구의 용동권번 자리를 찾았다. 현재 권번의 흔적은 1929년에 만들어진 돌계단과 그 곳에 새겨진 '용동권번(龍洞券番)' 뿐이다.

용동권번 자리
현재 용동권번 계단 모습. (위에서 네번째 철갑을 두른 계단)

비교적 선명하게 음각된 이 글자는 2011년 동사무소에서 계단 보수 공사를 하면서 이 돌계단을 시멘트로 덮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지역 문화계의 요구에 시멘트를 벗겨냈다.

현재 보행 안전 때문인지, 골목길 전체는 붉은색 바닥으로 마감되어 있다. 철판이 덧대어진 위에서 5번째 계단에 새겨진 '龍洞券番'을 볼 수 있는데, 철판이 빛을 가려서 자세히 들여다 봐야 확인할 수 있다.

1920년대로 다시 돌아가 보자. 고 신태범 박사가 쓴 '개항 후의 인천 풍경'에는 인천의 권번에 관한 구절이 있다.

"목로주점과 방술집도 늘어났지만 격이 높은 유흥업소가 등장했다. (미두장의 번창으로) 돈을 벌었다고 마시고, 잃었다고 마시는 것이 술이고, 술에는 으레 여자가 따르게 마련이다. 씀씀이가 크고 돈 출입이 잦은 미두꾼이 늘면서 요릿집과 기생 권번이 생긴 것이다. 일월관, 용금루, 조선각 등이 문을 열고 소성권번이 출현했다."

용동권번은 인천의 옛 이름을 따 소성권번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1930년대 들어 우리나라엔 유행가와 댄스 바람이 일기 시작했고, 앞서 언급했듯이 기생이 대중 스타로 부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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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동권번 기생들의 공연 모습. /'골목, 살아(사라)지다'(인천광역시 刊) 발췌

용동권번 출신 기생에 관한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1935년 8월 1일 발간된 잡지 <삼천리>에 게재된 '삼천리 기밀실'이라는 가십 기사에 인천권번의 장일타홍이 서울 콜럼비아 레코드회사 소속 유행가수로 나와 있다.

현재까지 장일타홍의 출생 연대나 가계, 결혼 등 개인 신상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장일타홍의 노래는 확인된다.

1934~1935년 콜롬비아에서 20곡을 녹음했다. 주로 경기잡가를 비롯한 민요곡이며 가요도 몇 곡 있다.

용동권번 출신으로 이화자도 장일타홍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가수다.

1938년 8월 1일 발간된 잡지 <삼천리>에서 이서구는 '유행가수 금석 회상'이란 글을 통해 "이화자의 신민요는 선우일선에 비하야 선이 굵다. 그 대신 깊은 맛이 있다. 이 점에 이화자의 새로 개척할 길이 있지나 않을까 한다"고 평가했다.

신인급인 이화자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린 것이다.

이화자

가수가 되기 이전이었을 1934년 8월 12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인천지국발로 '인천권번 기생들도 의연금 모집 활동, 홍등 하에서 웃음 파는 그들의 이 가상한 독행!'이라는 기사에서 이화자를 거명하기도 했다.

이화자는 1935년 혹은 1936년 신민요 스타일의 가요 '초립동'으로 데뷔했다고 한다.

1940년까지 해마다 곡을 발표하고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아편에 손을 댄 이후 나락의 길을 걸은 이화자는 1950년에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인천문화재단 CI
지역 문화계 원로인 김윤식 시인은 "기생을 달리 이르는 말인 '해어화(解語花·말을 알아듣는 꽃)'에서 알 수 있듯이 한 송이 꽃으로서 웃음을 팔았지만, 그들은 인천인으로서 분명 우리 음악사를 장식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역사학자인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는 "용동권번과 그 곳에 몸 담았던 인물들로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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