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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음악의 발상지 인천·(14)]한국전쟁기와 그 이 후

김영준 김영준 기자 발행일 2019-01-04 제9면

'이 땅의 시련을 극복하게 해주소서'… 폐허속에 울려퍼진 최초의 '메시아'

2018년 12월 22일 메시아 사진
지난달 22일 저녁 인천 내리교회 예루살렘 성전에서 개최된 '제28회 메시아 대연주회' 공연 현장. /내리교회 제공·경인일보DB

내리교회 성가대, 1954년 '헨델 명곡' 국내 첫 완주
혼란기 악보 필사 열정… 작년 28회째 무대 이어가

인천상륙작전뒤 고향 돌아온 음악가들 '승리 염원'
9·15수복 기념 '개선 대합창' 등 시대반영 연주회
전후 최영섭 등 '애호가협' 중학생 백건우 협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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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메시아 대연주회'가 성탄절을 사흘 앞둔 지난달 22일 저녁 인천 내리교회 예루살렘 성전에서 개최됐다.

내리교회 메시아위원회가 주최·주관한 연주회에선 헨델(1685~1759·독일)이 280년 전에 작곡한 오라토리오 '메시아' 전곡을 선보였다.



김종현의 지휘 하에 150여명으로 구성된 내리교회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3시간 가까이 걸리는 이 대곡을 열정적으로 연주해내며, 성전을 메운 청중의 갈채를 이끌어냈다.

1885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인 내리교회는 한국전쟁 후인 1954년 12월 22~23일 이틀에 걸쳐 우리나라 최초로 '메시아' 전곡을 연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메시아 사진 2
1954년 12월 22~23일 우리나라 최초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전곡을 연주한 후 기념 촬영한 내리교회 찬양대 모습. /내리교회 제공·경인일보DB

내리교회 성가대는 한국전쟁 후에 처한 혼란기에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메시아'를 번역해 전곡을 부르자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사회 전체가 빈곤의 어려움 속에 처해 있었지만, 성가대원인 이선환에 의해 전곡 악보가 3권(총 1천200여권)으로 만들어졌다.

악보는 1954년 2월부터 8월까지 6개월에 걸쳐 등사 원지에 철필로 일일이 그려 등사기에 인쇄해 완성됐다.

악보의 완성 후 성가대원들의 노력으로 그해 성탄절을 앞두고 역사적인 연주회(지휘·김춘하)가 열렸다. 2년 후에 개최된 제3회 연주회에선 후에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는 인천 출신 음악가 최영섭이 지휘하기도 했다.

이후 매해 연주회를 여는 게 여의치 않아지면서 1986년까지 6차례 연주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1989년부터 2004년까지 해마다 이어졌고, 지난해 28회째 연주회를 선보인 것이다.

인천에서 '메시아' 전곡이 초연되기 직전이었던 한국전쟁 시기에도 지역에선 음악회가 이어졌다. 국군과 연합군이 1951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을 탈환한 이후 예술가들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땅을 다시 밟은 음악가들은 국군의 승리를 염원하는 음악회를 개최했다. 시대 상황을 반영한 음악회여서 눈길을 끈다.

메시아 악보
1954년 우리나라 최초의 '메시아' 전곡 연주회에 사용된 악보 전 3권. 6개월에 걸쳐 등사 원지에 철필로 일일이 그려 등사기에 인쇄했다. /내리교회 제공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이 쓴 '6·25 전쟁 속에 꽃 핀 인천 문화예술'에 당시 개최된 연주회에 대해 설명한 구절이 있다.

"음악인들은 해군 인천경비부 정훈실, 인천신보사, 대한신문사(전시판) 후원으로 '전시 합창의 밤'이란 부제가 붙은 '9·15수복 기념 대음악발표연주회'를 1951년 9월 22일 인천영화극장(仁川映畵劇場)에서 연다. 이날 레퍼토리는 최영섭 지휘의 합창 '우리는 국제연합이다(UN 제정)'를 필두로, 김병일의 피아노 독주 '헝가리 광시곡', 테너 백석두의 '라파로마', 장보원의 피아노 독주 '군대 포로네스', 합창단의 '병사의 합창', 박상만의 바이올린 독주 '추억', 합창단의 '해군인천경비부가', '개선 대합창' 등을 연주해 국군의 승리를 염원하고 있었다."

1952년에는 인천시립합창단이 만들어진다. 합창단에 참여한 남녀 음악인들은 대부분 내리교회 성가대원들이었으며 4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휘는 최영섭이 맡았다.

특히 합창단은 창단 이후 시립박물관과 학교, 다방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연주회를 펴면서 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지역에서 열린 연주회에 관한 기록으로는 1953년 1월에 열린 제22회 음악감상회, 4월에 열린 인천시립박물관 재개관 기념음악회 등이다.

전쟁 후인 1956년에는 음악가와 애호가, 은퇴 음악인들에 의해 '인천음악애호가협회'가 창립한다. 협회 산하에 관현악단을 운영했고, 박종성과 주원기, 최영섭을 비롯해 단원은 50여명이었다.

1957년 11월 인천시민관에서 열린 제4차 연주회의 지휘는 최영섭이 맡았으며, 현재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백건우가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의 협연자로 나섰다.

인천애호가협회관현악단은 1957년에도 신인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 신진음악인들에게 기회의 장을 마련해 주기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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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기념관 '자유수호의 탑' 조형물. /내리교회 제공·경인일보DB

한국음악 분야에선 1953년 인천정악원이 창립했다. 창립 2년 후인 1955년에 인천국악원으로 명칭을 바꿨다.

이 글에서도 확인되듯이 1929년 강화도 태생으로 인천에서 음악 활동을 편 최영섭의 이름이 한국전쟁 전후해서 자주 등장한다.

앞선 '해방 이후, 지휘자 임원식'(2018년 12월 28일자 9면 보도)에서 밝혔듯이 최영섭은 고교 졸업 직전이던 1949년 작곡 발표회를 개최했다.

당시 최영섭은 피아노 모음곡과 10곡의 가곡을 선보였다. 이후 서울대 음대㎝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피란 후 인천으로 돌아와서 인천여중·고교 음악교사로 부임한 최영섭은 교사로 활동하면서 구국대학생합창단과 해군경비부 합창단, 인천시립합창단의 지휘를 맡았으며, 인천애호가협회관현악단도 지휘했다.

이렇듯 전쟁 때도 지역 예술인들의 예술에 대한 열망은 꺾이지 않았으며, 최영섭의 경우처럼 새롭게 떠오르는 음악가도 나타났다.

조우성 전 관장은 "인천의 문화예술인들은 전시(戰時)에도 음악 등의 예술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사
인천문화재단 CI
랑하는 가족과 집을 잃고 망연자실하는 시민들과 애환을 같이 했다"면서 "자료의 소실 등으로 한국전쟁 시기의 지역 예술사를 구체적으로 볼 수 없음은 아쉬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그래픽/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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