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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재벌사·93]엘지-1 락희화학으로 출발·(상) '럭키'크림 출시

이한구 기자 발행일 2019-01-29 제17면

일제 향료로 만든 화장품 '전국 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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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그룹의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의 생산 모습. /부산역사문화대전 제공

'화장품 성업' 정보 입수후
'아마쓰 구리무' 판매 호조
처가친척 허준구 경영 참여
제품 직접 제조키로 '결심'
'럭키' 상표로 시작 잘 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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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그룹 창업자 구인회(具仁會, 1907~1969)는 대한제국의 국운이 쇠하던 무렵인 1907년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 362-2에서 300~400석 지기의 중농인 구재서(具再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구인회가 태어난 진양군은 한반도의 동남향, 영남지방의 서쪽에 위치한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할 때까지 경상도 남부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지수면은 진주시의 동북부에 있는데 동쪽에는 방어산(530m)과 괘방산(451m) 줄기가, 북부와 서부 면계를 따라 남강이 흐른다.



남강의 지류들이 곳곳을 곡류하며 이들 하천연안에 평야가 발달했는데 주요 농산물은 쌀과 보리 등이었다.

구인회의 집안은 양주와 파주에 뿌리를 내린 문인집안이었으나 7대조에 이르러 진주로 낙향해 터를 잡았다. 구인회의 조부는 홍문관 교리와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 구인회 '포목상' 첫 사업


구인회는 어릴 때 고향에서 서당교육을 받은 후 서울의 중앙고보에 진학했으나 1926년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서 선배, 동료들과 협동조합을 설립하면서 사업과 인연을 맺는다.

어린 시절 일본인이 소규모 '눈깔사탕' 장사로 시작해 점차 사업품목을 확대, 동네상권을 독점하는 것을 보고 사업을 하기로 했다.

구인회는 부친에게서 2천원(圓)을 받아 1931년 진주에서 '구인회상점'이란 포목상을 열었다. 구인회의 동생인 철회도 1천800원을 투자해 공동 경영했는데 운수사업도 병행했다.

구인회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물자부족을 예견, 광목 2만필을 한번에 사들여 적당한 시기에 되파는 수법으로 8만원이란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1940년 6월 구인회상점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고 어물 및 청과물도 취급했다. 1941년에는 둘째 아우인 정회가 경영에 참여하면서 3형제 공동경영시대를 맞이한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구인회는 구인회상회를 폐업하고 그해 11월 부산 남포동 부근에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당시 부산에는 숯을 난방 및 취사용 에너지로 사용하는 일본식 주택들이 많았는데 목탄은 일본 대마도에서 생산됐기 때문에 이를 수입해 판매할 목적으로 회사를 만들었다. 경남도청으로부터 화물차 30대를 사들여 운수업과 포목상도 겸했으나 사업은 신통치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둘째 아우 정회가 화장품 제조업체에 직원으로 근무하는 부산 흥아화학공업사의 김준환을 만났다. 당시 이 회사의 생산직 사원이었던 김준환은 정회에게 화장품사업이 성업 중이란 정보를 제공했다.

구인회 형제는 흥아화학에서 생산한 여성용 기초화장품인 아마쓰 구리무(크림) 판매사업에 착수했다. 이 무렵 구인회의 처가 친척인 허준구와 셋째 아우 태회도 경영에 참여한다.

허준구는 구인회의 장인과 6촌간인 허만정의 셋째 아들이자 철회의 사위로 당시 24세였다. 허만정은 일제시대에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진주여고를 설립한 지수면 승산리의 만석꾼이었다. 허준구는 일본 동경의 관동중학을 졸업하고 1943년에 귀국해 고향에서 면서기를 역임했다.

>> 1947년 부산에 공장 설립

구인회 등은 흥아화학에서 화장품을 공급받아 서울에서 판매했다.

흥아화학이 부산지역 판권을 장악한 탓이었다. 아마쓰 구리무에 대한 서울 소비자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호황을 누렸다. 화장품의 판매마진은 30% 정도였는데 판매가 호조를 보이자 구인회는 화장품을 제조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화장품판매로 비축했던 자금과 고향의 전답을 처분해 3천만환을 마련해 1947년 1월 5일 부산에서 락희(樂喜)화학공업사를 설립했다.

사장은 구인회가, 부사장은 철회가, 허준구는 판매를 그리고 화장품제조 기술자인 김준환을 스카우트해 생산을 전담케 했다. 공장은 서대신동에 있는 구인회의 집에 마련했다.

감화조를 비롯 감화한 원료를 처리하는 방치선반과 압착여과기, 향료혼합조 등을 설치했는데 생산 초기 직공은 20여명 내외였다.

락희화학에서 생산한 제품에 '럭키(lucky)'라는 상표를 붙여 출시했는데 잘 팔렸다. 당시 전국의 화장품업체는 20여개로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다.

화장품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구인회는 1949년에 장남 자경을 경영에 참여시켰다. 1925년 진양에서 출생한 구자경은 1945년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5년간 교사생활을 하다 가업에 합류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기간 일제 화장품이 대거 밀수돼 국내 화장품 메이커들이 고전했다. 당시 이승만 정부가 일본과의 일체 외교관계를 단절함으로써 국내에서 일본과의 모든 경제교류는 불법이었다.

국내 메이커들은 대체수단으로 선호도가 떨어지는 중국산 향료를 수입해 화장품을 제조했다. 락희화학은 중국산 향료보다 50% 정도 저렴한 일제 향료를 수입해서 제조한 결과 '럭키'크림이 전국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이한구 경인일보 부설 한국재벌연구소 소장·수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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