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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 인천·(26)]황어장터 만세운동 주역 심혁성

김주엽 김주엽 기자 발행일 2019-09-05 제15면

"독립운동 이유로 혜택받을 생각 마라" 그 강직함이 주민들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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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계양구 장기동에 있는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전경. 인천 계양구는 매년 3월 1일 이곳에서 3·1 운동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인천 계양구 제공

만세함성 가득한 1919년 3월 손병희 지시받아
천도교·기독교인 규합 24일 600명 태극기 들어
경찰과 대치중 '이은선' 숨진 탓 저항감 치솟아
문학동·남동·월미도 시위 등 지역 활동 '밑거름'
출소후 재산 팔아 빈민 돕는 등 평생 이웃 챙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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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서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월 24일.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현 인천시 계양구 장기동)에선 당시 대표 우(牛)시장인 황어장이 열렸다.

오후 2시가 되자 한 청년은 옷 속에 숨겨 둔 태극기를 펼쳐 들었고, 장터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태극기를 꺼내 들며 '조선 독립'을 외쳤다.



인천 내륙지역에서 벌어진 가장 큰 독립운동인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심혁성(1888~1958)이다. 어린 시절 한학을 배웠지만, 농사를 지으며 살던 심혁성은 3·1 운동이 들불처럼 번질 때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조선 독립을 외쳤다.

심혁성은 1888년 계양면 오류리(현 계양구 오류동)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을 진행하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만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그의 재판기록에 따르면 심혁성은 독실한 천도교도로 생활했다. 1910년대 천도교는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일본에 처절하게 항거한 천도교는 국권이 침탈된 1910년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총대표는 천도교도였던 손병희(1861~1922)가 맡았으며,

독립선언문도 천도교 교단이 운영하던 '보성사'에서 인쇄돼 전국으로 배포됐다.

심혁성이 살던 계양·부평 지역에는 1900년대 초반 천도교가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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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천도교 기관지 '천도교회월보'는 1914년 4월 15일 발간한 기사를 통해 "'부천군' 교구는 설치한 지 십 년에 교호가 수십호에 지나지 못하고, 또한 모두가 빈한한 까닭에 교구실을 작만티(장만하지) 못함으로 일반교인이 근심하는 바이더라"라며 당시 이 지역 천도교 전파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한다면, 1914년이면 천도교 부천군 교구가 만들어진 지 10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던 셈이다. 부평교구는 부평군 서면 신대리(현 계양구 서운동)에 강습소를 운영했는데, 심혁성도 이곳에서 천도교도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월 전국은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 함성으로 가득했다.

인천에서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 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면서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8일에는 인천 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다수 배포됐고, 이튿날인 9일에는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모여 만세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기도 했다. 3월 중순부터는 강화 지역 곳곳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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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심혁성은 손병희의 지시를 받아 3·1 운동을 은밀히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부천군 계양면 지역의 천도교·기독교인, 농민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알리고 이들을 규합해 나갔으며, 만세운동 장소로 황어장터를 정했다.

매월 음력 5일에 열리던 황어장터는 부천군 지역의 가장 큰 시장 중 하나였다.

조선총독부가 1924년 발간한 '조선의 시장'에선 "경기도 부천군에는 2곳의 시장이 있는데 한 곳은 소사리에 있고, 나머지는 장기리에 있다. 이들 시장에는 1곳당 평균 이용인구가 1천~2천명에 달한다"고 설명할 정도로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당시 시장은 일본의 감시 속에서도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였다. 이 때문에 시장을 중심으로 3·1 운동이 진행된 경우도 많았다. 경기도 화성에서는 '발안장'을 중심으로 3·1 운동이 벌어졌고, 평택에서는 '시강장터'가 만세운동의 장이 되었다.

일본 경찰은 황어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19년 3월 27일 자 신문에서 "강화도의 소요가 도화선이 돼 그다음에 접근된 김포도 일어났고, 다시 그 동네와 인천경찰서 관내의 경계선 되는 부천군도 불온의 형세가 있으므로 인천경찰서에서는 만일의 경비를 위해 순사부장과 순사 2명을 부내주재소(부평주재소)에 임시 응원을 파견했다더라"고 썼다.

심혁성의 재판 기록을 보면 당시 부내주재소에서 근무하던 순사 2명은 24일 아침부터 황어장터를 순찰하고 있었다.

일본 경찰의 경비도 계양 지역 주민들의 독립 염원을 꺾지는 못했다. 오후 2시가 되자 심혁성을 비롯한 600여명의 군중은 품 안에 태극기를 꺼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조선총독부가 일본 정부에 보고한 문서에선 "계양면 장기리에 장날을 맞아 구한국기(태극기)를 앞세우고 약 600명의 군중이 운동을 개시했다"고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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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혁성의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일본 경찰이 이날 황어장터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심혁성은 만세 운동을 시작한 지 3시간 만인 오후 5시께 경찰에 붙잡혔다.

이를 본 주민 수백명은 '심혁성을 내놓아라'고 외치며 일본 순사들을 포위하고 주먹으로 경찰들을 때리는 등 거세게 저항했다.

이에 순사들은 칼을 빼 들고 군중을 향해 휘둘렀고, 대열의 선두에 섰던 이은선(1876~1919)이 칼에 맞아 숨지는 등 주민 여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당시 인천경찰서에서 파견 나온 순사는 "면사무소에서 시장을 거쳐 약 3정(町·약 330m)의 지점에 이르렀을 때, 약 200명이 뒤따라오며 '붙잡아라, 붙잡아라'하고 저마다 입으로 큰소리를 지르고 우리 일행 6명을 포위해 심(심혁성)을 빼앗아 가려고 폭행을 시작해 약 10분이 지났을 즈음 심을 묶었던 포승을 끊고서 심을 둘러메고 약 8간(間·약 14m)을 탈거해 사방에서 돌을 던지므로 칼을 뽑지 않으면 심을 탈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경찰관 일행이 위험 상태에 빠져 막을 길이 없기에 칼을 뽑아 방어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이은선의 죽음을 본 주민들의 저항감은 더욱 불타올랐다. 이날 밤 주민들은 친일파로 지목된 면서기의 집을 부수고, 일제의 침략 말단기구였던 계양면 면사무소를 파괴했다.

또 주민들은 임학리와 용종리, 병방리, 박촌리의 민적부와 과세호수대장 등 면사무소 내 주요 서류를 불태웠다. 주민들은 심혁성을 포함한 만세운동 중심 인물이 대부분 구속됐음에도 이튿날인 25일 300여명이 면사무소 앞에 모여 힘차게 만세를 외쳤다.

천도교와 기독교인이 합심해 이뤄낸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27일 문학동 시위, 28일 남동 시위, 4월 1일 월미도 시위 등 인천지역에서 벌어진 다른 만세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심혁성을 포함한 황어장터 만세운동 주동자 주민 40여명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심혁성은 1919년 10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 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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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내부 전시실 모습. /인천 계양구 제공

1920년 출소한 심혁성은 논과 밭, 집을 팔아 생필품을 장만해 장터에서 빈민들에게 나눠주고, 전국을 떠돈 것으로 알려졌다.

1927년에는 함경도에서 중국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아 활동했고, 1937년 이후에는 충남 공주와 강원도 영월 등지를 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하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 이후 인천으로 돌아온 심혁성은 1958년 12월 인천시 계양구 백석동에서 7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계양구는 2004년 황어장터가 있던 자리에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을 세웠다. 이곳에선 매년 3월 1일 심혁성과 주민들의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심혁성은 평생을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왔다. 일본의 삼엄한 감시 속에 피신생활을 하는 중에도 어려운 이웃을 먼저 생각했으며, 자신도 물론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생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심혁성의 손자 심현교(67) 씨는 3일 경인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에도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혜택받지 마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로 매우 강직한 사람이었다"며 "해방 이후에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옷을 다 벗어주고 집에 올 정도로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못했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이어 "강직하고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성격이 할아버지가 3·1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주엽기자 kjy8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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