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가기

[독립운동과 인천·(28)]신간회 인천지회

박경호 박경호 기자 발행일 2019-09-26 제15면

左右를 넘어 민족의 이름아래 일제에 함께 맞서다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아이클릭아트

사회·민족주의 협동… 1927년 12월 5일 지회 창립
지역 인사 곽상훈·하상훈·권충일·이승엽 등 참여
식민지 정책 비판 강연… 원산 총파업 뭍밑지원도
유두희 등 노동운동… 간부들 청년단체활동 주도
합법행동 제약·계열 갈등 심화 1931년 해소 결의


2019092501001763200086226
1927~1931년 활동한 신간회(新幹會)는 비록 존속 기간은 짧았지만,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가장 강력했던 합법적 사회단체였다.

신간회는 사회주의계열과 민족주의계열이 힘을 모은 항일 민족협동전선이었다.

 

신간회의 지방 지회조직은 한때 150여 개까지 확산했고, 회원 수는 4만여 명에 달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신편 한국사'는 "양 세력의 협조와 협동 경험은 해방 이후 남북 분단이 계속되는 현재에도 귀중한 역사적 경험으로 역할할 수 있을 것" 이라며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이 만나 최대의 협동을 이뤘으나, 이후 양 세력 분열의 원형을 보여주는 신간회에 대한 검토는 남북이 분단된 지금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평가했다.



인천에서도 1927년 12월 신간회 인천지회가 창립하면서 좌익 진영과 우익 진영 인사들이 합세해 항일 사회운동을 펼쳤다. 

 

인천지역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곽상훈(郭尙勳·1896~1980), 하상훈(河相勳·1891~1964), 서병훈(徐丙薰·1888∼1949), 이범진(李汎鎭), 양제박(梁濟博) 등이 신간회 인천지회를 주도했다.

인천금융조합
1927년 12월 5일 신간회 인천지회 창립대회를 개최한 인천금융조합 건물. /인천시 역사자료관 제공

당시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유두희(劉斗熙·1901~1945), 고일(高逸·1903∼1975), 권충일(權忠一·1905 또는 1907~1950), 권평근(權平根·1900~1945), 이보운(李寶云) 등이 신간회 인천지회의 주축이었다.

해방 후 북한 초대 사법상을 지낸 거물급 공산주의자 이승엽(李承燁·1905~1954)도 신간회 인천지회 간부로 참여했다.

동아일보 1927년 12월 8일자 신문을 보면, 신간회 인천지회 창립대회는 그해 12월 5일 오후 8시 내리(內里)의 인천금융조합에서 개최됐다.

입회 회원 67명 가운데 36명이 참석했다. 창립대회 준비위원 곽상훈이 개회를 선언했고, 신간회 중앙본부에서 파견한 독립운동가 이관용(李灌鎔·1894~1933)이 개회사를 했다.

이날 신간회 인천지회 회장은 하상훈이 선출됐고, 총무간사는 곽상훈과 유두희 등이 맡았다. 지회 사무실은 율목동 인천무도관(仁川武道館)으로 정했다.

왜 신간회 인천지회 사무실을 인천무도관에 뒀을까. 인천 향토사학자들은 인천무도관 사범 유창호(柳昌浩)가 신간회 인천지회 간사로 참여했고, 한용단을 이끌었던 곽상훈 등 지역 스포츠계 인사들이 인천지회 핵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유도, 검도, 권투 등을 지도한 인천무도관은 지역 청년들이 몰려 신간회 참여를 독려하기 유리했고, 당시 스포츠는 민족의식을 키우는 활동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신간회 중앙본부가 1927년 1월 창립할 당시 확정한 강령은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 단결을 견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등이다.

전국 각 지역에서는 강연운동이 활발했다. 강연은 신간회가 민족운동의 당면과제로 삼았던 '농민 교양', '경작권 확보', '조선인 본위의 교육 확보',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획득 운동', '협동조합 운동 지지·지도'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일제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면서 사회 각 분야 민족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인천지회는 전국에서 시국강연회와 계몽강연회를 가장 활발하게 개최한 지회 중 하나로 꼽혔다. 하지만 인천지회의 구체적인 활동은 관련 문서나 언론 보도 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현재까지도 신간회 인천지회 관련 연구 성과가 드문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신간회 인천지회가 조직되기 전까지 인천지역에서 비슷한 역할을 했던 단체인 신정회(新正會) 관련 보도에서 신간회 활동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동아일보 1927년 6월 9일자 신문을 보면, '계급과 파벌을 타파한 전 인천적 집적단체'를 표방한 신정회는 1927년 6월 6일 창립총회를 열고 출범했다.

위원장은 하상훈이었고, 곽상훈, 고일 등 이후 신간회 인천지회 설립을 주도하게 되는 좌우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신정회 강연 성황'이라는 제목의 1927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신정회가 홍예문 인근에 있던 인천공회당(仁川公會堂)에서 강연회를 개최한 내용이 실렸다.

청중 6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강연회에서는 김준연(金俊淵·1895~1971)이 연사로 나서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의 관계'를 주제로 강연했다.

김준연은 동아일보 주필을 지내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 때 사임한 독립운동가다.

신정회는 같은 해 10월 9일 인천공설운동장(웃터골경기장)에서 '인천시민 대운동회'를 주최했는데, 동아일보는 1927년 10월 11일자 신문에서 시민 6만 명이 운집했다고 썼다. 이때 종목 중 하나였던 월미도 일주 마라톤에만 150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인천공립보통학교
인천의 첫 공립학교인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 신간회 인천지회 회원 중에는 이 학교 출신이 많았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제공

또 신정회는 1927년 9월 중국 선원들이 덕적군도에 있는 악험도(惡險島·현 선미도)를 습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진상조사를 위해 신정회 위원인 서병훈을 파견하기도 했다. 신정회의 후신 격인 신간회 인천지회도 이 같은 성격의 활동을 계속했을 것으로 보인다.

신간회 인천지회는 1920년대 최대 규모 노동운동인 '원산 총파업'을 물밑에서 지원했다.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일어난 원산 총파업은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54개 노동조합 조합원 2천200여 명이 참가했다.

1928년 9월 함경남도 덕원군의 라이징선(Rising Sun) 석유회사에서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유조공을 구타한 사건이 있었는데, 노동자 120명이 감독 파면과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파업한 것이 총파업의 발단이었다.

일본인 사업주들이 중심인 원산상공회의소는 파업을 무력화하기 위해 인천에서 노동자 200여 명을 데려와 취업시켰고 어용노조도 조직했다.

인천에서 극우단체인 일본국수회(日本國粹會) 회원들이 원산으로 파견돼 노동자들을 위협하기도 했다. 인천에서 온 노동자들은 원산의 상황을 깨닫고 파업에 동참하기도 했다.

신간회 인천지회는 원산으로 향하는 인천 노동자들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연설활동을 했다. 1929년 1월 25일 곽상훈, 권충일 등 4명이 거리에서 연설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20여 일 동안 인천경찰서에 구류됐다.

유두희, 권평근 등은 인천지역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신간회 인천지회 간부들은 여러 청년단체 활동도 주도했다.

신간회 인천지회 관련 자료를 모아온 향토사학자 이성진 골목문화지킴이 대표는 인천지회를 통해 좌익과 우익 인사들이 결집할 수 있었던 요인을 지연과 학연으로 봤다.

이성진 대표는 "신간회 인천지회 주요 인사들은 '인천 출신', '강화 출신', '영화학교(영화초등학교) 출신', '인천공립보통학교(창영초등학교) 출신'으로 서로 얽히고 묶였다"며 "이념이 다를지라도 한데 뭉쳐 활동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라고 분석했다.

일제는 그 영향력이 점점 커진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인천경찰서도 1930년 2월 12일 예정됐던 신간회 인천지회 정기대회를 금지했다. 2년 전까지도 인천지회는 같은 시기 문제없이 정기대회를 개최했었다.

신정회
'신정회 강연 성황'이라는 제목의 1927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제공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창립 4년 4개월 만에 해소(解消)됐다. 

 

합법적 단체로 적극적인 항일운동에 제약이 많고, 좌우 계열 간 갈등도 심해졌기 때문에 지회별 해소가 이어졌다.

인천지회는 1931년 2월 10일 해소를 결의했다. 해소진행위원은 권충일, 유창호, 곽상훈이었다. 앞서 유두희는 1928년 7월 일제의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옥에 갇혔다.

이균영 동덕여대 사학과 교수가 1993년 쓴 '신간회 연구'에 실린 인천지회의 해소안 성명서를 보면, "주체성이 확대된 노동계급의식의 앙양으로 그 조직체의 결함과 오류를 인식하게 됐다"는 내용이 중심이다.

신간회 인천지회의 해산을 주도한 것은 화요회계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세력이었다.

그러나 이균영 교수는 인천지회에서는 민족주의계열인 곽상훈이 적극적인 해소론자로 구성하는 해소진행위원에 포함됐다는 점에서 타 지회처럼 우익 진영이 신간회 해산에 반대했다는 설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신간회 인천지회의 주역들은 해산 이후 각자 속한 노선에서 활동하며 갈라섰다.

전향한 뒤 일제에 협력한 몇몇 인사도 있었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꾸준히 전개한 권평근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입항하는 미군 환영 인파 속에 있다가 치안 유지를 내세우며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곽상훈, 하상훈, 양제박 등은 해방 이후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서병훈의 아들인 서정익(徐廷翼·1910∼1973)은 인천 동양방적의 유일한 한국인 기사였는데, 해방 이후에도 동양방적공사 이사장을 지내다가 1955년 인수해 동일방직을 설립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경인 WIDE

디지털스페셜

디지털 스페셜

동영상·데이터 시각화 중심의 색다른 뉴스

더 많은 경기·인천 소식이 궁금하다면?

SNS에서도 경인일보를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