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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던 '양심의 등불' 꺼졌다

김영준 김영준 기자 발행일 2020-02-06 제17면

'초대 인천교구장 41년 헌신' 나길모 굴리엘모 주교 선종

나길모 주교1
천주교 인천교구의 초대 교구장을 지낸 나길모 굴리엘모 주교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인천 답동성당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경인일보DB

부친 임종 못지키고 인천에 열정 쏟아
빨갱이 몰려 고초… 10일 답동 위령미사

천주교 인천교구 초대 교구장을 지낸 나길모 굴리엘모 주교(미국명·윌리엄 존 멕노튼)가 지난 4일 오전(우리시간) 선종(善終)했다. 향년 93세.

한국전쟁 직후 태평양을 건너 우리나라에 와 선교활동을 한 나 주교는 34세의 젊은 나이로 1961년 6월 6일 초대 인천교구장에 임명됐다.

이후 41년 동안 교구장으로 일한 나 주교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걱정하고 인천을 사랑했다. 1964년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인천에 열정을 쏟은 나 주교는 이듬해 6월 인천시로부터 명예 시민증을 받기도 했다.

나 주교는 군사정권 시절, 노동자들에게 꺼지지 않는 '양심의 등불'로 기억되고 있다. 1976년 일어났던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직·간접으로 지원하다 당국으로부터 '빨갱이'로 몰려 모진 고초를 겪었다.



매일 이어지는 형사들의 감시와 극우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군사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그는 양심을 지키려는 신부의 신념을 꺾지 않았다.

나 주교는 당시 상황을 "이 정부가 왜 이렇게 쓸데 없이 혈세를 낭비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는 2000년께 언론과 인터뷰에선 인천의 공해가 심해졌다는 말을 했다. 시민의 건강이 걱정된다면서 말이다.

"인천항에 처음 들어오면서 바다에서 본 인천의 첫 이미지는 맑고 깨끗한 하늘이었는데, 요즘 유람선을 타고 인천 하늘을 보면 희뿌연 오염층이 온통 하늘을 뒤덮고 있습니다. 40년 동안 인천에서 생활하면서 현재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해입니다. 깨끗한 인천 하늘을 다시 보았으면 합니다."

나 주교는 2002년 5월 최기산 주교에게 교구장 자리를 넘겨주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장남인 자신을 대신해 고향에서 평생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여동생(루스 멕노튼)과 여생을 함께 하기 위해서였다.

평소 근검한 생활로 신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나 주교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 가진 것이라곤 사제양복 세 벌과 책 50여권, 부모님이 선물해준 성작, 십자가 등이 전부였다고 한다.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사람 같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절제와 양심을 한 번도 저버리지 않은 나 주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가슴 속에서 영원히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

분향소는 천주교 인천대교구청 보니파시오대강당이며, 위령미사는 오는 10일 오전 10시30분 인천시 답동 주교좌성당에서 열린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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