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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합시다-경인지역 두 항만 이야기]백제때부터 자리잡은 인천항…30년만에 급부상한 평택항

공지영 공지영 기자 발행일 2020-12-28 제14면

경인일보 통큰기사 '인천항 평택항-황해를 넘어 세계로' 지면들. /경인일보DB

인천항, 1883년 개항·갑문식 조성
한국전 파괴 극복 '국내 2위 역할'

평택항, 中개방으로 상업항 발전
車산업과 연계·동남아 전초기지


경인일보 인천항 평택항-황해를 넘어 세계로1
항구는 예부터 세계로 나가는 문이었습니다.

바다의 끝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믿음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떠나는 모험을 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모험은 그 믿음을 확신으로 만들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모험을 감행하며 비로소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바다 건너 새로운 세계로 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모인 곳, 그곳이 바로 '항구'입니다.



경인지역에도 큰 항구가 2곳이 있습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인천항과 신흥 강자로 떠오르는 평택·당진항(이하 평택항) 두 곳입니다.

인천항은 한반도와 중국을 둘러싼 황해와 맞닿아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백분 활용했습니다. 그 역사는 '백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백제 전성기였던 근초고왕 때 중국과 교류하기 위한 해상교통로 역할을 해왔습니다. 인천에서 출발해 덕적도를 거쳐 중국 산둥반도에 이르는 '등주항로'가 그것입니다.

인천이 항구로 주목받게 된 건 개항이 이뤄진 1883년입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인데, 조선을 통해 대륙에 진출하려는 일본의 강요로 시작됐습니다.

인천항은 조수간만의 차가 커 썰물 때 대형선박의 접안이 어려워 일제강점기인 1918년 최대 4천500t급 선박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갑문식 제1선거(dock)가 만들어지며 단점을 보완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제강점기의 인천항은 전쟁 물자를 실어나르는 전진기지의 역할과 함께 국제항구로 성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항만시설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고 현재 국내 2위 항만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평택항은 1980년대 말 개발이 추진돼 1992년 중국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한중수교가 활발해지며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개발 초기 근거리 인천항의 대체재 정도로 여겼던 평택항은 자동차 산업이 발달한 배후지역 산업과 연계되며 독자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상업항으로 발전했는데, 그 덕에 현재 자동차 전용부두가 생겼고 총 64개 선석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중국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항만에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천항의 경우 새롭게 개발된 신항에 물동량이 쏠리면서 기존의 남항이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문제가 떠올랐습니다. 물류의 흐름이 다양화되는 만큼, 항만별 물류 특성을 반영해 기능을 새롭게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입니다.

30여년만에 빠르게 성장한 평택항 역시 관리주체가 분산돼있어 국제항으로 발돋움하는데 동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습니다.

국가 주도로 운영되는 인천항과 달리, 평택항은 경기도와 평택시 등 지방정부를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관리주체는 물론, 재정적 한계도 커 화물유치 경쟁, 항로발굴 등 미래를 도모하는 발전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경인일보는 인천항과 평택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아 12월 통큰기사로 '인천항 평택항-황해를 넘어 세계로'를 보도했습니다. 그간 항구에 대해 잘 몰랐던 친구라면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다 함께 기사를 읽어보고 인천항과 평택항의 미래를 고민해 봅시다.

/공지영기자 jyg@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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