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땅에 돌아와…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과 만났다"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 |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에서 지내는 황예순(81) 할머니는 "남동생이 돌도 채 되기 전에 아버지는 규슈에 있는 탄광으로 떠나게 됐다"며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는 아버지의 생사도 모르고 다시는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며 눈물을 훔쳤다. |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만수리.'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에서 지내는 황예순(81) 할머니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자신의 아버지 고향을 리(里) 단위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황예순 할머니의 어린 시절, 그의 할아버지가 수백 번을 넘게 외우게 한 지명이기 때문이다.
황예순 할머니가 3살이던 1942년 때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는 어린 그를 데리고 사할린으로 이주했다. 먼저 사할린에 일하러 간 아버지를 따라서 가족이 이사한 것으로 황예순 할머니는 기억했다.
1938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이후 일제는 '국가 총동원령'을 시행했다.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젊은 청년들을 징집했다. 특히 벌목장과 탄광 등이 많았던 사할린 지역에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던 일제는 사할린으로 가면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다고 조선인을 꾀어냈다.
황예순 할머니의 아버지도 사할린 탄광에서 일했다고 한다. 노동력을 수탈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적은 급여를 받았지만, 황예순 할머니 가족들은 모여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가족이 함께 지낸 기간은 3년이 채 되지 않았다. 1945년 황예순 할머니의 아버지가 일본 남쪽 끝 규슈의 탄광으로 일자리를 옮기게 됐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사할린에서 일본 본토까지 물자 운반이 힘들어졌다. 일제는 사할린에서 일하던 조선인 1만여명을 본토의 각지로 강제 전출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겼다.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에서 10년 넘게 사는 강춘자(79) 할머니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학교도 다니고 평생을 살았지만, 마음 한쪽에는 '나는 조선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어머니도 소련 국적을 취득하라는 권유를 수차례 받았지만, 무국적자로 남아있다가 우리나라에서 눈을 감았다"고 했다. |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에서 거주하는 어르신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는 강정순(90) 할머니도 아버지·오빠와 생이별을 겪었다.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강정순 할머니는 11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 오빠, 남동생 둘과 함께 사할린에 갔다. 사할린 탄광에서 일하던 강정순 할머니의 아버지와 당시 21세였던 오빠는 규슈에 있는 탄광으로 전출됐다가 갑자기 해방을 맞이하면서 소련 땅이 된 사할린에 돌아오지 못하게 됐다.
결국, 사할린에는 할머니의 어머니와 동생 2명만 남게 됐다.
강정순 할머니는 "일본 사람들이 강제로 우리 아버지와 오빠를 데려가서 가족들이 흩어지게 됐다"며 "1991년 큰어머니의 초청으로 고향에 있는 아버지 묘소를 찾을 때까지 (아버지의) 생사도 몰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강정순 할머니는 스물이 되었을 때, 사할린에 징용돼 온 조선인 남자와 결혼해 자녀들을 낳았다. 장성한 자식들은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카자흐스탄까지 흩어져 저마다 가정을 꾸려 살고 있다. 강정순 할머니는 남편이 사할린에서 세상을 떠난 이후 고국에서 남은 생을 보내기 위해 2006년 이곳에 입소했다.
그는 "홀로 우리 남매의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는 항상 고국에 살고 싶어 하셨지만,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1982년 돌아가셨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어 "러시아에 남은 자식들이 보고 싶은 것만 빼면 어머니가 꼭 돌아오고 싶었던 고국 생활에 크게 만족한다"고 했다.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는 강정순(90) 할머니는 "1991년 큰어머니의 초청으로 고향에 있는 아버지 묘소를 찾을 때까지 (아버지의) 생사도 몰랐다"며 "홀로 우리 남매의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는 항상 고국에 살고 싶어 하셨지만,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1982년 돌아가셨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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