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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동회'가 방화한 곡물 회사 '교에키샤' 내부.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제공 |
화교(華僑)가 한반도에 정착해 살아온 시간은 140년이나 된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격동의 한반도 역사를 그들도 함께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펼쳤고 한국전쟁을 겪는 과정에서는 이 땅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나섰다. 중공군과 싸우기도 했다.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의 아픔을 겪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화교가 겪은 역사적 경험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화교는 언제든 떠나고 마는 외국인이 아니라 정주자였다. 우리가 그들을 '이웃'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 화교 역사를 살펴보면 1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있는 역사가 140년이란 얘기다.
두만·압록강 경계 자연스러운 이주
1882년 조·청무역장정 맺고 상업활동
인천·서울 등 거주 폭발적으로 증가
조선과 중국은 두만강·압록강을 경계로 하고 있다. 중국인의 조선 이주와 조선인의 중국 이주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이 한반도에 지금과 같은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활발한 무역활동을 벌인 것은 1882년 10월 당시 조선과 청나라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은 이후다.
이 장정은 중국인의 조선 이주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들이 개항장에서 거주하며 상업활동을 할 수 있게끔 했다. 그리고 조선 이주 중국인 보호를 위해 청국 공관을 설치하고 관원을 파견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장정을 맺은 이후 조선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해 화교사회가 형성된다.
인천에는 조선에서 가장 먼저 차이나타운이 생겼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이후 후속 조치로 1884년 인천구화상지계장정이 맺어졌는데, 이를 근거로 인천에 청국 조계지가 설치됐다.
이후 부산과 원산 등에도 조계지가 설치된다. 이로써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화상(화교 상인)들은 조계지에 정식으로 거주하며 무역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화교들은 거대 자본을 갖춘 상인, 즉 화상(華商)이 있었고 중국보다 높은 임금 때문에 한국을 찾은 노동자(화공·華工)와 농민(화농·華農)도 있었다.
조선내 화교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1883년 166명인 화교 인구는 10년 뒤인 1893년 2천182명으로 10배 이상 늘었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1만명을 처음으로 넘긴 뒤, 화교배척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1930년에는 6만7천여 명의 화교가 서울과 인천, 평양 등을 중심으로 거주했다. → 표 참조
'일동회' 조직 터전 지키기 항일운동
한국전쟁 청년 자원 중공군과 싸워
화교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한국 땅에서 겪었다.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일제에 저항하는 항일운동도 했다.
항일운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인천 화교가 중심이 된 '일동회' 활동이다. 일동회는 인천 거주 산둥성 출신 화교 21명으로 조직됐다고 한다. 이름을 '일동회(日東會)'라 정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산둥성이 중국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쪽 사람들이 모여 일본에 저항한다'라는 의미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인천역과 세관 등 주요 시설, 일본인이 운영하던 공장에 불을 지르는 등의 방법으로 항일운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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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동회' 모임 장소로 이용된 복성잔(사진 가운데 건물).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제공 |
일동회 핵심 인물은 사항락(史恒樂)으로 알려졌다. 그는 1920년대 중반 부친이 거주하던 인천으로 이주했다. 1936년부터 잡화상점 겸 여관인 '복성잔'을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아 경영했으며, 이곳을 일동회 모임 장소로 사용했다.
일동회는 1940년 2월22일부터 1943년 4월24일까지 3년 동안 방화 12건, 첩보 제보 2건 등을 감행했다. 1943년 12월까지 15명이 일본에 체포됐다. 이 가운데 9명이 외환죄, 방화, 군기보호법 위반, 국방보안법 위반 등으로 재판을 받았다. 사항락을 비롯한 왕지신, 방승학, 오진매 등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화교들은 한국전쟁 전후로 중국에 갈 수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1949년 중국에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단절됐기 때문이다.
대신 한국과 우방 관계를 맺은 중화민국(대만)이 남한에 거주하는 화교들에게 국적을 부여했지만, 중국에 뿌리를 둔 화교들에게 대만은 모국이 아닌 낯선 국가일 뿐이었다. 화교들은 뿌리도 국적도 아닌, 삶의 터전이 있는 대한민국을 정착지로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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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건치 등이 모의 상황을 재현하는 장면.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제공 |
한국전쟁을 거치며 남한 화교들은 한국 정부를 따라 피난을 떠나야 했다. 일부 청년화교는 한국 군대에 지원해 중공군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여러 부대 가운데 규모가 컸던 부대는 'SC지대'였다. SC는 서울(Seoul)과 중국인(Chinese)의 알파벳 첫 글자를 땄다.
이 부대는 한국군 소속으로 특수임무를 띤 첩보부대였다. 이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약했던 시기는 1951년 3월부터 1953년 9월까지로, 당시 연합군의 반대로 한국전쟁에 정식 참전이 어려웠던 중화민국 부대를 대신했다.
SC지대에는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까지 모두 200여 명의 화교 대원이 복무했다. 이들 중 70명은 무장공작원으로 사선을 넘나들었고, 나머지는 후방에서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최병훈 인천시립박물관 연구원은 "화교도 우리와 같은 목표를 두고 활동한 시기가 있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진다면 화교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성호·한달수기자 dal@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