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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않은 전쟁, 아픔딛고 미래로·(7)] 인천상륙작전의 빛과 그림자 (上)

박경호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입력 2023-04-10 20:11 수정 2023-04-10 21:02

믿을 수 없던 작전이… 믿을 수 없는 반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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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 버린 한국전쟁 초반 전세를 순식간에 뒤집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꾼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6일)에 비견될 만큼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질퍽대는 갯벌로 둘러싸인 악조건의 인천으로 대규모 병력이 상륙, 낙동강 전선에 집중한 북한군의 허를 찌른다는 작전 구상은 대담함을 넘어 무모해 보였다. 그 난관을 돌파한 상륙작전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총반격하는 발판이 됐고, 이후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전투이자 신화로서 지위를 굳건히 다졌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도 전쟁은 3년 가까이 이어진 후에야 정전에 이르렀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펼쳐진 전황이 한국전쟁을 교착 국면에 빠지게 하면서 상륙작전의 성공을 퇴색시키기도 했다.

상륙작전 전후 민가와 시가지를 향한 대대적 공습으로 월미도와 인천 도심은 만신창이가 됐다. 인천지역의 피해에 대해선 다음 하(下)편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조수간만의 차 크고 질퍽대는 갯벌 악조건
맥아더 총사령관, 참모들 반대속 인천 고집
함대 261척·미군 등 7만5천명 대규모 투입



낙동강 전선에 집중한 적군 허찌른 담대함
한국·유엔군 북진 - 북한군 퇴로 차단 성과
예상보다 더딘 서울 수복으로 빛바랜 성공


사진4/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선발대가 '그린비치'(월미도)에 상륙하고 있는 모습.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 압도적 상륙작전


1950년 9월15일 새벽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함대 261척, 미 해병대 1개 사단과 육군 7개 사단을 비롯한 총 7만5천명의 병력이 투입된 육·해·공 입체 작전이었다.

미 해군은 20㎞에 걸친 반원형 대형을 펼쳐 200여척이 넘는 함선을 서서히 전진시켰고, 상륙정(LST)들이 탱크와 해병대를 싣고 일렬로 월미도로 향했다. 프랑스 종군기자 4명의 기록을 묶어 낸 '한국전쟁통신'(2012·눈빛)에 실린 르포기사의 한 장면을 보자.

"6시 30분, 큰 상륙정들이 섬의 갯벌에 앞문을 들이대고, 적군의 전방에서 아무런 저항도 없는 것에 다소 당황한 해병대를 토해 냈다.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아홉 대의 불도저 탱크들이 포로의 파인 구덩이 속에서 거대한 벌레처럼 비틀대며 숲으로 포를 쏘았다. 삼십 분 만에 해병대는 섬의 정상을 차지했고, 연대장은 미국 성조기를 꽂았다."

미 해병 제5연대 3대대가 이날 오전 6시 33분 월미도(그린비치)에 상륙했을 땐, 이미 섬은 항공모함 탑재기 코르세어(Corsair)가 퍼부은 공습으로 불타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월미도에서 60㎞ 떨어진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은 월미도 위에 파리 떼처럼 몰려들었고, 모든 함정에서 끊임없이 함포를 퍼부어 "땅을 말랑말랑하게 했다"고 '한국전쟁통신'은 전한다. 미 해병대가 큰 저항 없이 상륙 3시간 만에 월미도를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어진 상륙은 밀물을 기다리다 이날 오후 5시 30분부터 인천 북서쪽 해안(레드비치·현 동구 만석동)과 남서쪽 해안(블루비치·현 미추홀구 용현5동)에서 감행됐다. 미 제5연대 1·2대대는 레드비치로 상륙해 응봉산과 항만시설을 확보했다. 미 제1연대는 블루비치로 상륙해 수봉산을 차지했다.

사진2/ 인천상륙작전
미 해병대가 상륙정(LST)을 통해 '레드비치'(현 인천 동구 만석동)에 상륙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제공

16일부터 월미도와 인천항으로 한국군과 유엔군 지원부대들이 차례로 상륙했으며, 인천 시내에서 적군 소탕 작전을 벌여 일사천리로 인천을 탈환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에 주둔하던 북한군 병력 2천여명을 전멸했다. 18일 오전 인천시청(현 중구청) 앞 광장에서 인천시장 취임식이 열렸는데, 인천시장을 지냈던 표양문(1907~1962)이 임시시장을 맡았다.

9월17일 오전 5시 45분께 미 해병대는 부평 원통이고개(현 인천도시철도 1호선 부평삼거리역에서 동수역 일대)에서 경인가도를 통해 인천으로 진입하던 북한군 전차부대를 기습해 서울 가는 길목을 확보했다.

한국군 해병대 제3대대는 경인선 부평역 일대에서 북한군과 교전을 벌여 김포비행장으로 향하는 미 해병 제5연대에 길을 터줬다.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는 9월19일부터 한강을 건너 서울 진입을 시도했으나, 시가지를 요새화한 북한군의 방어망을 쉽게 뚫지 못했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교대로 투입돼 북한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압도적 전력으로 밀어붙인 인천상륙작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흘렀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지 13일만인 9월28일 한국군과 유엔군은 마침내 서울을 수복했다.

■ 기습작전은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기습 작전으로 보긴 어렵다. 북한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미군이 한반도 중간 지점에서 상륙 또는 공수작전을 펼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박태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가 쓴 '한국전쟁'(2005·책과함께)에 실린 소련의 한 암호전문을 보면 1950년 7월 김일성은 미군이 군대 후방 또는 북한 쪽 항만에 상륙·공수 작전을 할 위험성이 있다며 스탈린에게 무기를 신속하게 공급해 달라고 요청한다.

중국은 상륙작전 대상 지역이 인천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북한에 경고하기도 했지만, 낙동강 전선이 고착화하면서 북한군은 인천에 추가로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미 합동전략계획단은 9월 상륙작전 대상지로 인천, 군산, 주문진, 아산만 등을 검토했다.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총사령관은 대부분 참모가 반대하는 인천을 고집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한국전쟁에 관해 쓴 '콜디스트 윈터'(2009·살림)에서는 맥아더의 당시 구상에 대해 "거의 모두가 인천은 해군을 싫어하는 사악한 천재들이 만든 도시라고 생각했다"고 평했다.

인천 앞바다는 최대 9m까지 치솟는 조수 간만의 차로 상륙 시간이 제한됐고, 썰물 때는 1~4㎞의 갯벌을 걸어야 했다. 상륙지점인 월미도는 항구 한가운데에 있어 방어하는 쪽에선 수비대를 주둔시키기 적합했다. 유엔군 입장에서 인천 앞바다는 상륙작전의 악조건을 다 갖춘 지형이었다.

그럼에도 인천은 상륙지로 낙점됐다. 인천은 서울이 가깝고 인천항, 김포비행장, 경인선 등 인프라를 갖춘 군사 요충지였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교두보이면서도 낙동강 전선을 연결하는 북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예상대로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의 한국군과 유엔군이 대구, 김천, 대전, 수원을 거쳐 북상하며 총반격에 나섰다.

서울 수복이 13일이나 걸리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빛바랜 측면도 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 탈환을 시도하는 동안 서울과 중부지역 북한군은 후퇴해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박태균 교수는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 후 열흘 남짓한 시간이 없었다면 북한군이 만주에서 전열을 정비해 중국군과 함께 다시 진격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결국 유엔군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라고 했다.

사진5/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이 인천 월미도 엄폐호에 숨어 있는 북한군을 생포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제공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어진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은 전쟁을 끝맺지 못했다.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은 서울 수복 다음날인 9월29일 미군의 38선 돌파를 승인하면서 만주 등 국경 지역에는 한국군만 진출하게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중국, 소련과 직접 충돌하지 말자는 차원이었다.

하지만 맥아더 사령관은 유엔군을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북진시켰고, 결과적으로 중공군의 참전을 불렀다. 맥아더 사령관은 병사들에게 "빠르면 추수감사절, 늦어도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장진호 전투 등 미군의 막대한 희생과 1·4후퇴가 뒤따랐다.

한국전쟁 연구자인 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은 "인천상륙작전이란 대규모 작전을 기획한 목적은 애초 미 국무부 원칙대로 38선까지 밀어 올리고 전쟁을 끝내고자 했던 것"이라며 "38선을 중심으로 정전 체제로 가기 위한 작전이었으므로 북진 이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의미가 퇴색됐다"고 말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일러스트/성옥희기자 okie@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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