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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그래퍼 허희재가 말하는 '나에게 김포는, 김포에게 나는'

김우성
김우성 기자 wskim@kyeongin.com
입력 2023-07-03 15:59 수정 2023-07-0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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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시 월곶면 평화로운전시관에 내걸린 허희재 작가의 작품들. 김포/김우성기자 wskim@kyeongin.com

포토그래퍼 허희재(44) 씨는 4년 전 김포에 터를 잡았다. 당시 희재 씨는 지쳐 있었다. 남초 세계라 할 수 있는 촬영현장에서 그는 무거운 장비도 거뜬히 둘러멘 채 뛰고, 누구와 술자리를 해도 절대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만큼 강인한 사람이었다. 학창시절 때부터 그랬다. 엄마는 딸을 예쁜 인형처럼 키우고 싶어 했지만, 희재 씨는 일찍부터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

누구보다 당당했던 희재 씨의 몸과 마음이 바닥까지 내려앉은 시기에 김포는 그를 일으켜줬다. 희재 씨에게 손짓한 건 장릉이었다.

"여긴 어떤 곳일까 하고 그냥 한 번 가봤어요. 그곳에서 생명의 기운, 빛의 위대함을 느끼면서 점점 빠져들었죠. 장릉 문이 열려서 안으로 들어가면 석상 두 개가 있는데 그 석상을 바라보고 매일 '할아버지 오늘 하루는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라고 물었어요. 코너를 돌면 한국에서 보기 힘든 백송(소나무)이 나와요. 이 친구는 날씨에 따라 매번 색깔이 달라요. 그 길따라 걸어가면 연지(연꽃을 심은 못)가 나오는데 여기는 해가 뜰 때 너무 예쁘죠. 비 오는 날에는 또 제각(묘제를 지내기 위한 목조건축물)에 누워 흙내음 물내음 바람내음을 맡으면 맑아져요."
나에게 김포는 '힘들 때 일으켜준 곳'
남초 세계인 촬영현장서도 강인했던 허희재씨
몸·마음이 바닥까지 내려앉았을 때 만난 김포
무거울 줄 알았던 장릉 '생명의 신비로움' 만나
"햇살 내리쬐는 광경, 열심히 살자는 생각들어"
희재 씨는 묘지인 장릉의 분위기가 무거울 걸로 예상했다. 하지만 장릉에서 본 건 역설적으로 새 생명의 신비로움이었다. 특히 장릉 나무숲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자신을 끌어당겼다고 그는 돌이켰다.

"우울한 사람은 햇살을 봐야 한다잖아요. 장릉에서 햇살이 내리쬐는 광경을 보면 생명의 기운이 솟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산책하며 자주 마주치는 할머니 한 분이 하루는 사람들에게 '난 여기 와서 운동한 덕분에 살았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알고 보니 암투병을 하셨던 건데 저처럼 장릉에서 힘을 얻었다는 게 신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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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희재 작가는 이번 전시에 자연의 탄생과 소멸, 순환을 상징하는 20개 작품을 선보였다. 김포/김우성기자 wskim@kyeongin.com

최근 희재 씨는 그동안 장릉에서 보고 느낀 영감, 장릉으로부터 받은 위안을 시민들과 공유했다. 지역 예술인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김포문화재단의 공모에 선정되며 지난달 5일부터 한 달간 월곶면 소재 평화로운전시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전시는 '생명의 숲 장릉·끝의 시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희재 씨가 장릉을 대하는 마음을 함축한 명칭이다. 엄선한 20개의 작품은 생명의 탄생과 소멸, 순환이라는 줄기로 연결돼 있었다.
김포에게 나는 '생명을 전하는 사람'
김포문화재단 공모 선정되며 한달간 작품 전시
그동안 보고 느낀 영감과 위안, 시민들과 공유
동네가 똑같은 사각형 되어 가는 게 안타까워
그렇다 해도 김포는 나에게 '특별한 도시' 의미
"무덤까지 가는 길의 생명을 전하고자 했어요. 민들레 홀씨 옆의 작은 열매들은 엄마가 아이를 품은 모습, 능 뒤편의 안개는 사후세계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수명을 다한 나뭇잎은 발효를 통해 연지의 양분이 되어 다시 연을 피어나게 하죠. 죽음이라는 것도 결국 또 다른 생명을 낳는 자연의 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시된 작품 중 판타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벚나무 사진도 많은 관람객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숲이 무성하지 않은 곳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던 덕분에 물반사가 반짝이며 장관을 연출했다. 이 모든 작품이 희재 씨가 새벽시간대 혼자 장릉을 거닐며 포착한 것이다.

희재 씨는 장릉뿐 아니라 날 것 그대로의 김포를 사랑한다. 평범한 통진읍 거리와 구래동 아파트 위로 날아다니는 비행기 등을 종종 작품에 담는다. 대명항의 노을에 여운이 깊다고도 그는 예찬한다. 희재 씨는 그래서 김포에 개발사업이 활발한 게 아쉽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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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희재 작가는 한 작품 앞에 서서 "여기 물방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능과 숲, 목조건물이 다 담겨 있다"고 알려줬다. 김포/김우성기자 wskim@kyeongin.com
저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 정감 있는 걸 좋아하는데 70~80년대의 정감 있던 동네가 똑같은 사각형이 되어 가는 게 안타까워요. 내가 맨날 뛰놀던 골목이 어느 날 획일화한 대로가 되어버리는 기분이랄까요. 그렇다 해도 김포는 저에게 특별한 도시랍니다
희재 씨는 고된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 힘들지 않다고 했다. 그는 "밤늦게 김포에 들어서면 내일은 장릉이 어떻게 변해있을지, 나무 위에서 나를 노려보던 청솔모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연꽃은 얼마나 더 피어있을지 궁금해 빨리 가봐야겠다는 생각만 한다"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김포/김우성기자 wskim@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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