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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7)] '인천 짠물' 효능일까, 남 돕는 일 지칠 줄 몰랐다

박경호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입력 2023-08-02 14:56 수정 2023-11-02 17:13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학폭 피해자 돕는 박상수 변호사


조세희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처럼 인천을 다룬 문학 상당수는 도시에서 풍기는 특유의 결핍과 소외의 정서를 포착한다. '서울 변두리' '산업화' '실향민' '이주민' 등이 그 정서의 뿌리로 여겨지는데, 안타깝게도 최근 들어선 '마계인천'*이나 '이부망천'* 같은 멸시의 이미지로 아주 가볍게 소비되곤 한다. 인구 300만 대도시로 성장한 인천이 안팎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 인천에 애정 어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민하고 있을 문제다.
결핍 극복하려는 의지, 인천 사람 특유의 정서죠. 
<I'm from 인천> 7번째 주인공 박상수 변호사 또한 인천에서 보낸 유년기와 학창시절이 '결핍과 고통'의 시기였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천에서 지낸 시절의 그늘진 단면이 지금 자신을 성장하게 한 토대가 됐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박상수 변호사를 여러 차례 만나면서 그가 말하는 "인천 사람 특유의 정서"에는 결핍과 소외를 딛고 일어나는 '극복 의지'도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 사람의 유명한 별칭인 '인천 짠물'. 이 또한 극복 의지에 방점을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마계인천·이부망천… 고향 보는 시선
인천사람들 어두운 과거 딛고 이겨내
학교폭력 피해 당했던 지난한 이야기
자신 성장토대 되어준 건 자명한 사실

박 변호사는 지난 2월 대한변호사협회 부협회장 임기를 마치고, 4월부터 법조윤리협의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법조윤리협의회는 대법원·법무부·대한변호사협회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법조 윤리 확립 기관이다. 전관예우 변호사나 대형 로펌 등에 취직한 고위 공직 퇴직자(비법조인) 감시 기구라고 보면 된다. 섣불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박 변호사의 성향이 법조계에서도 인정받아 법조윤리협의회 실무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출신 법조인들의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 '로이너스' 창설자이자 운영자로도 유명하다.

현재 가장 널리 알려진 타이틀은 '학교폭력 피해자 전문 변호사'다. 박 변호사는 2017년부터 공익 활동으로 사단법인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학가협) 자문 변호사를 맡고 있다. 학교폭력 피해자만 최소한의 수임료로 사건을 의뢰받고 있다. 가해자 사건은 수임하지 않는다.

박 변호사도 학교폭력 피해자였다. 이 이야기는 박 변호사 가족이 1983년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인천 북구 청천동(현 부평구)으로 이주한 때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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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변호사·법조윤리협의회 사무총장.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어머니 네살 아들 데리고 넥타이 팔아
1985년에 13평 아파트 청약으로 입주 
지금은 생소한 연탄 난방 아파트
안방만 난방 건넌방은 냉골이었던 집

박 변호사 아버지는 경북공고 야간반을 나와 대구 한 방직공장에서 전기 기술자로 일하며 같은 공장의 여성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결혼 직후 서울 구로공단으로 일자리를 옮겼고, 가리봉동 빈민가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1979년 박상수 변호사가, 이듬해 남동생이 태어났다.

박 변호사 아버지는 1983년 인천에서 새 직장을 잡아 가족 모두가 청천동으로 이사했다. 비가 새는 산동네 셋방이었다. 청천동 시절 어머니는 부업으로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방직공장에서 일감을 따 베틀로 짜서 납품하고, 넥타이를 떼서 서울 강남의 신축 아파트를 집집이 방문해 팔았다. 박 변호사는 어머니를 따라 버스를 타고 부평역으로 가서 경인전철로 신도림역까지, 다시 서울지하철 2호선으로 갈아타 방배역에 내려 공장으로 걸어가던 길을 기억한다. 어머니는 네댓 살 박 변호사의 손을 잡고 넥타이를 팔았다.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넥타이를 파니까 (강남 아파트에서) 더 잘 사줄 수밖에 없는 거죠. 집안 형편이 어려워 부모님은 쉬지 않고 늘 일하셨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일해서 인천 북구 가좌동(현 서구)에 있는 13평짜리 가좌주공 1단지 아파트 청약에 당첨돼 1985년 입주했습니다. 부모님이 이 아파트의 주택담보대출을 다 갚은 건 초등학교 6학년(1991년) 때입니다."

박 변호사 가족이 입주한 가좌주공 1단지 아파트는 연탄으로 난방했다. 지금은 생소한 연탄 난방 아파트는 1980년대까지 수도권에서 보편화 된 서민 주거 형태였다. 1983년 7월20일자 매일경제 기사를 보면 대한주택공사(현 LH)는 그해 하반기 인천 서구 가좌동을 포함한 전국 49개 지역에 국민주택 2만5천400가구를 분양했는데, 이 가운데 82.2%(2만822가구)가 연탄 난방이었다. 당시 가좌동엔 13~18평 연탄 난방 아파트 1천가구가 공급됐다. 박 변호사가 살던 가좌주공 1단지와 바로 옆 2단지 아파트는 2007년 2천200가구 규모 대단지 아파트로 재건축됐다.

"가좌주공 1단지에는 연탄아궁이가 있었어요. 안방만 난방됐고 건넌방은 난방이 안 됐어요. 안방도 윗목과 아랫목이 있어 아랫목만 장판이 새카맣게 탔고, 아파트 구석 다용도실은 늘 연탄이 쌓여 있었어요. 부모님이 맞벌이라서 동생과 제가 연탄을 갈았고요, 둘이서 짜파게티를 끓여 먹으며 끼니를 때운 적도 많습니다."

1980년대 가좌동은 '개 건너'로 불린 인천 서구 지역에서 가장 먼저 가장 큰 규모로 주공·민간 아파트가 들어섰다. 서구 첫 '신도시'로 불러도 어색하지 않겠다. 비슷한 시기 정부는 인천 지역에 주안주공(현 미추홀구 주안동), 간석주공(현 남동구 간석동), 구월주공(현 남동구 구월동), 신현주공(현 서구 신현동) 등 수천가구 규모 대단지 아파트를 물밀듯 공급했다. 인천 내부는 물론 서울 등 인근 도시에서의 인구 유입이 본격화한 것이다.

1980년 수도권 인구유입 시작되던 해
주안주공·간석주공 등 대단지 물밀듯
가좌동 안에도 경제적 편차 컸다
바로 옆 2단지는 기름보일러 쓰고,
인근 라이프 진주아파트는 그보다 조금 더 잘 살고
현대아파트는 방송국 직원·변호사 가정 살았어요.
동네 한가운데에는 판자촌 있었고요.
인천문화재단이 2016년 펴낸 '확장도시 인천'에서는 당시 상황을 "국가는 서울 영동 지역 개발의 성공을 통해 아파트 중심의 주택 보급 모델이 인구 집중의 문제를 앓고 있는 다른 도시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됐고, 서울의 위성도시로 아파트 공급을 확장했다"며 "1977년이 되자 마치 반포 주공아파트를 빼닮은 듯한 단지가 인천에 계획됐다"고 설명했다. 박 변호사는 가좌동이란 동네 안에서도 경제적 편차가 컸다고 말했다.

"가좌주공 1단지는 가좌동 초창기 아파트 단지였어요. 바로 옆 가좌주공 2단지는 기름보일러를 쓰는 집이고, 인근 라이프 진주아파트는 그보다 조금 더 잘사는 집, 현대아파트는 방송국 직원이나 변호사 등 굉장히 잘 사는 집 아이들이 살았습니다. 동네 한가운데는 거대한 판자촌도 있었고요. 저를 포함한 동네 아이들은 인천가정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경제적 계급이 뚜렷한 편이었어요."

인천의 주택난은 1969년 부평국가산업단지(옛 수출공단 4단지), 1973년 주안국가산업단지(옛 수출공단 제5·6단지) 등 대규모 공단이 잇따라 조성되며 심화했다. 가좌동은 주안국가산단과 목재공업단지 인근이면서 경인고속도로가 지나 택지 개발 여건이 좋은 편이었다. 가좌동에 대단지 아파트촌이 형성한 배경이다. 1986년 5월16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1985년 11월 기준 가좌동 인구는 4만8천467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동(洞)으로 조사됐다. 가좌동 토박이 주민들 얘기를 들어보면 택지 개발 전 가좌동은 소규모 집성촌이 듬성듬성 있는 농촌이었는데, 불과 수년 사이 상전벽해로 도시화가 진행됐다.

대규모 산업단지 인근이라 주거 환경은 나빴다. 가좌동은 1968년 경인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절반으로 쪼개져 생활권도 분리됐다. 1960년대부터 가좌동에 사는 양기성(68)씨는 "경인고속도로가 생기면서 현 가좌1동 주민들은 생활권이 부평에서 동인천 쪽으로 바뀌어 과거 동인천에서 가장 컸던 신신예식장에서 결혼했다"며 "반면 부평 쪽으로 붙은 가좌2·3·4동 주민들은 부평역에 있는 예식장에서 결혼했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공단에서 배출되는 매연으로 인해 동네엔 늘 희뿌연 안개가 깔렸었다고 했다. 주민들은 환경오염 문제에 시달렸다. 박 변호사가 다닌 가정초엔 수영장과 자연관찰원(동물원)이 있었는데, 가좌동에서 가장 큰 공장 중 하나였던 한국티타늄공업이 1983년 8월 조성해 기부한 것이다. 현재 사라진 한국티타늄공업은 당시 대표적 공해 기업으로 꼽혔다. 그때만 해도 수영장을 갖춘 초등학교가 흔치 않았다. 가정초 수영장은 2021년 9월 급식실 신축 공사로 철거됐고, 자연관찰원은 현재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학교 측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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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동에 있는 서울지방변호사회 정문 앞 '조영래 변호사 흉상'을 바라보고 있는 박상수 변호사. 그는 "모든 변호사는 조영래 변호사를 존경할 수밖에 없다"며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인생의 책으로 꼽았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박 변호사는 초등학교부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학생회장으로 선출될 정도로 어려서부터 리더십이 있었다. 부모님은 어려운 형편에도 꾸준히 책을 사줬다. 13평 아파트 방 2개 중 하나를 공부방으로 썼는데, 책상을 뺀 삼면이 책으로 둘러싸일 정도였다. 박 변호사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소장 도서 목록을 만들었는데, 3천권이나 됐다. 주로 문학과 '러시아 혁명사'(1980·문학과지성사) 같은 사회과학 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성인이 돼선 조영래(1947~1990)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1983·아름다운전태일)을 인생의 책으로 꼽는다.

어려운 형편에도 꾸준히 책 사주신 부모님
13평 아파트 방 2개 중 하나가 공부방
6학년때 소장도서목록 만드니 3천권 빼곡
'러시아 혁명사' 같은 서적도 읽어
성인돼서 읽은 책 중 '전태일 평전' 최고였다

박 변호사는 1992년 동구 동산중학교에 입학해서도 줄곧 반장을 맡았다. 반장으로서 학교폭력을 고발하는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소위 '일진'들의 학교폭력을 학교 측에 알려 막았다. 중학교 1·2학년까지 학교폭력 피해자 편에 섰던 그였다. 그러나 중학교 3학년이 되자 한순간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입장이 역전됐다.

"3학년 반 배정을 받았는데, 제가 학교에 고발했던 소위 일진 무리가 다 몰려 있는 거예요. 담임 선생님이 그 친구들을 관리해달라며 선거도 안 하고 저를 반장으로 지명하더라고요. 일진 무리가 2년 동안 저한테 당한 것도 있고, 이제는 손을 봐주자고 생각했는지 저를 학교 뒤 재래식 화장실로 불러 집단으로 폭행했습니다. 현재 학교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면서 접하는 많은 일을 중학교 3학년 1학기 내내 다 겪었습니다. 정말 지옥 같았어요. 한 선생님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제 동생한테 '박상수도 이제 끝났네'하고 얘기해 동생이 항의하기도 했답니다."

중학교 1·2학년때 피해자 편에 섰는데
3학년 되어 한순간에 학교폭력 피해자로
3학년 반 배정 받았는데
그동안 고발했던 일진 무리가 다 몰려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그 친구들 관리해달라'며
선거도 안하고 저를 반장으로 지명하더라고요.
학교뒤 재래식 화장실에서 집단 폭행 당했죠.
성적 물론 생활 자체 견디기 힘들어져
학교에 '특목고 진학 못하면 학교 손해' 설득해
준비반 말들어 학교폭력에서 분리해달라 요구
3학년 2학기 동안은 따로 공부할 수 있었다
학교폭력에서 가해자·피해자 분리 중요한 이유

중학교에서도 전교 1~3등을 다투던 박 변호사는 3학년 1학기 성적이 급락했다. 평소 원하던 인천과학고등학교(특수목적고등학교) 진학은 물론 학교생활 자체가 견디기 힘들어졌다. 당시 특목고 진학이 뜸했던 동산중에서 그나마 진학 가능성을 보인 학생은 박 변호사를 포함해 2명뿐이었다고 한다. 박 변호사는 학교 측에 "내가 특목고에 진학하지 못하면 학교도 손해"라며 "특목고 준비반을 만들어 학교폭력에서 분리해달라"고 요구했다. 학교는 박 변호사 요구를 받아들여 2학기 동안은 특목고 준비반에서 그를 포함한 2명이 따로 공부하도록 했다. 성적은 회복됐다. 박 변호사가 학교폭력 문제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다.

"그때 가해자들과 분리되고 나니 다시 숨이 쉬어지고 살 것 같았어요. 학교폭력 피해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른 진상 규명과 가해자·피해자 분리입니다. 생각보다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처벌받길 원하지 않습니다. 사회는 계속 엄벌주의로만 가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법률적 분쟁만 더 늘어납니다. 빨리 진상을 규명해서 피해자가 원하는 대로 분리해주면 됩니다. 학교폭력이 학교 안(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에서 법제화하고 제도화하고 있는데, 현재 가장 강한 처분인 학급교체나 강제전학은 어지간해서 안 나오거든요. 그러다 보니 학폭위 처분까지 가도 분리가 안 돼 결국 피해 학생이 자퇴하거나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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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천고등학교 재학 시절 박상수(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 변호사. /박상수 변호사 제공

박 변호사 가족은 1995년 연수구 동춘동 연수지구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해 박 변호사는 인천과학고 시험에서 떨어졌지만, 이른바 특수지(비평준화) 고등학교로 전국에서 이름을 날린 서구 검암동 서인천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박 변호사가 입학할 때 서인천고 합격 기준은 연합고사(고입학력평가) 200점 만점에 190점이었는데, 그는 196점을 받았다. 전체 시험 과목에서 딱 2개 문제를 틀린 점수였다. 그해 서인천고 입학자 중엔 만점자가 8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서인천고에는 인천에서 공부로 난다 긴다 하는 남녀 학생이 모였다. 이 학교에서 박 변호사가 처음 받은 성적표는 반에서 7등이다. 여전히 학교폭력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다 다시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집안 사정까지 겹쳐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최상위권 등수'만 맴돌던 박 변호사에겐 첫 성적표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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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변호사가 자존감을 회복한 계기는 고교 2학년인 1996년 4월 'MBC 장학퀴즈' 출전이다. 그는 무턱대고 간 서울 여의도 MBC 방송센터에서 치른 예심에 합격했다. 학교 응원단을 이끌고 본선에 나가 '주 장원전' '월 장원전'을 뚫었다. 월 장원 4명이 겨룬 해당 분기 최종전 '기 장원전'에서 차석(2위)을 차지했다. 주 장원만 따내도 학교 교문에 현수막이 내걸린 시절이었다. 박 변호사는 2년 치 대학교 등록금을 지원받게 됐고, 서인천고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부상으로 받았다. MBC 장학퀴즈는 박 변호사가 출전한 40기 장원전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이어 EBS 장학퀴즈 시대가 열렸다.

'명문' 검암동 서인천고 진학 성공해
처음 받은 '반 7등 성적표' 충격으로 다가와
1996년 MBC 장학퀴즈 2위로 자존감 회복
학교에서 영웅 된후 전교 3등까지 성적 뛰어

장학퀴즈 기 차석으로 학교에서 '영웅'이 된 박 변호사의 성적은 전교 3등까지 뛰었다. 전국 최상위권 대학교 진학을 노려볼만한 성적이었다. 명문대 진학률이 고등학교 평가의 기준은 아니지만, 서인천고는 한때 특목고를 제외한 일반계 고등학교 중 '서울 강남 8학군'까지 제칠 정도로 진학률이 높았다. 서인천고는 1994년 무려 75명이 서울대학교 합격 통지를 받아 그해 일반계(비평준화 포함) 고교 중 가장 많은 서울대 합격자를 배출했다. 1990년대 수학능력시험 난이도와 관련한 언론 보도에서 서인천고 교사나 학생 반응은 단골로 등장했다. 박 변호사는 어떻게 공부했을까.

"아침 0교시에 시작해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자정이었습니다. 새벽 6시 5분 연수구 아파트에서 12호 통학버스가 출발했는데, 학익동을 거쳐 학교까지 1시간 30분 걸렸어요. 통학버스를 타려면 새벽 5시 40분에 일어나야 했습니다. 야자를 마치고 집에 오면 밤 1시가 조금 넘었는데, 교육방송을 보다가 2~3시쯤 잤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해가 안 되는 생활이지만, 3년 내내 그렇게 학교에 다녔습니다."

야자 마치고 오면 새벽 1시
교육방송 보다가 2~3시쯤 잠들어
새벽 6시5분 통학버스 타고 등교
지금은 이해 안가지만 3년간의 반복한 생활

서인천고는 함경남도 문천 출신 사업가 홍성한(1930~2010) 선생이 1984년 개인 재산을 털어 설립했다. 개교 당시 학교 주변은 시내버스조차 들어오지 않는 허허벌판이었다. 서인천고는 통학버스 16대를 도입해 인천 시내 전체를 누비며 학생을 모았다고 한다. 서인천고는 1996년 입학생을 끝으로 평준화 고교로 전환했다. 1988년부터 이 학교에 근무한 황치구 교장은 "학교가 너무 벽지에 있다 보니 도저히 평준화 고교로 학생을 모집할 수 없었다"며 "인천에 명문고가 있어야 한다는 설립자의 뜻으로 인천 고교 중 처음으로 제주도 수학여행을 보내고, 서울에서 전교생이 오페라를 관람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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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천고등학교는 1996년 '제6회 전국 교교생 대입학력경시대회'에서 전국 고교 가운데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둬 대상을 수상했다. /서인천고 제공

박 변호사는 고교 3학년인 1997년 늦가을 치른 수능시험을 망쳤다. '외환 위기(IMF 사태)' 파도가 남동국가산업단지에 있는 아버지 공장까지 덮쳤을 때다. "생산 라인이 펑크 나면(사람이 빠지면) 온 가족이 라인에 앉아 일해야 했던 공장"의 경영 사정이 나빠지면서 전기요금조차 내지 못했지만, 박 변호사는 "장학퀴즈로 등록금은 마련했다"며 단식까지 한 끝에 아버지에게 재수를 허락받았다. 박 변호사 부모님은 여전히 동춘동에 살면서 남동산단에서 삼성전자와 한국지엠에 납품하는 2·3차 협력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박 변호사는 "부모님의 성실함 때문에 항상 죄송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며 "평생 노동으로 어렵게 살면서도 자식들의 꿈엔 어떠한 제한을 두지 않고 응원하고 지원해 주셨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재수로 다른 대학에 입학했다가 다시 수능시험을 치러 2000년 서울대에 합격했다. 이로써 부모님 기대는 충족했다는 생각에, 입학과 동시에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보통의 법대생'과는 전혀 다른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괴짜 법대생'이었다. 그는 문학동아리를 만들어 흠모했던 문학을 탐구했고, 동인지를 펴내거나 시화전을 열었다. 같은 대학 국문과를 나온 아내도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다. 전공인 법대 교수들보다 부전공인 국문과 교수들이 박 변호사를 더 좋아할 정도였다. 학생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어머니가 여러 가지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제가 법조인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커서 어머니를 위해 사법시험을 준비하게 됐습니다. 그렇다고 그간 대학에서 하던 활동을 접은 것도 아니었어요. 28살에 사법시험을 봤는데 결국 떨어졌습니다. 그 길로 공군 학사장교 시험에 응시했고, 수석으로 입대해 2009년까지 강릉 공군 부대 정훈장교로 복무했습니다. 복무 중이던 2007년 갑자기 로스쿨법이 국회를 통과했는데, 도전하지 않을 수 없었죠. 특히 로스쿨 진학을 위한 법학적성시험(LEET)은 언어와 논리학이라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압도적으로 유리합니다. 저를 위한 시험인양 별다른 준비 없이 상위 2~3% 점수를 받고 제대한 이듬해 고려대 로스쿨에 합격했습니다."

2000년에 서울대 합격
사법시험 준비하는 보통의 법대생과 달리
문학 공부하고 동인지 펴내는 '괴짜 법대생'
로스쿨 진학 법학적성시험
언어·논리학 중요해 책 읽은 사람 유리했고
'나를 위한 시험' 상위 2~3% 점수로 합격

2013년 제2회 변호사시험에 합격해 법조인이 됐다. 박 변호사는 2003년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했으니 꼭 10년이 걸렸다. 10년 넘게 연애한 아내에게 청혼한 게 그가 변호사시험 합격 후 가장 먼저 한 일이다. 같은 해 박 변호사는 대한항공 항공우주산업본부 소속 사내 변호사로 첫 경력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공군 장교 출신이란 점이 취업에 도움됐다. 대한항공 변호사 2년 차에 한진그룹 지주사(한진칼)가 설립되면서 지주사 준법지원인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지주사의 유일한 변호사로 사실상 법무팀장 역할을 했다. 박 변호사는 그곳에서 '한진해운 파산'(2017년 2월), '오너 일가 갑질 논란'에서 촉발한 한진그룹에 대한 전방위 수사(2018~2019년) 등에 대응했다.

그는 한진그룹에서 일한 2013~2019년 진보 진영의 대표적 시민단체 참여연대 내 경제금융센터에서 실행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대기업과 시민단체 활동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두 집단의 양면성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박 변호사는 조국 전 서울대 교수가 2019년 8월 법무부 장관에 지명된 후 자녀 입시 문제 등 여러 의혹이 불거진 이른바 '조국 사태' 때 참여연대 활동을 완전히 그만뒀다. 그는 참여연대가 조국 사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옳다고 주장했다.

한진해운 파산·오너 일가 갑질 논란 등 전방위 활약
조국사태 이후 참여연대 활동 그만둬
참여연대가 사태에 대해 문제 제기해야 옳다고 생각

"한진그룹 오너 일가의 인성적인 면을 제가 변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 기업은 IMF 사태 때도 코로나19 때도 단 한 명도 인위적인 정리해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항공사는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대한항공과 그룹 지주사에서 일하는 동안 한진은 노동자를 우대하는 기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진그룹 창립자 조중훈(1920~2002) 회장 자체가 지게꾼 출신으로 인천항 창고에서 트럭 한 대로 사업을 시작해 국내 굴지의 수송기업을 만든 사람입니다. 인위적 구조조정을 하지 말라는 게 선대 회장의 유훈이었고, 지금도 지켜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변호사인 제 연봉보다 베테랑 기술자의 연봉이 더 높았어요. 기업이 존재해야 노동자의 삶이 보장되는데, 우리나라 초창기 기업은 태동 단계에서 모든 사람이 중산층으로 비슷하게 살자는 사회적 연대 의식이 있었습니다. IMF 사태 이후 기업의 사회적 연대 의식이 많이 사라졌는데, 한진은 그 전통을 이어가는 마지막 대기업인 것 같습니다. 전문경영인 도입을 많이 얘기합니다만, 전문경영인의 첫 번째 경영 합리화 방안은 구조조정일 겁니다."

박 변호사는 로스쿨 재학 때 '판례위키'(판례 아카이빙·검색)를 주제로 스타트업 창업을 시도했는데, 그때 만든 온라인 커뮤니티 '로이너스'를 운영하며 로스쿨 출신 변호사 차별 반대 운동에 뛰어들었다. 현재 로이너스 변호사 회원은 1만3천명이다. 국내 변호사는 약 3만명이다. 대한변협 부협회장으로 활동할 때는 이른바 '검수완박법'(검찰·경찰 수사권 조정 관련 법률 개정)을 강하게 반대하는 필리버스터를 추진하기도 했다. 박 변호사는 정파보다 가치 지향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했다. 검·경 수사권 조정은 정치 현안이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한국은 지난 70년 동안 경제범죄나 지능범죄는 검찰에게 수사를 맡기고 강력범죄는 경찰에게 수사를 맡긴 분업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사실상 아무런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경찰에게 지능범죄 수사까지 다 떠넘기면 사회적, 경제적 약자가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한국이 세계적 수준의 치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검·경이 합동으로 범죄자를 반드시 잡겠다는 수사력의 유지 때문이었습니다.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안전합니다. 범죄 수사는 국가가 서민들에게 제공하는 하나의 복지인데, 검수완박은 복지를 무너뜨리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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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수 변호사가 2021년 10월 고려대학교 미디어관에서 열린 '2021 블러썸 청소년 열린포럼'에 참석해 '학교폭력법제도의 피해자 중심 개선방향'을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박상수 변호사 제공

박 변호사는 학가협 자문 변호사 활동을 평생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법조인의 숙제라고 했다. 전임 강지원 변호사도 2002년부터 2016년까지 14년 동안 학가협 법률 자문을 맡았다. 법조인들의 관심이 적어 후임을 찾기 어려웠다고 한다. 박 변호사는 언론과 방송 등 각종 대중매체에서 학교폭력 피해자가 보호받지 못하는 제도적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박 변호사는 오랫동안 학교폭력 문제를 얘기해왔는데, 지난해 말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드라마 '더 글로리'와 올해 초 '정순신 변호사 국가수사본부장 낙마 사태'가 그의 목소리를 키웠다.

"많은 변호사가 학교폭력에서 상대적으로 수임료가 비싸고 사건 진행이 수월한 가해자 사건을 대리하길 선호합니다. 피해자는 사건 진행도 어렵고 제도적으로도 어려운 부분이 많아요. 학교폭력이 법률적 해결로 전환되면서 가해자 쪽 변호사들이 쓰게 된 방법이 학폭위 처분에 대한 집행정지 신청입니다. 소송을 지연시켜 졸업할 때까지 버티게 하고 학교폭력 가해자들의 처분을 무력화하는 방법을 정순신 변호사가 자녀 문제에서 그대로 썼더라고요. 법원이 학폭위 처분 집행정지를 판단할 때 피해자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집행정지를 판단할 때 피해자 진술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는데, 다행히 국회에서 관련 법 개정안 통과가 목전입니다."

학가협 자문 변호사 활동 평생 해야할 일
법조인 관심 적어 후임 찾기 힘들어
학교폭력 가해자측 수임료 비싸고 진행 수월
많은 변호사들 피해자측 변호 꺼려

학폭위 처분 집행정지때 피해자 의견 들을 기회 없어
법원 판단때 진술권 보장 계속 주장한 바
다행히 국회서 관련 법 개정안 통과 목전

박 변호사는 전국초등교사노동조합이 주최한 교권 보호 관련 국회 토론회의 토론자로 참여한 인연으로 지난달 1일부터 초등교사노조 자문 변호사를 맡았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지난달 18일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한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이 일로 박 변호사는 교권 보호에 관한 제도상 문제를 들여다보느라 다시 바빠졌다.

틈틈이 쓴 책 'Legal Trend 2024'(로이너스북스)도 최근 펴냈다. 이 책은 극단의 갈등으로 사회를 달구고 있는 이슈들을 법률적 배경과 논리로 풀어내 소모적 논쟁을 줄이자는 취지로 쓴 교양서다. 해마다 주요 이슈를 담은 시리즈로 출간할 계획이다.

교권보호·지역문화 이슈 등 틈틈이 관심
인천 출신 법조인들 잘 못 뭉치는 것 같아
후배들과 '희망적인 도시 변화' 필요성에 공감대
연말쯤 인천출신 법조인 모임 만드는 것부터 시작

성장기 어두운 기억을 품은 인천도 조금씩 들여다보려 한다.

"우리나라 최초 실내극장인 애관극장이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천의 모습이 애관극장 같아요. 우리나라 근대화의 관문으로 가장 앞서 나가는 지역이었고, 이승만 대통령과 일대일로 맞선 조봉암 선생님을 배출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큰 인물이 나온 고장이었는데, 어느 순간 서울의 곁다리처럼 돼 쇠락해 가면서도 애관극장처럼 꿋꿋하게 버티는, 그런 힘을 가진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인천 출신 법조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부산은 벌써 법조인 출신 대통령을 두 명이나 배출했는데, 인천 출신 법조인들은 잘 뭉치지도 못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제는 그러지 말고 우리 후배들과 아이들에게 희망적인 도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데 다들 공감했습니다. 연말쯤 인천 출신 법조인 모임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단어 풀이


*마계인천 : 인천이 악마의 소굴 같은 도시로 비친다는 의미로, 2000년대 중후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 신조어다.

*이부망천 : '이혼하면 부천, 망하면 인천'의 줄임말로, 인천을 깎아내리는 표현으로 인식된다. 2018년 6월 지방선거 직전 인천시 고위 공무원 출신 전직 국회의원이 방송에서 언급해 지역사회에서 파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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