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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 일회용 종이컵

윤인수
윤인수 논설실장 isyoon@kyeongin.com
입력 2023-11-09 19:37 수정 2024-02-0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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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 벽장에 20여개 쯤 되는 텀블러가 처박혀있다. 모두 이런저런 행사의 기념품이지 돈 주고 산 기억이 없다. 비품 창고엔 십여 개의 에코백이 제멋대로 포개져 있다. 한 두 개면 족할 텀블러와 에코백들이 친환경 제품 붐을 타고 집에 들어왔다. 필요 없다고 재활용이나 폐기물처리 사이클에 넘기면 더 심각한 환경 파괴인 데다, 멀쩡한 물건을 버리는 양심의 가책도 상당할 테다. 용도 없이 집 구석에서 강제 휴면 중인 까닭이다.

정부가 7일 식당, 카페 등 식품접객업과 집단급식소의 일회용 종이컵 사용 금지 조치를 철회한다고 밝혔다. 계도기간 종료로 오는 24일부터 단속에 걸리면 300만원 이하 과태료 부과대상이었다. 카페의 플라스틱 빨대와 편의점 비닐봉지 사용은 눈을 감고 봐주기로 했다.

소상공인들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계도기간 중에 종이컵과 빨대 사용을 놓고 고객들과 시비가 잦았다. 계도기간이 끝나 다회용기를 쓰게 되면 노동이 늘고, 노동을 줄이려면 장비를 들이고 알바를 고용해야 하는데 이게 다 비용 상승이다. 담배와 술로 식당과 편의점을 괴롭히는 청소년들처럼, 일회용품 과태료를 노린 블랙컨슈머가 등장할 거라는 걱정도 컸다.

환경단체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일회용기 금지 정책이 1년의 계도기간을 거쳐 정착됐는데, 제도화 직전에 뒤집었다고 정부를 비난한다. 야당은 소상공인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총선용 효자손으로 의심한다. 소상공인 표를 얻으려 환경을 포기했다는 주장이다.



환경분야는 문화지체 현상이 두드러진다. 모두가 환경 보호에 동의하면서도 막상 익숙한 생활방식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대의와 현실의 충돌이다. 과학이 개입하면 더욱 골치 아프다. 생산과 사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텀블러의 환경파괴에 비하면 종이컵이 더 친환경적이고, 에코백은 131회 사용해야 비닐봉지 한 장을 대체할 수 있다고 한다. 환경 만능주의의 허점을 파고드는 역설이다.

종이컵으로 불거진 일회용품 논란이 뜨겁다. 정부가 정책의 일관성을 잃어도 곤란하지만, 일회용품의 편의와 비용을 생계에 활용하는 국민들에게 무턱대고 금지를 강요하는 것도 폭력에 가깝다. 대의와 민심이 충돌하면 진지한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일회용 정쟁으로 일회용품 논란을 정리할 수 없다.

/윤인수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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