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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권 전쟁’ 상처 깊어지는 용주골… 또 한번 찬바람에 맞서다

유혜연
유혜연 기자 pi@kyeongin.com
입력 2024-03-19 19:00 수정 2024-03-27 15:30

[나는, 우리는 ‘성 노동자입니다’… 그 이후]

 

펜스 강제 철거 사태 11일 뒤 ‘또 다시 대치’

CCTV 설치 두고 전봇대 고공농성으로 반대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용역에 일분일초 긴장

“파주시, 연대해주는 시민 이야기 들어줬으면”

용주골

19일 오전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에 용역 등이 CCTV를 설치하려 하자 이곳 종사자 여성들이 전봇대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였다. /주홍빛연대 차차 제공

전봇대에 박힌 두꺼운 못을 지지대 삼아 무작정 위로 올라갔다. 고압전선이 휘감은 꼭대기에 다다를수록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다급한 마음과 달리 팔다리의 힘은 차츰 빠졌다. 이른 봄에 불어온 찬바람마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별수가 없었다. 그냥 버텼다. 용역이 모두 물러간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여자는 땅을 밟을 수 있었다.

19일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에서 또 한번 대치가 벌어졌다. 지난 8일 펜스 강제 철거 사태(3월11일 3면 보도=용주골이 맞이한 ‘세계여성의 날’… “방관의 역사 지우기”)가 일어난 지 11일 만이다. 현장에서는 성매매 종사 여성과 용역·시 관계자·경찰 등 180여명이 ‘CCTV 설치’와 ‘펜스 철거’를 두고서 팽팽하게 맞섰다.

갈등은 이른 아침인 오전 8시께부터 시작됐다. 파주시에서 보낸 용역이 크레인을 끌고 용주골 내부로 진입했다. 이들은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 초입 주차장 인근 전봇대에 CCTV를 설치하고자 했다. 앞서 지난 1월30일에도 같은 장소에 CCTV를 달려고 했으나, 이곳 성매매 종사 여성들이 고공농성을 하는 등 강하게 저항하면서 철수했다.

용주골

19일 오후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집결지에서 이곳 종사자 여성과 연대 시민이 용역에 맞서 팔짱을 끼고 ‘인간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있다. /주홍빛연대 차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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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에서 용역과 이곳 종사자 여성 등이 가림막 형태의 펜스 철거를 두고 대치를 벌이고 있다. /주홍빛연대 차차 제공 영상 캡처

CCTV 설치는 성매매 집결지를 ‘간접적으로’ 폐쇄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물리력을 동원해 영업하지 않는 유리방을 철거하는 것보다 효과가 크다. 아무리 ‘방범 목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도, 공공에서 관리하는 CCTV가 성매매 집결지를 녹화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영업은 위축된다. 신상이 노출될 위험도 높아진다.

이날도 성매매 종사 여성 두 명이 아파트 3층 높이 전봇대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였다. 이 중 한 명은 전봇대 맨 위까지 올라가 한 시간 반가량 시위했다. 전봇대 아래서는 동료 성매매 종사 여성 80여명이 항의를 이어갔다. 고압 전선이 흐르는 등 상황이 위험해지자 한 시간 뒤인 9시께 에어 매트가 바닥에 깔렸고, 오전 10시께가 돼서야 용역이 모두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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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집결지에서 이곳 종사자 여성들이 펜스 철거에 맞서 시위를 하고 있다. /주홍빛연대 차차 제공

그러나 안심하긴 일렀다. 겨우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오후 1시께 또 다른 용역이 용주골 내부로 들이닥쳤다. 지난 8일 펜스를 없애기 위해 연풍교 초입에 자리한 ‘물방울 슈퍼’ 인근으로 찾아왔던 그 용역이었다. 이날은 진입로를 바꿔 연풍교 뒤편으로 들어왔다.

성매매 종사 여성과 연대 시민은 서로 팔짱을 끼고 ‘인간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또 다른 여성들은 펜스 바로 옆에 달라붙어 함부로 펜스를 철거하지 못하게 막았다. 한 시간가량 이어지던 대치는 오후 2시30분께 용역이 그대로 철수하면서 마무리됐다.

주홍빛연대 차차의 여름씨는 “이곳에서 삶을 살아가면서 일하는 여성들과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조율하는 시도조차 없는 상황”이라며 “사람을 사람으로서 존중하는 최소한의 태도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항의했다.

이날 이른 아침과 오후, 두 번의 싸움 끝에 이곳 여성들은 CCTV 설치와 펜스 철거를 막아냈다. 그러나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용역에 일분일초 마음을 놓지 못한다.

용주골 성매매 종사 여성 A(40대 초반)씨는 “대치하는 중간중간 모욕적인 욕을 같이 듣는다. ‘미친X’…. 아가씨들이 지나가는 시민들한테 무시를 당하는 처지이긴 하나, 우리의 생존을 지키려 싸우는 건데 이런 욕까지 듣는다”면서 “아가씨들, 그리고 연대해주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파주시가 진지하게 들어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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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파주시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에 용역 등이 CCTV를 설치하려 하자 이곳 종사자 여성들이 전봇대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였다. /주홍빛연대 차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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